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1981년 6월 5일 자 ‘질병 사망률 주간보고서(MMWR)’에서 “평소 건강하던 동성애자 청년 5명이 주폐포자충폐렴(PCP)에 걸려 2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원래 PCP는 항암치료 등으로 면역력이 약해진 환자들만 걸리는 병이었다. CDC는 젊은 청년들이 한꺼번에 이 병에 걸린 걸 의아하게 여겼다.
한 달 뒤에는 게이 26명이 한꺼번에 PCP에 걸린 사실을 확인했다. 후천성면역결핍증, 즉 에이즈가 이 세상에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언론에서는 이 병이 ‘사망률 100%’라며 ‘게이 흑사병’이라고 불렀다. 덩달아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도 커졌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에이즈에 대한 막연한 공포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미국프로농구(NBA) 스타 어빙 ‘매직’ 존슨은 1991년 에이즈 판정 이후에도 건강하게 살아 있다. 독일에 사는 미국인 티머시 레이 브라운은 스스로 “에이즈 완치 환자 1호”라고 주장하는 상태.
그러나 여전히 에이즈는 무섭다. 혹시 에이즈에 대한 우리 편견이 너무 깊게 뿌리 박혔기 때문은 아닐까? 에이즈에 대해 떠도는 대표적인 10가지 이야기의 진위를 가려보자.
1. 에이즈는 죽을병이다
아니다. 매직 존슨만 에이즈 생존자인 게 아니다. 이제 선진국에서 에이즈는 ‘만성 질환’ 수준이 됐다. 고혈압이나 당뇨병처럼 평생 관리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뒤따를 뿐이다. 스웨덴에서 실시한 장기 추적 연구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빼먹지 않고 약을 먹기만 하면 에이즈 바이러스(HIV) 보균자도 다른 사람만큼 오래 살 수 있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님 별명을 (걸리면 죽는다는 뜻으로) 에이즈라고 짓는 건 별로 적확한 표현이 아니다.
2. 에이즈 감염자와 뽀뽀하면 안 된다
에이즈 감염 경로 99%는 성관계다. 이는 에이즈가 정액, 질 분비액, 혈액, 모유 같은 체액을 통해서만 감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볍게 입을 맞춘다고 해서 에이즈가 옮는 건 아니다. 밥을 같이 먹는 것도 당연히 괜찮다. 수영장이나 목욕탕을 같이 써도 마찬가지. 모기가 에이즈를 옮긴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반면 오럴섹스로는 에이즈에 걸릴 수 있다. 딥 키스도 위험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2월부터 에이즈 감염자 격리 조치를 폐지했다. 함께 어울려 일상적인 활동을 해도 괜찮다는 뜻이다.
3. 에이즈는 문란한 성관계 때문이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여러 상대와 성관계를 맺다 보면 에이즈 감염자와 관계 맺을 확률도 올라가기 때문. 그러나 혼외정사로 에이즈에 걸린 남편에게 에이즈가 옮은 조신한 아내도 얼마든 있을 수 있다. 또 수혈이나 산모와 태아 간 수직감염으로 에이즈가 옮기도 한다. 에이즈가 곧 문란한 성생활의 결과는 절대 아니다. 그래도 낯선 이와 성관계를 맺을 때 콘돔은 의무다.
4. 에이즈는 동성애 병이다
지금은 에이즈를 AIDS라고 쓰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GRID(Gay-related immune deficiency)라고 쓰기도 했다. 발견 초기 에이즈 감염자가 모두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1년 6월 5일은 이 병을 처음 ‘발견한’ 날일 뿐이다. 1950년대 아프리카에서 이미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미국 동성애자들 사이에 이 병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건 그들의 성생활이 문란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동성 간에 성관계를 맺는다고 무조건 에이즈에 걸리는 건 아니다.
