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 군인 아버지와의 베트남 여행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던 아버지와 2010년 베트남으로 여행을 갔다. 환갑이 훌쩍 넘은 그가 갖고 있던 소원 중의 하나는 요즘 젊은 애들이 꼭 해본다는 배낭여행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빛났던 젊은 시절이 남아 있는 베트남이 어떻게 변해 있는지 꼭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모님과 나는 하노이에서 호치민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주둔지었던 깜낭까지 배낭을 들고 떠났다. 베트남에 도착한 이후부터 부모님은 온갖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관절염으로 걷기가 쉽지 않은데 무거운 짐을 들고 체감온도 40도에 육박하는 길을 걷고 또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패키지 관광처럼, 한국의 입시 학원들이 수험생 시험 준비 시키듯 필요한 것만 압축적으로 후다닥 “명소”들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제서야 자신이 가졌던 “배낭여행”에 대한 낭만을 깨버릴 수가 있었다. 그가 그 전에 생각했던 배낭여행이란, 패키지 관광처럼 여러 곳을 둘러 보지만 남들을 따라 다닐 필요 없이 에어컨이 잘 나오는 차를 대절해서 타고 다니는 것이었다.
주둔지었던 깜낭에 도착했다. 택시를 하루 대절하여 그 마을을 둘러 보았고,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한국군이 있었던 곳이 어디었는지를 찾아 보았다. 아버지는 마을을 돌며 어렴풋이 미군의 창고가 있었던 곳을 기억해 냈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이 어드메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곳엔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갑자기 감정에 북받쳤는지, 차를 세우고는 그 다리에 홀로 서서 멍하니 밖을 보았다. 그러고는 나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새로 확장 시공을 하는 바람에 예전의 그 다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그 다리 옆에서 더운 낮이면 해먹을 걸어 놓고 낮잠을 자기도 했던 그 시간들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다리에서 좋아하는 사람의 집앞을 밤새 서성이는 사람처럼 덥다는 짜증 한 번 부리지 않고 계속 거닐고 또 거닐었다.
이후 우리는 깜낭의 한 시장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주둔 부대에서 맡은 보직은 밖에서 식수를 가져오는 것과 시장을 봐오는 일이었다. 그 시장도 많이 변했지만, 어렴풋이 남아 있는 그의 기억에 비추어 볼 때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듯 했다. 갑자기 아버지 입에서는 몇 개의 베트남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냉장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채, 삼복더위에 고기를 걸어 놓고 파는 푸줏간에서는 돼지고기를 몇 근 샀고 베트남어로 흥정도 했다. 닭고기도 사고 또 과일도 사고 또 야채도 샀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베트남의 관광지로 유명한 나짱의 한 리조트였기 때문에 요리를 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그렇게 “장을 보았다.” 시장을 돌면서 옆에 있던 어머니는 연신 “어머, 60년대 같아~”라는 말을 연달아 했다.
나는 내가 절대 살아 본 적이 없었던 한국의 60년대가 이랬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다. 아버지 또한 자신의 “쇼핑”이 쓸모를 위한 것은 아님은 알았다. 과일 몇 개를 제외하고는 고스란히 봉투째 택시 기사에게 드렸다. 은전 한닢의 주인공처럼 “그냥 사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자신이 젊은 날에 했었을 것을 말이다.
“60년대 같이”, 대형 마트도 없고 냉장고도 없이 고기를 내놓고 팔고 또 상인들과 흥정을 하며, 사람들이 분주하게 이동하면서도 인사를 나누고 “정”이 뚝뚝 묻어나는 베트남의 옛 한국 주둔지의 재래 시장에서 우리는 “시간 여행”을 그렇게 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청춘으로, 어머니는 “60년대”로, 나는 목격도 체험도 해보지 못한 과거 한국에 대한 상상으로 제 각각 다른 시간 여행을 했다.
아버지의 청춘이나 어머니의 과거 회상이나 같은 60-70년대이다. 하지만 그 사이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60년대의 베트남에서의 자기 청춘을, 어머니는 한국에서의 모습들을 생각하는 각기 다른 시간 여행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청춘 여행을 끝내고 우리는 미리 예약해 둔 나짱의 리조트로 향했다. 하노이와 호치민에서 끊임 없이 배낭여행에 대한 불평 불만을 늘어 놓아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나를 지치게 했던 두 양반을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서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바다를 가로 질러 작은 섬으로 들어가야 했다. 입구에선 숙소까지 개별 차량으로 안내했고, 동남아시아 최대의 수영장과 아쿠아리움 그리고 놀이 시설과 골프장까지 갖춰진 곳이었다.
