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던 김성근 감독이 한화 감독에 부임한 이래, 언론은 매일같이 지옥훈련으로 흙바닥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선수들을 기사화시키고 있으며 팬들은 ‘가학적’으로 보일만큼 남들의 고통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그 모습을 비판한다면 평소에 ‘인권’에 대해서 논하던 사람마저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돈 값을 해야지.”, “꼴찌가 어디서 놀아.” 등의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
꼴찌가 어디서 노냐
김성근 감독은 부임하면서 “휴식을 하나도 안 주려고 한다. 꼴찌가 어디서 노냐.”라는 말을 남겼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말인지라 뭐라 반박하기조차도 힘든 말이다. 학교 다니던 시절에 들리던(내가 들은 건 아니었지만) “공부도 못하는 애들이 어디서 놀아.” 와 다른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프로야구 선수의 본분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놀지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부 못하는 학생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해야 공평하지 않을까?
프로의 세계는 원래 자기가 알아서 하고, 안 되거나 못하면 자연적으로 도태되는 세계다. 다 큰 성인에게 어디서 노냐는 소리가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쟤들은 돈을 많이 벌잖아
위와 같은 말을 하면 항상 돌아오는 답은 비슷한 패턴이다. “쟤들 연봉이 얼만데.” 역으로 묻고 싶다. 연봉이 얼마인지는 아세요? 그래서 KBO에서 2014시즌 전에 배포한 가이드북에 있는 한화 선수단 연봉을 옮겨봤다.
트레이드가 되거나(이대수), 방출을 당하거나 하는 사정으로 약간의 변화는 있겠지만,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위 리스트에서 억대 연봉을 받는 선수는 투수중엔 5명, 야수중엔 8명이 있다. 그 13명의 선수를 제외한다면 ‘상당수’의 선수들은 201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25,931)만도 못한 연봉을 받고 있다. 도대체 어딜 봐서 돈을 많이 받기에 그렇게 굴러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나는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기에 어지간해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싶다. 그러나 “프로야구 선수는 돈을 많이 받으니까 좀 굴러도 괜찮아.” 라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닌 것 같다. 좋은 문장을 하나 알려줄테니 앞으로는 차라리 이렇게 김성근을 옹호하면 되겠다.
“연봉도 얼마 안 되는 선수들은 동계훈련을 하고 싶어도 하기가 힘든게 현실이다.” 이런식으로 말이다.
Human Rights for everybody. There is no difference.
문제는 사실 돈이 아니다.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한 세상이지만, 남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프로야구 선수들은 야구를 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야구로 돈을 번다고 해서 야구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에게 가족이 있고 사생활이 있는 것 처럼,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그들에게도 개인 사생활이 있다. 6개월 가량의 시즌동안 집에 있는 시간도 얼마 되지 않는 그들이 마음 편히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시즌 끝나고 주어지는 달콤한 휴식기간이다.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 개인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기본적인 것이다. 그런데 꼴찌를 했으니 “휴식을 하나도 안 주려고 한다.” 라고? 실적이 좋지 못한 회사원은 퇴근도 하지 말고 회사에서 굴러야 하나보다. 만약 한화 그룹의 ‘회장님’께서 저 말을 하셨더라면 여론은 어떨까? “재벌가가 드디어 미쳤네.” 소리가 나오겠지만 한화 이글스의 ‘감독님’께서는 저런 말을 하셔도 괜찮은가 보다.
“선수들도 지옥훈련을 통해 성적이 오르고 그러면 연봉이 오를테니 더 좋은 것 아닐까요?” 회사에서 개처럼 일해서 실적이 올라간다면 그만큼 연봉은 올려줄겁니다. 부러우면 하시면 됩니다.
공포의 외인구단
이현세씨의 만화인 ‘공포의 외인구단’은 좋은 작품이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대사가 가사로 쓰여진 노래도 만들어졌고 작품은 영화화되기도 했다. 만화에서는 영화 ‘실미도’를 연상시킬만큼 지옥훈련을 통해서 팀의 전력을 상승시킨다. 일본 스포츠 만화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클리셰다.
