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그래도 감자탕인데 감자를 넣어주셔야죠.” 얼마 전에 감자탕을 먹으러 갔는데 감자가 들어 있지 않아 아주머니께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자 자리를 함께 한 분이 “야, 이게 감자가 들어가서 감자탕이 아니야. 이 돼지뼈가 감자뼈라고”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사실과 다른 말씀이었습니다. 그 뼈가 감자뼈라서 감자탕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감자탕에 그 뼈를 써서 감자뼈라고 부르는 겁니다. 물론 심지어 그 뼈 모양이 달 감(甘)을 닮아 감자탕(甘字湯)이라고 말하는 분도 만나봤으니 저 분만 허튼소리를 하신 건 아닙니다. 그래도 대한한돈협회에 직접 문의해 “돼지에는 감자라는 부위가 없다”고 확인을 받았으니 믿어주셔요. 감자탕의 감자는 뿌리채소 감자 맞습니다.
두산백과는 한 술 더 뜹니다. 이 백과에서 감자탕을 찾아보면 “감자탕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자웅을 겨루던 삼국시대에 돼지사육으로 유명했던 현재의 전라도 지역에서 유래되어 전국 각지로 전파된 한국 고유 전통음식이다. 농사에 이용되는 귀한 ‘소’ 대신 ‘돼지’를 잡아 그 뼈를 우려낸 국물로 음식을 만들어 뼈가 약한 노약자나 환자들에게 먹인 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고 나옵니다. (사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쇠고기를 너무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학자 이규경(1788∼1863)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따르면 조선에 감자가 들어온 건 1824년입니다. 삼국시대에는 당연히 감자탕을 끓여 먹을 수가 없없죠. 고추장도 넣을 수 없었을 테니 지금하고 감자탕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거꾸로 해석해 “삼국시대에는 감자가 없었으니 돼지 등뼈 척수가 감자가 맞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감자탕을 찾아보면 1972년이 돼서야 이 말이 등장합니다. (1937년 이전에 등장하는 감자탕은 감자로 만든 설탕을 뜻합니다.) 이 낱말이 제법 높은 빈도로 나타나는 건 1989년 이후입니다. 그 전까지는 감자탕이 그리 익숙한 음식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설렁탕은 1922년부터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는 게 반증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감자탕은 어디서 유래한 걸까요. 일단 두산백과 설명처럼 감자탕이 전라도에서 유래한 음식이라는 추측은 사실에 가까운 모양입니다.
그 다음으로 감자탕이 탄생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던 곳은 인천입니다. 육상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서해안 항로를 따라 전라도 사람들이 인천으로 많이 이주해 살았습니다. 다음은 페이스북 친구 분의 말씀. “인천 동구 중구는 항구 지역이라 외지인, 특히 전라도 이주민이 많았고요, 그 이유로 홍어거리가 곳곳에 있었습니다.”
사실 동물 뼈를 끓여 먹는 건 전 세계적으로 퍽 일반적인 조리법입니다. 그런데 왜 감자가 들어갔을까요. 지금처럼 우리가 감자를 널리 먹게 된 건 일제 강점기 때부터입니다. 일제가 쌀을 수탈하는 대신 감자를 먹으라고 했기 때문이죠.
자기네가 감자탕 원조라고 주장하는 한 프랜차이즈 업체도 이 추측을 뒷받침해줍니다.
전북 순창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한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한동길은 부친의 영향으로 한의학 교육을 받던 중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휘말려 인천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가문이 기울고 일가의 생계를 위해 경인철도 회사의 인부로 일하던 한동길은 끼니도 거른 채 작업하던 인부들을 위해 평소에 갖고 있던 한의학 지식을 활용하여 가장 싼재료였던 시래기, 감자, 돼지뼈를 이용한 탕국을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제공하게 되었는데 영양가가 높고 건강에 좋은 통뼈 감자탕이 인기를 얻게 되어 1900년 한강철교 공사가 막바지에 이른 노량진 근처에서 함바집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인선만 있던 게 아닙니다. 일제는 수원과 곡창지대 여주·이천을 오가는 수려선(水驪線)을 만들어 쌀을 수탈했습니다. 이 노선은 수원에서 수인선과 만나 인천을 향했습니다. 수원에서 여주까지 사실상 단일 철도 노선으로 연결됐던 셈이죠. 자연스레 음식 문화도 이 철도를 따라 오갔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음식이 ‘사뎅이‘입니다. 다음 지도에서 “사뎅이”를 찾아 보면 1972년 완전 폐선된 이 철도 노선을 따라 퍼져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뎅이는 감자탕하고 사실상 똑같은 메뉴입니다. 재미있는 건 호남 사투리로 ‘살덩이’를 뜻하는 말이 사뎅이라는 점입니다. 이게 경기 남부에 퍼져 있는 겁니다.
요컨대 우리가 지금 감자탕이라고 부르는 음식은 일제 강점기 때 처음 등장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전라도 출신 이주 노동자 집단이 인천에서 ‘외식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손쉽게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음식을 찾다 보니 고기 뼈를 푹 삶아서 국물과 함께 내놓은 형태가 됐을 겁니다. 감자는 싸니까 덤으로 넣었을 거고요. 그 뒤 사뎅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다 감자탕이 된 겁니다.
그래도 궁금증이 하나 더 남습니다. 그러면 이름은 왜 감자탕이 된 걸까요?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있는 ‘감자국 거리’가 그 원류가 아닐까 하는 게 제 추측입니다. 아래는 한국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따온 내용입니다.
응암동 감자국거리의 역사는 19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림시장 주변에 돼지뼈를 푹 고와 육수를 만들고 그 육수에 돼지 등뼈와 감자와 우거지 등을 넣고 끓여 내는 감자국이 등장했다. 감자국이 맛있다는 소문이 나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자 주변에 음식점들이 하나 둘씩 늘었다. 1990년대는 응암동 감자국거리 최고의 번성시기로 열 곳이 넘는 감자국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감자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점하고 엇비슷합니다. 국이 탕으로 바뀐 건 ‘국과 탕 차이‘를 떠올려 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고요. 그리하여 이제 그 음식을 모두가 감자탕이라고 부르게 된 게 아닐까 하는 게 제 결론입니다.
재미있는 건 2000년 이전만 해도 감자탕에는 감자가 제법 푸짐하게 들어 있어 이런 논란이 생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감자탕에 감자 숫자가 확 줄어들면서 이 논란이 생기게 된 게 아닌가 합니다. 그래도 감자탕의 감자는 여전히 감자입니다.
출처: kini’n cre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