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뜨면 가장 먼저 찾는 건 신문도 TV도 아닌 휴대폰이다. 통화를 위해서가 아니다. 언제 시작된 습관인지 모르겠지만 이즈음 휴대폰 화면에 눈과 코를 박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서둘러 열어보는 건 ‘페이스북’이다. 간밤에 누가 무슨 글을 올렸는지, 어젯밤에 올렸던 글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은 어떤지. 어떤 댓글이 달렸는지, ‘좋아요’는 몇 개나 붙었는지가 궁금한 것이다.
나를 보는 것인지 남을 보는 것인지 모르겠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인지 남에게 비친 나를 보려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아무려나, 나만 그런 걸까? 정도의 차이가 있을망정 누구나 자기 자신의 모습, 특히 타인에게 비친 자신의 모습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산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거기에 한 가지가 추가됐다. 다른 사람에게 비친 내 모습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이다.
“21세기는 자기 자신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온라인의 바다를 30분만 훑어봐도 자기에게 관심을 보여 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무수히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주절댄다. 일기를 쓰고, 대화를 나누고, 자신이 하는 일을 사진에 담아 올린다. 이들은 외향적인 성향을 활달하게 보여주는 한편, 예전에 볼 수 없을 만치 자신의 내면도 살핀다. 블로거들과 누리꾼들은 각자의 체험을 시시콜콜 파고들며 분석하는 동시에 자아의 향연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사라 베이크웰 저, 김유신 옮김, 책읽는수요일 간, 2012)의 서문에 나오는 글이다. 몽테뉴의 <에세>를 현대적 관점에서 새롭게 구성한 책이다. 그래선지 저자가 내리는 서문의 결론은 단호하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을 만든 사람, 몽테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써서 남들이 각자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든 거울이 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누군가 그런 거울을 발명해야 한다. 이런 거울을 처음 착상한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가 바로 그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글쓰기의 원조가 몽테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관심은 그 이유와 방식일 테다. 몽테뉴는 대체 어떤 연유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걸까. 의도적으로 거울을 만들었다고 보긴 힘들다. 다만 자신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그게 자연스럽게 거울이 된 것이다. 그의 글쓰기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질문은 단지 해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몽테뉴의 관심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따위의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가?’에 더 관심을 가졌다. 몽테뉴는 추상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각 사례마다 자신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대처할 때마다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생생하고 실감나게 각 사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자세하게 들려준다.
그러한 질문과 사례를 모은 것이 <에세Essais>이다. 그의 책은 흔히 ‘수상록 혹은 명상록’이라 부른다.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차용한 탓이다. 원제 그대로 ‘에세(essais)’라 부르는 게 자연스럽다. ‘에세’라는 말 자체가 몽테뉴의 창조물이다. 그의 글에 영향을 받은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에세’의 영어식 표기인 ‘에세이(essay)’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그 ‘에세이’가 지금껏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에세이’라는 말이다.
프랑스어로 ‘에세예(essayer)’는 ‘시도하다’라는 뜻이다. 어떤 것을 ‘에세이’한다는 말은 어떤 것을 시험하거나 맛본다는 뜻, 또는 어떤 것을 휘저어본다는 뜻이다. 17세기의 어느 몽테뉴주의자는 ‘에세이’를 “총알이 똑바로 나아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권총을 쏘아보는 것, 또는 말이 말을 잘 듣는지 타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몽테뉴는 총알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말이 통제할 수 없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작품이 그렇게 예측 불가능한 상태로 세상에 나온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에세(Essais)’는 몽테뉴가 창조한 새로운 글쓰기 방식
몽테뉴는 역사가로는 타키투스를, 전기 작가로는 플루타르코스를 좋아했다. 전기 작가로 명성을 떨친 슈테판 츠바이크가 몽테뉴에 관심을 가졌던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 셈이다. 츠바이크는 그의 유작이 된 미완성 원고 <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원제 : Montaigne)>(유유 간, 2012)을 통해 몽테뉴에 대해 차분하게 회고한다.
“아직은 젊어서 경험이 부족하거나 좌절을 겪은 적이 없는 사람은 그를 제대로 평가하거나 존중하기가 어렵다. 자유롭고도 흔들림이 없는 그의 사색은 우리 세대처럼 운명에 의해 폭포 같은 격동의 세계 속으로 던져진 세대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전쟁, 폭력, 전제적 이데올로기가 목숨을 위협하고, 한 사람의 삶에서도 가장 소중한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시대를 뒤흔들린 영혼으로 겪어본 사람만이 그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라야 이런 집단 광증의 시대에 가장 내밀한 자아에 충실하기 위해선 얼마만 한 용기와 정직성과 단호함이 필요한지를, 그리고 이 거대한 파멸의 한가운데서 정신적 도덕적 독립을 흠 없이 지키는 일보다 세상에 더 어렵고도 심각한 일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품위나 이성에 대해 스스로 의심을 품고 그것에 대해 절망도 해봐야 비로소, 그런 전체적인 무질서 한가운데서도 모범적으로 똑바로 서 있는 어떤 개인을 진짜로 찬양할 수 있게 된다.”
