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외국을 동경하는 사람들, 이상향의 이식이란 가능한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
앞선 글 ‘외국을 동경하는 사람들, 이상향의 이식이란 가능한가’에서도 말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레짐으로 어떻게 가느냐, 우리는 무엇을 지향해야하는가의 문제인 것 같다. 오늘 우리가 얼마나 시궁창같고 얼마나 살기 힘든지, 그것이 누구 탓인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닐 뿐더러 전체적인 방향을 정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해가 된다고 본다. 나름의 진정성, 나름의 고민을 갖고서 전체 시스템을 생각하는 “다른 정치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을 적으로 돌리고, 결국 전 국가/전 사회적인 레짐을 만들기 위한 공감대 형성 가능성을 저해할 것이다.
예컨대 무상급식을 한다거나 혹은 트리클 다운을 위해 부자감세를 한다는 것은 전체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체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경험의 공유”를 위한 정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거기에 동의하는지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하며 그것이 일정한 방향을 갖고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각 개인들이 그 방향성에 대해 정치적인 입장 차이가 있고 그래서 반론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인터넷을 뒤덮었던 지난 “10년”의 그 많은 비판글들이 얼마나 그런 책임을 갖고 쓰여졌었을지는 의문이다.
‘한국은 나쁜 나라’라는 인식이 낳는 허수아비
원래 첫 글 ‘한국이 그렇게 나쁜 나라인가’는 인터넷에 만연한 이야기들, “외국에서 얼마나 한국 선거를 비웃는 줄 아느냐, 한국은 이제 큰일났다”같은 류의 이야기에 대한 나름의 답으로 쓴 것이다. 장편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고 그 하나로 끝낼 글이었다. 그 글이 “나름의 답”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그런 “한국 끝장” 내지는 “기성세대 즐” 류의 이야기들이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글을 쓴 뒤에 많은 이들은 재미있는 반응을 보였다. 마치 내가 한국은 이제 완성형이고 더이상 개선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왜 이럴까?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어떤 정서 – 한국은 진짜 막장이라는 것, 혹은 한국의 좋은 부분을 공감하는 순간 개선은 끝이라는 것같은 생각이 공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거기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그보다 나는 너무 쉽게 우리가 어떤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거나, 없애야 한다는 류의 움직임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무상급식이나 무상보육처럼 거대한 이슈들은 붙어있는 사람도 많고 고민하는 사람도 많다보니 여러 모로 검토가 되고, 그로 인한 공과가 상당 부분 미리 예상이 된다. 그러나 특정 유형의 기업 행태(예컨대 기업상생)에 대한 조세감면이라거나 혹은 지나치게 정치적인 이슈들(모병제 전환)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 정책에 대해서도 쉽게 말하는 의견들, 다른 효과들에 대해서 고민없이 굉장히 강력한 의견을 내는 행위들이 쌓여서 결국 불신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견들이 받아들여지거나 혹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자기들끼리만 해먹는 기득권 놈들”에 대한 신화가 생기고 결국 존재하지 않는 어떤 강고한 집단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일본의 이야기기는 한데, 한 케이레츠의 자문역(한국어로 번역하면, 재벌기업의 명예회장이라고 보면 된다)이 90년대 중반에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성실한 애국적이고 호혜적인 시민들을 착취하고 갈취하여 자기들이 전용함으로써 사회 발전 동력을 없애버리려는 기득권층이 있다.” 내 생각에 한국의 재벌들에게 물어봐도 비슷한 답을 내줄 것 같다. 이런 “자기들끼리만 해먹는 기득권 놈들이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는 생각은 거의 전방위적으로 공유되는 것 같다. 고위관료들, 재벌들, 우파 정치가들, 좌파 정치가들, 시민단체 지도자들, 이익단체 지도자들, 시민들, 단체원들, 기업인들, 하위 관료들, 은행가들, 범죄자들, 소상공인들 모두가 서로 같은 생각을 주어와 목적어만 바꿔서 공유하고 있을 것 같다.
이런 공감이 확산되는 것 자체는 시대적인 현상같은데, 그렇다고 방치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불신은 마약과 같아서 한번 차고 들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무슨 전통적 민족주의 국가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근데 맞는 거 같긴 하다) 불신과 갈등은 의외로 쉽게 사람들 사이를 나누고 극심한 갈등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극심한 갈등은 무슨 정치적 논쟁이나 비꼬기, 욕하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살해, 내전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신뢰의 상실은 극단적인 갈등을 낳는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이 언제부터 연원했는지를 보는 시각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최소한 일제시대에는 그런 흔적이 없거나 거의 없음이 자명하다고 알고 있다. 정말로 이런 지역감정은 1960년대 이후의 권위주의적 정권 때 처음 조장된 것일 수도 있다. 르완다의 후투족, 투치족 갈등도 18, 19세기 까지는 흔적도 없던 것이고 서로를 다른 종족으로 인지하지도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서로를 다른 종족으로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사는 지역을 기준으로 식민통치를 하는 과정에서 나누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20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서로를 살육할 정도로 사이가 벌어졌다. 학설에 따라서는 미국 동부의 남주와 북주가 독립전쟁기부터 이미 사이가 안좋았다고 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거주하는 지역은 이민 초기에는 그렇게 본질적으로 다른 것도 아니었고 모두 동질적이던 사람들이 경제적 환경과 주라는 경계선으로 나뉘니 서로 다른 생각을 하여 전쟁에까지 치달은 것이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현격히 다른 정치적 관점을 갖고 있다.
모두 다 떠나서 그런 형태의 동질적 인구 집단이 지리적, 정치적 관점 때문에 내전까지 불사한 케이스는 멀리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다.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의 서남전쟁, 중국 2차대전 전후의 국공내전, 그리고 한국의 6.25도 그런 케이스다. 6.25는 여러가지 외적 요소가 개입되었다 치더라도, 서남전쟁 정도 되면 정말로 그냥 정치적 갈등으로 야기되어서 수만명이 동원되어서 치고받고 점령전을 감행한 케이스다. 다행히 한국은 군과 치안을 정부가 독점하고 있고, 여기에 비견할만한 무력을 특정 집단이 보유하는 걸 상상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며, 군과 치안에 대한 정부의 독점력(즉, 군과 경찰 내부의 사병화를 막는 힘)도 확고한 상태이니 그런 정도까지 치닫기는 어렵지 싶다. 그러나, 군과 치안에 대한 정부의 독점력을 일부러 약화시키자는 주장도 있는 상황이고 보면 꼭 안심할 일은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나는 신뢰 문제가 정말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불필요한 오해를 조장하는 류의 선언들을 조금 막고 싶고, 아니면 그런 선언류의 주장에 대해 내가 아는 범위에서 그것이 오해이며 그런 식의 효과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 풀고 싶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 그러나 나 하나는 작은 힘이고, 게다가 내가 글도 잘 못쓰는 사람이고 보니 문제를 풀기는 커녕 꼬이게만 만드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한 증거가 지난 첫 글에 달린 댓글들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