만감의 표정이 교차하던 아버지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60년대”라는 말을 계속 하던 어머니도 더이상 60년대 타령을 하지 않았다. 바다가 훤히 보이며 에어컨이 짱짱 하게 나오는 객실에서 소파를 바다쪽으로 돌리더니 “난 하루 종일 이러고 있을 거니깐 건들지 마”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고, 어머니는 리조트 내에 있는 수영장과 아쿠아로빅 스케쥴을 확인하고는 제 각각 시간을 보냈다.
여행이 끝나고 몇 년 후, 부모님께 그 여행에서 무엇이 기억나냐고 했다. 입을 모아 말하셨다 – 청춘을 곱씹은 것도 60년대를 다시 본 것도 아니라 현 시대의 안락함을 한 곳에 응축한 리조트였다. 베트남은 더이상 시간 여행이 아니었다. 그냥 편안한 리조트로 정리된 것이었다.
미개발 국가로 떠나는 낭만적 시간여행
서론이 길었지만 이 글은 여행자의 시간 여행에 대한 글이다. 구체적으로는 예전에 허핑턴포스트에 안승준씨가 올린 “얼마나 벌면 우리는 만족할 수 있을까?”를 읽고 썼던, 일종의 반론이다.
허핑턴포스트의 이 글을 요약하자면, 강연으로 며칠 하노이에 다녀온 저자가 2000원으로 밥과 맥주를 해결하면서 “싼 값”에 놀라고, 맥주와 택시기본료가 몇 백원밖에 안하는 것에 “신기해”하다가 문득 도박판과 치열한 경쟁으로 치닫는 한국사회에 대한 성찰을 해본다.
10년 혹은 20년 정도 뒤쳐진 것으로 보이는 이 놀랍고 신기한 이 도시 하노이에서 유유자적 만족을 찾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끔씩 무료할 만큼의 여유와 진한 삶의 성찰과 옆을 볼 수 있는 아량과 배려를 통하여 돈과 무한경쟁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을 한다. 이 글은 2천개가 “좋아요”를 등록했고, 수백건의 “공유”를 통해서 삽시간에 퍼졌다. 헌데, 이 글은 정말로 “그럴까?”
물론 이런 식의 내러티브는 블로그나 각종 여행기에서 흔히들 목격하게 되는 구성이다. 여행자는 비행기를 탄다. 특히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뒤쳐져 있거나 개발이 덜 된 나라들로 이동할 때에는, 이 비행은 단순히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이동한다. 비행기는 교통수단이 아니라 갑자기 타임캡슐이 된다.
그곳은 나와 동시대 지구의 한 공간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어떤 “과거”로 읽힌다. 한편으로 그 과거는 불편하고 청결하지도 않고 소비할 곳도 없는 불평으로 가득한 것이 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과거의 어떤 낭만을 발견하고, 현재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시간여행”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갑자기 득도하게 된다.
현지를 무시하는, 자신만의 낭만에 젖은 서사들
이런 식의 이야기 구조는, 대충 1990년대 중후반 한국 사회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궤도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고 더이상 “후진국”이 아닌 시점부터 봇물터지듯 나왔다. 한때 유행처럼 나온 인도 여행기들은 대부분 이런 구성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여행지는 단순히 환경과 언어 그리고 문화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낭만화된 과거가 아직 살아 있어 현재 자신을 “진하게 성찰”하게 하는 여행자가 낭만화하는 특정한 시점의 과거라는 공간이 되어 버린다.
이 과정에서 여행자가 피상적으로 경험하고 목격하는 “현지”의 삶은 보통 여유롭고 꽤나 낭만적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런 내러티브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는, 하나는 우리는 모두 동시대를 다른 공간에서 살고 있다라는 동시대성이라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제거한다는 것에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타인의 삶을 보고 이해하고 또 기술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일상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자신의 시선을 지나치리만큼 성찰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그 두 가지의 문제가 만나게 되면, 현재의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잃어버린 과거의 낭만성에 대한 갈구로 쉽게 이어지기 마련이다. 정말로, 아주 많이들, 일어나는 일이다.
과연 베트남인들은 그렇게 낭만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찰리 채플린이 했다는 그 유명한 말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은 사실 어디서나 해당되는 몇 개 안되는 진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말을 살짝 다른 각도에서 이해해 본다면, 가까이서 보는 인생이란 여행자가 피상적으로 보는 그곳에서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라는 말이다. 이 기사에서 시간 여행지로 다루고 있는, 만족하는 삶을 싸게 살고 있는 신기한 도시 하노이를 예를 들어보자.