청춘이 사라져야 비로소 그 가치를 알고, 건강이 없어져야 그 귀중함을 알고, 우리 영혼의 가장 소중한 핵심인 자유를 뺏기는 중이거나 이미 빼앗긴 다음에야 비로소 그 귀함을 안다는 것이 인생의 비밀스러운 법칙이다. 몽테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유럽의 16세기, 집단 광증의 시대
몽테뉴(1533~1592)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가 살았던 유럽의 16세기는 어떤 시대였을까? 1517년을 기점으로 삼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뒤이은 칼뱅의 <그리스도교 강요>의 조직이론을 바탕으로 개신교는 16세기 중반부터 가톨릭에 맞서는 당당한 세력으로 자라났다. 같은 그리스도교지만 서로 믿음과 관습이 다른 두 종교 집단은 그 어느 쪽도 양보가 없었기에 피를 부르는 전쟁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이른바 종교전쟁이다.
16세기 후반에 잉글랜드의 격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대립 그리고 프랑스를 피로 물들인 내전인 위그노전쟁, 스페인 절대주의에 맞서 일어난 네덜란드의 전쟁과 독립 등이 모두 종교전쟁의 성격을 띤다. 이어서 17세기에는 유럽 대륙 내부의 세계전쟁이라 불리는 30년 전쟁(1618~1648)이 벌어져 대륙 전체가 피로 얼룩졌다. 특히 대륙의 중앙부에 자리 잡은 오늘날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이 전쟁의 중심 세력으로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또한 종교전쟁이다.
종교전쟁은 이미 신앙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지닌 집단적 광증의 표현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랑과 평화를 설파하는 그리스도교를 위해, 즉 신앙을 위해 서로를 죽이고 전쟁까지 마다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 집단광증의 시대에 관용(톨레랑스)과 타협과 온건함을 옹호하고 끝까지 실천하려 노력했던 일단의 인문주의자가 바로 에라스무스, 카스텔리오, 몽테뉴 같은 인물이다.
<에세>을 쓴 몽테뉴의 생애에서 가장 특기할 부분은 아마도 어린 시절에 매우 특수한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과 말년에 맺은 앙리 4세와의 인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라틴어를 익힌 과정은 오늘날의 교육적 관점에서 봐도 매우 흥미로운 실험이다.
몽테뉴가 죽기 얼마 전에 위그노 지도자인 나바르의 앙리의 사절이 되어, 앙리의 개종 결심을 알리는(앙리3세에게) 역할을 맡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뒷날 앙리 4세가 되는 인물이 낭트칙령(1598)을 발표하기 이전 프랑스 왕이 되는 과정에서 몽테뉴가 중요한 중개자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앙리 4세의 태도와 낭트칙령에는 관용의 정신이 들어 있다. 이 일은 몽테뉴의 정신적 태도와도 아주 잘 어울리며, 대립과 전쟁의 시대에 아픔을 느낀 츠바이크가 추구하던 관용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이념이 극단으로 대립한 시대에 몽테뉴는 중립적 태도와 뛰어난 지적 균형으로 온건한 중도의 삶을 살았다. 다른 사람이 나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지닌 관용이란 성숙한 민주사회의 기본 태도 가운데 하나이지만 실천하기는 몹시 어려운 이념이다.
몽테뉴가 살았던 유럽의 16세기는 오늘날의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따지고 보면 누구에게나 현실은 늘 고난과 고통을 감수할 것을 강요한다. 제도와 법은 언제나 멀리 있으며 무시무시한 폭력은 늘 가까이에 있다. 누구나 격조 있는 문화적 삶을 꿈꾸지만 눈앞의 현실은 광기어린 폭력의 먹구름이다. 이성보다는 감정을 앞세우는 사람이 득세하며, 이성적인 사람의 차분한 사유를 방해한다.
몽테뉴의 16세기, 츠바이크의 20세기, 우리의 21세기
현실은 고통의 연속이다. 몽테뉴의 16세기와 츠바이크의 20세기, 우리의 21세기는 얼핏 많이 다른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결코 다르지 않다. 몽테뉴의 고독과 츠바이크의 고뇌는 ‘지금, 여기’ 우리의 고독과 고뇌, 고통을 표상하는 기호일 뿐이다. 그래서다. 450년의 시차를 둔 몽테뉴의 <에세>는 여전히 현대적 주제를 다룬 책이며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이 담긴 책으로 읽힌다.
