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하기 쉬운 음식=가난한 사람이 먹는 음식=나쁜 음식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의 구분선은 시대과 지역에 따라 많이 다르지만, 기준은 대체로 동일하다.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열량을 제공하는 음식(즉 구하기 쉬운 음식)은 대체로 나쁜 음식이었다. 그리고 비용이 높고 구하기 어려운 음식이 좋은 음식의 자리를 차지해왔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당 시대에 미인 또는 건강체라고 부르는 체형을 유지할 수 있고, 나쁜 음식을 먹으면 주변에서 못나거나 건강하지 못해 보인다는 체형을 가지게 된다. 이걸 조금 과장하면 나쁜 음식은 가난한 사람이 먹는 음식이고 좋은 음식은 부자가 먹는 음식이다.
개인의 취향도 있기 마련이라서 부자 중에도 나쁜 음식만 먹는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 중에도 애써서 좋은 음식을 먹는 사람도 있으니까, 과도한 일반화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2. 가격이 내려가면 ‘나쁜 음식’이 된다
현대 서양 사회에서 가장 해악으로 꼽히는 ‘동물성 지방’이 과거 한때는 구하기 어렵고 잔치에 빠져서는 안 되는 ‘좋은 음식’의 대명사였다. 일단 동물성 지방이 흔하지 않았다. 곡식(옥수수)으로 키우지 않은 소, 특히 농사일하는 소는 지금처럼 근지방이 많지 않았다.
아래는 타임라이프에서 1970년대에 출간한 요리책에 실린 레시피다. 값싼 쇠고기 덩어리에 지방의 풍미를 더하기 위해 돼지비계를 찔러넣는 조리법을 소개한다. 요즘 같으면 질겁할 레시피다. 과거 미국에서는 동물성 지방이 최소한 지금만큼 나쁜 음식으로 꼽히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이렇게 인기 있던 고기(지방)가 언젠가부터 나쁜 음식이 되었다. 이유가 뭘까. 고기 자체의 질이 내려가는 한편 고기의 값이 싸졌다. 얼마나 싸졌냐면 가난한 음식의 대명사인 햄버거에 듬뿍 넣어서 아무리 가난해도 섭취할 만큼, 감자를 튀길 때 사용할 만큼, 슈퍼마켓에서 제일 싼 가공육 제품을 구입해도 얼마든지 섭취할 만큼 싸졌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동물성 지방 소비량이 많아졌다. 1920년 미국에서 평범한 사람이 별 생각 없이 음식을 먹을 때 소비되었을 쇠기름은 지금의 1/10 이 안 되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3. 야채와 과일, 서양 전통에서는 ‘나쁜 음식’
한편 생야채와 생과일은 좋은 음식이니 많이 먹으라는 말을 많이 듣지만 이것들은 서양 전통사회에서는 대표적인 나쁜 음식으로 손꼽혔다. 과일과 야채는 칼로리 총량이 부족한 전통사회에서 좋은 음식이 되기 어려웠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칼로리가 낮기 때문이다. 시금털털한 걸 참고 먹어봐야 뱃속에서 체류 시간도 길고 몸에 열량도 많이 제공하지 않는다.
감자와 같은 곡류의 탄수화물, 고기와 같은 단백질/지방이 내는 열량과 비교하면 거의 영양분이 없다시피 하다. 부피가 커서 허기를 달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니 허기를 달래야 하는 사람들이나 먹는 음식이었다. 야채나 과일이 지금과 맛이 다르기도 했을 것이다. 품종개량이 이루어지기 전의 야채는 지금보다 쓰고 억세며 과일 또한 지금보다 훨씬 시고 시금털털했을 것이다.