2천원으로 목욕탕 의자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맥주도 마시며 우리와 같은 물건을 적은 돈으로 소비한다지만, 1인당 개인소득이 2만불에 해당한다는 사회의 사람에게 2천원과 1인당 국민 소득이 2천불 정도에 있는 사회에서 2천원은 그 “싸다는 느낌”이 현격하게 다를 것이다. 물론 “시간 여행”을 즐기는 어떤 분들은 1인당 국민 소득을 보고는 “한국의 70년대 후반인가보군…”이라면서 또 다시 동시대성은 부정되고야 말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의 경제 발전과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다른 사회의 시간을 배열해 버리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다. 한국 경제와 특정한 시대가 다른 곳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절대로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러한 방식의 이해는 사실 상대를 좀더 제대로 보기보다는 특정한 틀로 고착시켜 버린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더구나 “팩트”로만 따져보자면, 절대로 2천원이라는 가격은 그들에게 유유자적하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게 만드는 “싼” 소비대상과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어를 구사할 줄 알고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다는 외국계 회사의 대졸자 초임 월급은 한국 돈으로 약 40만원이 채 되지 않는 상태이다.
압축적 경제개발 시대의 한국과는 달리, 현시대의 다른 나라들처럼 대졸 취업난 또한 역시 가속화되는 시점이다. 생산직은 이보다 절반이 채 되지 않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 저녁 한끼 먹으면서 마시는 맥주가 2천원밖에 안하는 것은 생산직 근로자에게는 월급의 1%를 넘게 쓴다는 이야기이다. 그나마 직장이 있으면 다행인 정도이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도 그것이 싸고도 여유로운 식사 한끼가 될까?
고된 경제 속 베트남 사람들에게 여유라고는 찾기 힘들다
2004년부터 베트남을 들락거리며 듣고 또 목격했고 또 만났던 사람들이 있다. 부유한 사람들은 다른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서민”들은 삶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2004년즈음에도 도무지 낮에 있는 직장으로는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밤에는 노점을 하고 온 가족이 생계에 매달려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게 해도 삶은 쉽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자주 드나드는 한국인이 많이 산다는 하노이의 한 아파트단지 옆에 있는 재래 시장에도 해도 뜨지 않은 새벽부터 먼길을 걷고 또 걸어 집에서 농사 지은 걸 아침 시장에 팔러 오는 소녀들이 있다. 열두세살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학교를 가지 못하고 이렇게 가족 생계에 매진해야 한다. 심지어 그 어린 나이에도 살아있는 닭의 목을 비틀고 털을 뽑아서 팔고 있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서 “2천원의 여유”는 단 한 줌도 찾을 수 없었다. 도시 빈민층이야 그렇다 치고, 자식을 대학에 보낸 일반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사정이 드라마틱하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경제가 급성장하는 시점에서 인플레이션은 종종 매우 심각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노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분의 이야기를 듣자면, 이 급격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생활비를 감당하기 힘들어 하는 하소연을 학생들이 많이 한다고 한다.
최근 3년사이만 해도 버스비는 3천동 (약 150원)에서 7천동 (약 350원)으로 두배 이상 치솟았다. 한국의 천원이 넘는 버스비를 감안하면 싼 금액이겠지만 임금 수준으로 봤을 때에는 무시할 수 없는 교통비이다. 시장통의 그 어린 아이가 새벽 이슬을 맞으며 왜 그 먼길을 걸어와야만 했는지 짐작할만 하다.
공공요금 또한 마찬가지이다. 상수도 요금만 보더라도 하노이는 2012년 하반기에만 35%가 인상되었고, 최근에 약 30%가 인상되었다. 만 2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에 전체적으로 이전보다 75% 이상 비싸진 것이다. “강연 차 출장으로” 한 번 갔을 때에는 “싸게”보이겠지만, 10년 걸친 시간으로 베트남을 지켜보며 또 들락날락 거리는 나로서는 그 물가 상승의 속도에 입이 딱 벌어진다.
한국 못지않게 팍팍하고 경쟁에 시달리는 베트남인들의 삶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개발의 열풍을 타고, “비싼 것”들은 대거 등장한다. 등장이 아니라 정말로 쏟아지는 수준으로 들어 온다. 지구 경영을 목표로 90년대부터 일찍이 베트남에 진출한 대우가 지은 하노이의 상징같았던 고층 건물 대우 호텔은 이미 랜드마크로서 그 지위를 잃어버린지 오래이다. 현지에서 “껑남”이라고 불리는 주상복합 경남 빌딩부터 최근 롯데가 엄청난 규모로 지은 상가와 호텔에 이르기까지 하루가 다르게 “비싼” 것들은 몰려온다.