19세기의 소설가 구스타브 플로베르(1821~1880)는 ‘어떻게 몽테뉴에게 접근해야 할지 궁금해 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그 책은 재미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읽지 마라. 야심 찬 사람처럼 교훈을 얻으려고 하지도 마라. 그 책은 ‘살기 위해서’ 읽어라.” 17세기의 사상가 블레즈 파스칼은 “그 책을 읽으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모두 몽테뉴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라고 인정했을 정도다.
슈테판 츠바이크 역시 몽테뉴는 현실 속의 자기 자신과 똑 같은 고민을 하는, 되레 자신의 고민을 더 깊이 파고들어간 사람으로 본다.
“몽테뉴의 책을 펼치면 펼치는 곳마다 우리 자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지금 이 시대에 내 영혼에 가장 내밀한 근심을 만들어내는 일들에 대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그가 더욱 명료하고 뛰어나게 생각하고 말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의 자아가 투영된 ‘너’가 있다.”(<위로하는 정신> 중에서.)
몽테뉴의 <에세>가 이토록 통시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숱한 이유가 있을 테지만 앞서 여러 사람이 인정했듯이 그는 심오한 철학이나 새로운 발명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활에서 얻은 풍부하고도 구체적인 소재를 이용해 글을 쓴 최초의 작가”였기 때문이다. 몽테뉴의 세계관, 즉 회의론자로서의 정신세계 역시 한몫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에세>, 시대를 초월한 모든 개인의 이야기
귀족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판사라는 현실권력을 뿌리치고 자신의 성에 틀어박혀 책읽기와 글쓰기에만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던 몽테뉴였지만 그 역시 모든 욕망을 온전히 제어하기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신의 서재 기둥과 지붕에 각종 경구들을 붙여놓고 수시로 음미하며 가슴의 불구덩이를 다스리려 했던 것이다. 그의 서재에는 54개의 경구들이 붙여졌는데 그중 유일하게 프랑스어로 된 문장(나머지 53개는 라틴어였다.)이 있었다. 솔직하고 자유로운 회의주의자 몽테뉴, 그 자신을 상징하는 ‘크세주(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문장이 그것이었다.
박홍규 교수는 ‘크세주’의 의미를 “심오한 사색의 결론이 아니라 회의주의적 사색의 이정표”(<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박홍규 저, 청어람미디어 간, 2004)라고 설명한다. 회의주의는 허무주의가 아니다. 자유로운 정신이다. 회의의 결과 어떤 현실성을 자유롭게 추구하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다.
몽테뉴의 회의는 우선, 자신을 아는 것이다. “크세주?(Que sais-je?)”, 즉 “나는 무엇을 아는가?”는 곧 몽테뉴의 좌우명이었던 셈이다. 몽테뉴의 서재 천장에는 또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200?~250?)의 회의주의에 관한 저서인 <피론주의 개설>에 등장하는 글귀도 붙여져 있다.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만이 확실하다.”, “나는 판단을 유보한다.” 등이 그것들이다.
회의주의자 몽테뉴는 현실의 문제에 어떤 해답을 제시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경계하고 또 경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다만 의심했고, 또 의심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의심은 불가지론이 아니다. 회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의를 통해 자신에 대해 바로 인식하고, 나아가 삶의 지혜를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섣부른 결론보다는 자신의 사유를 심화하는 과정으로서의 글쓰기에 전념했다. 그 글쓰기가 혹은 현실 문제의 해답이 되고, 혹은 새로운 길이 될 수 있음을 그 역시 감지했을 것이다. 다만 그는 소리 높여 주장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몽테뉴의 글쓰기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닮아 있다. 몽테뉴 역시 소크라테스에 대한 관심과 존경의 마음을 드러내곤 했다.
“소크라테스가 그 어떤 도그마나 학설, 법칙, 체계 등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몽테뉴는 그를 가장 좋아했다.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형태일 뿐이었다. 몽테뉴는 모든 것에서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모든 것을 찾는 인간이었다.”(<위로하는 정신> 102~103쪽.)
그러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 배꼽만 바라본다면 세상을 보지 못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역사를 읽고 철학을 공부했다. 자신을 가르치고 확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기 위해, 자신을 다른 사람들 옆에 세워보기 위해서였다.
성찰 혹은 화두, “나는 무엇을 아는가?”
자연에는 목적이 없는 것이 없으며, 심지어 목적 없음조차도 그렇다. 우주에는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눈을 활짝 열고 바라보면 가장 어리석은 사람에게서도 배울 수 있고, 학자에게서보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질문은 허투루 내뱉은 질문이 아니다. 끝없는 배움의 과정에서 문득 멈춰 서서 스스로를 돌아보았던 것이다. 전형적인 회의이며, 성찰이다. 얼치기 학자를 자처하기보다는 끝없이 정진하는 학생이고자 했던 몽테뉴의 정신이 집약된 질문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과는 다르다. 내가 추적한 ‘나’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나’를 지나치게 신경 쓰는 건 좋지 않다. 내 삶은 나의 것이라는 말처럼 우선은 스스로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몽테뉴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말이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