언제부턴가 빨간 안경 아저씨가 각종 매체를 배회하고 있다. 드럽게 재미없는 빨간 안경 아저씨가.
이동진은 영화평론가로서 유례없는 장악력과 브랜드파워를 공인받은 사람이다. 많은 이들이 이동진의 스타일과 호흡법을 흉내 내고 있으며 이 현상은 90년대 정성일의 그것보다 훨씬 더 범대중적이다. 문제는 그 프레임이 지나칠 정도로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저널리즘 출신인 이동진의 중립적이고 때로는 나이브해 보이는 태도를 흉내 내고 그의 취향을 따르는 것이 장기적으로 그리 건강한 흐름이 아닌 것으로 사료된다.
멀리 갈 필요 없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다양성영화(라고 흔히 불리는 영화)가 소비되는 방식에서 문제점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다양성 영화에서는 권력으로 자리잡은 이동진
간단히 정리하자면 대한민국 대중들에게 다양성영화는 두 가지로 나뉜다. 이동진에게 ‘미리미리추천!(지금 한 번 쓰면서도 오그라드는데 이동진 아저씨는 무슨 생각으로 계속 미는 걸까)’을 받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더 까칠하게 말해보자면 이동진에게 언급된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현재 대한민국에서 소개되고 있는 다양성영화들은 전혀 다양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
쉽게 비교해 볼 수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코언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은 각각 12만 명과 10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하면서 다양성 영화로서는 기록적인 흥행을 갱신하였다. 이 두 편의 영화는 누가 봐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영화이고 이 영화를 알아본 한국관객들의 수준이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각을 조금만 더 넓혀보면 상업 영화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양극화 현상이 입을 벌린 채 도사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년 하반기부터 올해 3월까지 개봉한 한국독립영화 중 만 명 관객을 넘은 영화는 고작 두 편(<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안녕!? 오케스트라>)에 불과하다. 두 편 모두 기획성이 짙은 다큐멘터리로, 극영화는 단 한 편도 관객 수 만 명을 넘기지 못했다. 심지어 장률 정도의 유명 감독의 신작(<풍경>)도 고작 2천 명의 관객을 모으는데 그쳤다.
영화의 흥행에 대해서 늘 무관심해온 터이지만 나로서는 12만 명이 본 (이동진이 상찬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1200여 명이 본 (이동진이 무시한) 김동현 감독의 <만찬> 사이에는 어떤 차이 혹은 간극이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우아한 지식인”을 대변하는 이동진의 모순
언제부터 이런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우선 기본적으로 한국관객들이 다양성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만큼은 명백해 보인다(아무리 심야 시간대였다지만 공중파에서 <토리노의 말>에 대한 분석을 긴 시간 동안 보게 된 것은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의 관객들이 원하는 포지셔닝이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줄 아는 우아한 지식인 관객’ 정도로 보인다는 거다. 이동진 팬덤은 “<그래비티>에 이동진이 별 다섯을 줬대! 어머! 체험의 영화, 경이로워!”하며 우르르 달려가는 정도로 뇌가 없는 집단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고상함에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동진의 지성을 동경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사실이다(이는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허지웅 팬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허지웅 팬덤은 자신들의 ‘힙’함을 과시하기 위해 허지웅을 동경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동진은 타르코프스키와 베리만을 좋아하는, 기본적으로 아주 우아하고 점잖은 영화취향을 가진 평론가다. 그는 하모니 코린의 <스프링 브레이커스>의 쭉쭉빵빵 누나들의 비키니 몸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짐 자무쉬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의 뻔뻔스런 뱀파이어 유-우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속 정교한 플롯과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현대인들의 관계를 읽어내면서 “그래서 그 할아버지랑 그 여자애랑 잤다는 건가?” 따위의 저속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겨울왕국> 속 디즈니의 정치적 질문에 호들갑을 떠는 대신, 영화 속 결말 비틀기는 또 다른 관습에 불과하다며 거리를 유지한다.
저널리즘 출신의 중립적 입장에서 답하기 곤란한 영화를 만날 때, 그의 평은 무언가 회피한다는 인상을 주거나(<겨울왕국>) 아주 오만한 기준으로 영화를 재단한다(<코스모폴리스>). 그의 우아한 취향은 한국 다양성영화 관객들의 취향과 정확하게 조응한다.