이런 소비 영역의 확장과 개발은 대부분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는 소비를 할 수 있는자와 없는 자를 도시 공간에서 극명하게 나누어 내버린다. 물론 이런 비싼 소비 공간들은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로 채워진다. 아울러 이런 개발열풍은 늘 “추방”이라는 칼을 들고 있다. 아주 많은 이들은 지금까지 살았던 그 공간에서 저 먼 곳으로 추방되어야 했다.
저녁 나절에 싼 밥도 먹고 싼 맥주(나는 비어 하노이보다 싸이공 비어가 더 맛있다고 생각한다)를 즐기며 여유를 갖고 있는 하노이 사람들에 비해 바쁜 일상을 살며 많은 돈을 벌겠다며 인생의 행복이란 걸 잊은 채 오늘도 살벌한 경쟁과 스펙 전쟁을 하는 한국(? 혹은 서울?) 사람들을 허핑턴 포스트의 기사는 대비시킨다.
하지만 내가 본 하노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인천의 남동공단에서 이주노동을 하고는 비자가 만료되어 베트남으로 돌아와 현지 기업보다 임금을 더 많이 주는 한국계 기업에 들어가기 위하여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한국어학당을 다니던 A씨,
베트남의 일류대학이라고 꼽히는 곳을 졸업하고 국가 공무원 자리에 취직했지만 공무원 월급으로는 도저히 생활도 불가능하고 어느 정도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공무원에게 부여한 알량한 권력으로 작은 부정부패를 저질러 뇌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차라리 스펙을 올리겠다는 생각에 한국으로 유학을 결심한 B씨,
한국어도 중요하지만 최근엔 중국어도 무시할 수 없고 영어는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도시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다행히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아침에는 영어 오후에는 중국어 저녁에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C씨 등등…
일과 “스펙”은 그들에게도 이미 충분히 전쟁이었다.
언젠가 B와 함께한 저녁 식사에서 한국 기준에는 “싼 음식”이었지만 식당에서 자기가 시키는 게 너무 비싸지 않을까 싶어 B씨는 음료조차 주문하는 걸 주저했었다.
철저하게 타자화된 우리 시각 속 베트남의 모습
허핑턴 포스트의 기사는 이렇게 적는다.
“하노이의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적게 벌지만 같은 물건을 우리보다 적은 돈으로 소비하고 있었다….우리는 10년 전 20년 전보다 발전된 나라에서 편리해진 생활을 누린다고 말들은 하지만 우리보다 그 정도 뒤처졌다는 그 나라 그 도시에서도 대부분의 것들은 다르지 않게 누리고 있었다….과연 우리는 누구의 배를 불리기 위해 무엇을 위해 이리도 애쓰는 것인가 하는 혼란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기사에서 말하고 있는 하노이 사람들이란 정말 실체가 있는 것일까? 물론 내가 만난 사람 중에는 고위 관료의 대대로 잘사는 집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유럽 등지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베트남 경제가 발전할수록 걷잡을 수 없이 돈을 버는 부자도 있고, 역시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오랜 기간 동안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현재는 싱가폴에 거주하며 잘 나가는 직장에서 높은 임금을 받는 남편을 두고 아이를 키우는 일에만 전념하며 하노이 집에는 잠깐씩 놀러 가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물론 목욕탕의자에서 밥을 먹지는 않는다.
아마 이 기사에서 말하고 있는 하노이 사람들은 어떤 순간에 여행자에게 포착된, “여행자에 의해 서민으로 상정된” 한 그림일 것이다. 그들이 각각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삶이 수반하는 힘든 전쟁을 어떻게 치르는지는 보지 못한 채, 2천원짜리 소박한 밥에 맥주를 즐기는 유유자적한, 그리고 왠지 삶에 만족하고 성찰적으로 살 것 같은 낭만적인 그림일 것이다.
그들에게도 삶은 힘들고, 버거우며, 비싸고, 더구나 이와 동시에 급격히 비싸지며, 행복이란 점점 무엇을 소비하는가에 달려있고, 스펙 전쟁을 치열하게 하는, 지구적 자본주의가 굉장히 획일적으로 만들어낸 고단한 삶의 양식이 고스란히 있다.
그들도 삶이 비싸고, 또 힘들다. 언제 삶이 안 그랬을까 하지만, 최근엔 더더욱 그 정도가 심해졌다. 모두다 가질 수 없었지만 먹고 살았던 시대가 있었던 반면, 누군가는 다 가지지만 대부분은 박탈당해야 하는 시대가 갑작스럽게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행복이란 무엇을 가지고 또 배타적으로 소비할 수 있을 때만 느껴질 거라는 감각이 더해지게 된다.