어린 시절 만화를 너무 많이 봤는지 사람들은 어느샌가 지옥훈련 = 전력을 상승시키는 좋은 방법 이라는 생각이 깊이 새겨진 듯 하다. 그러나 만화는 만화일 뿐이다. 야구 팬들은 2006년 WBC때 김병현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훈련양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이 오기 전부터, “김성근 감독의 지옥훈련만이 암흑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 분들은 야구를 보기보단 만화를 더 많이 보셨을 것 같다.
8888577, 6668587667등의 비밀번호로 유명한 롯데와 LG의 암흑기도 한화 못지 않았다. 그러나 그 팀들이 공포의 외인구단에나 나올법한 지옥훈련으로 암흑기를 탈출했던가?
왜 암흑기가 왔을까?
암흑기를 탈출하려면 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원인도 모르고 결과를 고칠 수는 없는 법이다. 지옥훈련을 하지 않아서 암흑기가 왔더라면 지금의 처방은 최고의 처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원인은 거기에 있지 않다.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뎁스’다. 선수층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해담 정수근’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야구엔 만약이 없다. 만약이란 걸 붙이면 다 우승하죠.” 라는 “야만없”으로 유명한 바로 그 명언이다.
시즌 개막 전, 만약이 붙은 희망이 가득해보이는 라인업과 로테이션이 일년 내내 유지되는 팀은 없다. 만약 새로운 외국인 투수들이 다 대박나고, 만약 터지지 않던 묵힌 유망주들이 터지고, 만약 A가 리바운딩하고, 만약 B가 부상이 없다면… 등등의 시나리오가 다 맞아떨어진다면 우승하지 못할 팀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저 시나리오들이 실제 다 맞아떨어진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확률은 극히 낮다. 긴 시즌을 치루는 동안 부진에 빠지는 선수가 있고, 부상으로 이탈하는 선수가 있으며, 급격한 노쇠화가 오거나 하는 선수들도 있다. 그런 변수들을 최소화 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선수층 즉 뎁스다.
뎁스를 쌓는 길 중 하나는 드래프트다. 그러나 한화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거의 매년 8개팀 중 가장 적은 신인을 지명했으며, 그나마도 그룹 재단인 천안북일고를 다녔다는 이유가 아니고서는 지명할 이유가 없는 선수들을 지명하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대로 하위권에 추락하고 나자 야구 인기가 올라가 신생팀들이 창단해 그나마 좋은 1차 지명급 신인들은 신생팀들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물론 드래프트만으로 뎁스를 만들 수 없다. 한화는 2012년까지 2군 전용 훈련장이 없던 ‘유일한 팀’이다. 선수층이 얇아지고, 좋은 선수가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자 이제 원인을 알았다. 원인은 지옥훈련이 아니었으니 이걸 고치면 된다.
성공해도 이런 방식은 안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최근 몇 개월간 얻어 먹은 술의 일정 부분을 한화팬에게 얻어먹었기에 오히려 한화를 저주하면 안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내년 시즌 한화가 부진했으면 좋겠다.
이런 방식으로 한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김성근식 성공법’ ‘이글스식 성공법’ 등이 판치면서 이미 야근, 주말근무가 당연한 나라에 정신나간 일들이 당연스럽게 받아지는 날이 오게 될 거란 걱정이 들기 때문이다. 거기에 직장에서 머리까지 빡빡 밀고 다니라고 한다면…
언젠가 당신이 다니는 회사의 보스가 바뀌더니 갑자기 휴가가 사라지고, 실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야근은 일상화되고 “실적이 그 모양이니 정신머리부터 고쳐잡자” 라면서 머리도 밀라고 해도 “아 그래 내가 그동안 너무 못했으니까 이런 취급은 당연한거야.” 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마음껏 흙에서 구르는 선수들을 보고 웃어도 좋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