이동진이 국내독립영화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최시형의 <경복>을, 장건재의 <잠 못 드는 밤>을, 김동주의 <빗자루, 금붕어 되다>를, 이강현의 <보라>를, 곡사의 <고갈>을 논하지 않는다. 대신 <혜화, 동>, <파수꾼>, <사이비> 등을 (장르적 완성도의 범주 안에서) 논한다. 그는 매끄럽게 한국의 사회/현실을 회피한다.이는 비단 이동진만의 문제가 아닌, 한국평단 전체의 게으름이기도 하다. 그들은 스스로 영화 취향을 고립시키고 있다.
깊이 있는 텍스트에의 강요 혹은 집착
또한 이동진은 좋게 말하면 강박이 없고, 조금 나쁘게 말하자면 비평적 태도의 좌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 다소 리뷰어적인 태도를 지니는 – 평론가다(정성일 평론가가 “<사형수의 엘리베이터>와 <네 멋대로 해라>를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일까요?”라고 묻자 이동진 평론가가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인데요.”라고 대답한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또한 유운성 프로그래머는 본인의 트위터를 통해 “홍상수와 라스 폰 트리에를 동시에 좋아하는 것은 아크로바틱한 취향으로 보인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동진은 2011년 연말결산에서 외화 1위로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를, 국내영화 1위로 홍상수의 <북촌방향>을 선정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웬만큼 공인된 외국의 아트하우스 영화들에는 거의 항상 호평을 쏟아내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동진의 추종자들이 원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노예 12년>을 칭찬하고 <300:제국의 부활>을 비판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 자신들을 일종의 방어선으로 생각하는 것. 그런데 그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혹은 무엇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미 평가가 끝난 것처럼 보이는 영화들에(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와 <300>의 후속편에 대한 미학적 평가라니. 이보다 더 따분할 수 없다) 대한 확인사살이야 말로 (이동진이 에 대한 평에서 쓴 것처럼) “철지난 돌림노래처럼 다가온다.” 2013년 흥행 5위를 기록한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돌풍을 “우리까지 휩쓸릴 필요 없는 이상한 열풍”(이동진과 세트로 묶이는 김태훈의 말이다. 이 말을 내뱉고 난 뒤, 뭔가 우쭐했던 그의 표정을 혐오한다)이라 말하는 것보다 더 꼰대스럽고 오만한 태도가 또 있을까.
개인의 취향을 재단하겠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동진이 지니고 있던 이 두 가지 특징이 장기화되고 지배적인 프레임으로 설정되면서 깊이 있는 텍스트에의 강요 혹은 집착이 영화감상의 제 1순위의 태도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내가 <홀리 모터스>를 좋아했던 이유는 거기에 활동사진으로서의 마법 같은 활력이 있었다는 것이지 이 영화가 어떤 깊이 있는 텍스트와 메시지를 수반하고 있었느냐가 아니었다.
인문학적 소양과 자의식 과잉
가끔 이동진 워너비들의 글을 읽을 때면, 영화를 도구 삼아 자신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뽐내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는 기분이 종종 든다. 그런 부류들은 데이빗 오 러셀의 <아메리칸 허슬> 같은 영화를 만날 때 곤란해진다. 영화의 활력은 인정하면서도 주제의 깊이감이 부족하다는 평을 주로 사용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언제부터 주제의식과 텍스트의 깊이감이 모든 영화를 재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었는지 의아하다. 이동진의 20자평을 비틀어서 말해보자면, ‘어떻게’에 대한 질문을 결여하고 ‘무엇’과 ‘왜’에 집착한다고나 할까.
비슷한 맥락에서 이동진의 글도 부담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대중들에게는 꽤 점잖은 빨간 안경 옆집 아저씨로 이미지 메이킹 되어 있지만 그의 글에는 다분히 소녀스러운 수사학과 자아도취에 가까운 자의식 과잉이 이상하게 한데 엉겨 붙어 있다. 점잖은 빨간 안경 너머로 저돌적인 위압감을 숨기고 있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악마를 보았다>에 대한 글이 특히 그렇게 느껴졌다. 견해 자체는 별로 특별한 것 없었으나 그 논지를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거의 확신에 차서 심판을 하듯 내리치는데, 관점은 별 것도 없으면서 민망할 정도로 자의식이 앞선다는 느낌이 들어 의아했다. 거의 같은 견해를 가지고 글을 썼던 김혜리 기자의 조심스런 글과 비교해보면 이동진의 위압감과 인문학적 오만함이 두드러진다.