피상적으로 타인의 삶을 보고 그것이 어떤 것이라는 성급한 묘사와 이해를 해버리기 전에, 자신이 그 설명을 하는데 얼마나 공을 들이고 또 동시대의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는가는 계속해서 필수적으로 점검해야할 외부인의 시선이다.
진짜 베트남의 모습: 착취와 인권의 공존
“동시대”로서 베트남이 나에게 가르쳐 준 어떤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올해만 5번 넘게 간 베트남이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이 급격한 경제 개발을 거치면서 필수적으로 진행됐던 이면의 횡포는 사람에 대한 착취였다. 폭력을 비롯하여 임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그것은 나타났고, “노동자”라는 의식과 권리 개념이 미약한 곳에서 이것은 굉장히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베트남에서는 적어도 그 부분이 조금 덜 한 것 같다는 “느낌”을 갖곤 한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권리 등을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당당하게 요구하기도 하고 또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개발과정에서 많은 사회보장제도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나마 베트남에서는 정부가 의료보험제도와 최저임금 등의 사회보장제도를 지속적으로 정비하는데 힘을 쓰고 있는 부분이 눈에 띄기도 한다. 최근엔 물가 수준에 따라 지역별 차등을 두었지만 다시 최저 임금을 높이기도 했다.
고용자들은 출산 휴가를 6개월 정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수유를 위해서 조기 퇴근도 가능하다고 한다. 한국의 60-70년대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꿈도 꿀 수 없는 일들이다. 세계 최고의 저출산율을 자랑하며 사회재생산이 거의 불가능해진 시점의 한국에서 말이다. 아울러 회사뿐만 아니라 상점 등에서는 휴일 근무 수당을 엄격하게 지키는 편이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베트남은 한국의 “과거”일까 아니면 “미래”일까?
아울러 베트남은 아시아 국가에서 최초로 동성결혼합법화를 통과시킬 국가로 가장 근접해 있는 상태이다. 특히 이것에는 다른 곳보다 법무부와 보건부 등 정부가 가장 열심히 추진하고 있는 상태이다. 인권과 개인의 행복추구권은 무시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게 정부 입장이다.
2012년 베트남의 법무부 장관은 “동성애자들에 대하여 사회적 편견을 만드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아직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인지와 인식이 성숙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적으로 그들을 금지시키고 차별하는 것은 부당하고 인권을 침해한다는 것이 입장이다.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부자나라이고 많은 희생을 통해 민주화를 직접 이루어낸 대단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는 며칠 전 “동성애자의 인권”을 지켜야 한다는 걸 공표하는 것에 처절하게 실패한 것이 안 떠오를래야 안 떠오를 수가 없다.
낭만이 아닌 실재의 만남이 필요하다
허핑턴 포스트의 안승준씨가 올린 글의 주제에는 나 또한 공감하는 바이다. 돈만 많이 버는 게 행복한 것은 아니고, 이렇게 치열하게 경쟁하며 서로 피곤하게 만들기 보다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갖고 삶을 성찰하고 같이 행복해지는 것을 찾아보자는 그 말에는 참으로 동감하고 또 공감한다.
하지만 이 말을 하기 위해서 그가 반면교사(?)로 이야기를 꺼내는 우리와 같은 것을 싸게 구입하는 “베트남”과 “하노이 사람들”에 대해 갖고 있는 시선과 그의 관찰/기술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특히나 그것이 “시간여행”을 하듯, 어떤 낭만화된 “과거”로 다루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이야 말로 겉핥기가 만들어낸 대상화요 타자화이다. 상대방이 실재로 어떻게 살아가든 보는 사람에 의해서 고정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글에는 “하노이 사람들”과 대비되는, 한국 사람들로 상정되는 “우리”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시공간의 강이 흐른다. 하지만 이 시공간의 강은 건널 수 없는 게 아니라 합류되는 지점이다. “그들”의 삶도 “우리”와 삶과 별반 다르지 않고 힘들고 괴롭다. 하지만 어떤 지점들에서 무엇을 배울 수는 있을 것 같다는 동시대성의 인지, 그리고 차이와 유사성이 만들어내는 무엇인가를 깊게 읽고 짚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가 서 있는 지점을 명확하게 보고, 잠깐의 낭만속에 취해 현재를 비판하는 오류를 피할 수가 있게 된다.
다시 한 번 짧고 쉽게 설명하자면,
이제 제발, 한국 보다 경제적으로 못사는 나라로 여행 가면, 시간 여행 좀 하지 마십시다. 그거 “나쁜 짓”이고 하등 도움도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