5.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붉은 반점이 나타난다
에이즈 바이러스 걸리면 3~6주 뒤에 독감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다. 열이 나고 목이 아프고 전신이 쑤신다. 구토와 설사가 찾아오는 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몸에 붉은 반점이나 두드러기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초기 증상을 경험하는 감염인은 약 50% 정도다. 이마저도 1~2주가 지나면 저절로 낫는다. 또 습진이나 알레르기 같은 질병도 얼마든 붉은 반점을 만든다. 겉모습으로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판별하는 건 불가능하다.
6. 에이즈에 걸리면 곧 알게 된다
에이즈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들어오면 보통 8~10년 동안 잠복기를 거친다. 초기 증상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이 기간 동안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자각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잠복기 동안 에이즈 바이러스는 서서히 증식을 계속한다. 그 뒤 우리 면역력을 마비시켜 폐렴처럼 치료가 손쉬운 질병도 이겨내지 못하게 만든다.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은 대부분 C형 간염 같은 전염병으로 죽는다.
7. 헌혈을 하면 에이즈 감염 여부를 알 수 있다
대한적십자사는 헌혈 전에 에이즈에 걸렸는지 검사한다. 에이즈에 감염된 피를 수혈하지 않으려는 예방 조치일 뿐이다. 따라서 헌혈자 본인에게 에이즈 검사 결과를 알려주지 않는다(1997년 3월까지는 알려줬다). 에이즈 검사를 받으려면 ‘헌혈의 집’ 대신 보건소, 대한에이즈예방협회, 한국에이즈퇴치연맹 등을 찾으면 된다. 무료로, 또 익명으로 검사를 받을 수 있다.
8. 에이즈에 걸린 여성이 낳은 아이는 에이즈에 걸려 태어난다
예전엔 그런 줄 알았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었다. 1990년 두 사람 모두 에이즈 판정을 부부는 1993년 1월 딸을 낳았다. 두 사람은 주변 우려에도 딸 아이의 에이즈 검사를 거부했다. 2003년 8월 이 딸은 에이즈에 걸린 것으로 최종 확인됐다. 아프리카 어린이들도 부모한테 에이즈를 물려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출산 시 적절한 예방 조치를 한다면 건강한 아이를 얻을 수 있다. 남성 에이즈 환자를 위한 ‘정자 세탁’ 과정도 개발된 상태다.
9. 에이즈는 침팬지 수간(獸姦) 때문에 생겨났다
과학자 대부분은 유인원 면역결핍 바이러스(SUV)가 인간에게 감염되면서 에이즈 바이러스가 생겨났다고 보고 있다. SUV는 침팬지가 여러 원숭이 종류를 마구 잡아먹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 뒤 사람들이 침팬지 고기를 먹거나 침팬지 피를 마시거나 몸에 바르는 과정에서 사람한테 옮았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 에이즈 감염자가 많은 건 이 때문이다. 침팬지 수간설 역시 동성애자와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편견에서 나온 괴담일 뿐이다.
10. 에이즈는 꾸며낸 말이다
흑인을 말살시키려 백인이 에이즈를 만들어냈다는 음모론은 여전히 지지자가 많다. 일부에서는 다국적 제약 회사들이 없는 약을 팔려고 없는 병을 꾸며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의견을 드러내는 이들은 그럴듯해 보이는 증거 자료까지 마련해 두었다. 그러나 15초마다 1명씩, 2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잔인해져야 했을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전 세계에서 에이즈 퇴치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이유는? 에이즈가 없다는 주장은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는 3,400만 명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덧
편집자 주: 에이즈에 대한@yari0403 님의 일화를 덧붙입니다.
뉴스 보는데 에이즈에 대한 애기가 나와서… 나 학생 때 우리 학교 성교육이 정말 적극적이었는데 한 번 에이스에 대한 강연을 온 적이 있었다. 그때 강사님이 “에이즈에 대한 생각”을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많은 애들이 ‘더럽다’ ‘죽어라’ ‘동성애자다’ 등의 반응이었다.
그 말을 가만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시던 강사님이 웃으시더니 “그렇죠, 많은 분이 그렇게 대답하십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에이즈 환자입니다.”라고 했다. 그 순간 학생들의 그 엄청난 정적은 잊을 수가 없다.
출처: Kini’n Cre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