<악마를 보았다>에 대한 평이 그나마 귀엽게 봐줄 수 있을 만한 수준이었다면, 그의 인문학적 오만함이 심히 거슬릴 정도의 글도 있다. 본인이 극찬하는 영화에 대한 글에서 그런 느낌을 받곤 하는데, 특히 <박쥐>나 <안티크라이스트>, <토리노의 말> 같은 영화에 대해서는 본인의 전공인 종교학, 도상학과 결부시켜 마치 본인이 감독이라도 된 양 자신의 지성과 소양을 뽐내가면서 영화를 방어하는데- 영화를 방어하기 위함인지 자신의 소양을 뽐내기 위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오만하거나 위압감이 드는 수준을 넘어 어떻게 글을 진행시켜야 될지 몰라서 어마어마한 무리수와 과장을 잔뜩 실어 담고 있는 인상이었다.
이웃 블로거 홍준호님은 황진미, 심영섭 평론가를 두고 “자신이 의사의 능력이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어서 평론을 쓰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비교를 강조하기 위해 이 멋진 구절을 빌려와 다소 비틀고 싶다. 가끔 어떤 영화 앞에서 이동진은 본인이 서울대 종교학을 나왔다는 점을 알리고 싶어서 평론을 쓰는 것 같다.
영리한 평론가, 하지만 내공 없는 워너비는 걱정
그나마 위 영화 앞에서의 이동진은 똑똑해 보이기는 한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를 도구 삼아 자신의 인문학적 소양을 뽐낼 수 있기는 한다는 것이다. 이때 영화의 핵심과는 한참 벗어나 있을지는 몰라도, 대중들에게 만큼은 전문가 아저씨로 보일 여지가 있다. 그러나 특유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쉽고 빠른 평이 안쓰러워질 때가 있다.
예컨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평이 그랬다.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각색이며 영화와 문학이 얼마나 다른 매체인지 새삼 확인했다는 투의 비아냥거림으로 끝맺는 글이었는데, 오히려 크로넨버그 정도 되는 감독의 선택과 각색 방향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독자로서의 능력을 더 믿는 대목(“드릴로의 원작은 현대 자본주의의 탐욕을 비판하는 데만 집중하는 소설이 아닙니다,”라는 말에 “크로넨버그 영화도 마찬가진데요?.”라고 대답하고 싶어졌다)에 이르면 좀 신기할 지경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동진 평론가는 평론가의 자의식이 없는 외부인의 위치에 있을 때가 가장 잘 어울린다. 인터뷰어, 에세이스트, DJ 등 다방면에 재능을 나타내는데(달리 말하면 특유의 분위기와 교양이 잘 어울리는 위치다.) 평론가로서 글을 쓰는 순간 부담스러운 우격다짐이 난입한다.
본업과 부업 사이에서 간을 보는 허지웅 평론가보단 훨씬 유연하고 연계도 자연스러워 보인다(허지웅은 늘 자신을 “글 쓰는 사람이며 최근에 방송 조금 하고 있다.”고 소개하는 전략을 사용하지만 그는 차라리 방송인이라는 직업이 더 적절해 보이며 방송 출연 이후 그의 칼럼들은 쓸데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의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최근에 논란이 된 그의 글들은 불필요한 논쟁에 알아서 불을 지핀다는 인상이다. 희미해져 가는 글쟁이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우매한 대중들이 내 말을 못 알아 처먹잖아!” 식의 우격다짐). 하여튼 tv에서 볼 수 있는 사람 중에 이동진 만한 깊이를 가진 사람은 또 없으니까.
이동진을 싫어하진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장점과 특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영리한 방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물론 그의 팬덤도 싫어하진 않는다. (종종 아이돌 팬덤을 연상시키는 열성 팬을 목격할 때면 다소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좋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다만 그의 호흡법과 태도가 지배적인 작금의 현상에 대해서는 다소 염려를 표하고 싶다. 모든 워너비가 장기적으로 불필요하지만, 특히 이동진과 같은 태도를 흉내 내는 것은 아직 내공의 틀이 잡히지 않은 리뷰어들에게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추신. 이동진이 아저씨 유머를 그만둘 때까지 이동진을 까겠습니다.
원문: 맥거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