고대 로마의 의사인 갈레노스라는 사람은 AD 2세기에 과일은 가급적 먹지 마라, 두통, 식도장애, 소화장애, 발열, 심하면 이승탈출 119까지 호출하게 될 수 있다며 과일 섭취를 경계했다. 과일은 소화제로 좋으니 약으로 먹되 약효를 낸 후에 토해내라는 언급도 있었다. 중세까지 이와 유사한 지적이 이어졌다. 귀족은 ‘과일이나 야채는 거친 일을 하는 농부 및 하층민의 소처럼 튼튼한 위장만이 견뎌낼 수 있는 음식이며, 귀족의 섬세하고 연약한 위장이 견딜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흔히 ‘하루 사과 하나면 의사가 필요 없다’는 말은 얼핏 들으면 수백 년 된 격언처럼 들리지만, 이 문구가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19세기 중후반 웨일스 지방이었다고 한다. 처음의 문구는 ‘침대에 드는 길에 사과를 먹으면 의사에게서 빵을 빼앗을 수 있다’는 정도였다. 아침 사과는 금이고 점심 사과는 은이고 저녁 사과는 쇠인지 뭔지 하는 요즘의 격언과 완전히 대치된다. 하루 사과 하나면 의사가 필요 없다는 말은 20세기 초반에 유행했다.
현대에는 좋은 음식의 개념이 살짝 바뀌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먹는 음식의 열량이 높아지면서 열량이 적은 한편 부피가 커서 포만감이 드는 음식이 좋은 음식으로 주목받는다. 야채와 과일 말이다. 이건 사실 인류의 역사에서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먹을 것이 풍족한 나머지 소화가 잘 안 되고 영양가가 없는 음식이 좋은 음식으로 손꼽히다니.
4. 건강 음식에서 ‘나쁜 음식’이 되어버린 쌀밥
동양 및 한국 사회에서는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의 구분이 이렇게 서양 사회처럼 선명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고기는 예전에 귀한 음식이었고 나물은 보잘것없는 음식이었지만 서양 사회처럼 고기가 몸에 좋다든지 나물이 몸에 나쁘다는 개념으로까지 자리를 잡았던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건강에 좋고 나쁘다가 아닌, 귀하다는 관점에서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은 선이 분명하다. 좋았던 음식의 대명사는 이밥에 고깃국이다. 고기가 한때 좋은 음식이었다가 차츰 나쁜 음식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은 위에서 설명한 미국과 대략 비슷한 양상이라서 더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쌀밥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것이 조금 있다. 그것은 한 국가의 비전이 될 정도로, 체제의 우수성을 반증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음식이었다. 불과 20-30년 전, 밥이 아니면 먹은 것이 아니었다. 국수나 밀가루 등의 곡류는 ‘때우는 것’이지 제대로 끼니를 먹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아버지들은 밖에서 술을 먹고 오더라도 집에 와서는 ‘진지’를 따로 드셨다. 밥을 먹는 것은 그냥 칼로리를 공급하는 이상의 의미 부여가 있었다. 종교적 의미라고 하면 너무 과장하는 것 같지만 하수도로 흘러 들어가는 쌀을 한 톨 한 톨 정성스럽게 주워서 다시 씻어 잡수시는 옛날의 할머니들을 떠올려보면 종교적 의미가 그렇게 과장된 표현도 아니다.
그토록 모두가 쌀에 집착했고, 그래서 쌀이 귀했다. 쌀의 소비를 줄이기 위해 당시 정부는 갖가지 정책을 내걸었다. 쌀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시켰고, 혼분식을 장려했고, 장려하다 못해 법으로 강제했고, 밥 소비량을 줄이기 위해 식당의 밥공기 크기를 줄이는 등. 그랬던 것이 불과 30-40년 전이다.
쌀밥이 지금은 천덕꾸러기다. 쌀 소비량은 해마다 급락, 급락을 거듭해서 지금은 연간 육십몇 킬로그램인데, 이것은 최고점 대비 절반에 불과하다. 갖가지 험난한 직업을 다 경험한 이야기를 엮은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묘사하는 가난한 음식들은 이런 것이다.
- 고시원 식권 50장에 15만 원짜리 식당은 밥, 배추김치, 김, 깍두기, 콩 조림 같은 것
- 돼지사육장 인부들의 식사는 밥, 국, 김치가 전부. 그나마 국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손톱만 한 누룽지가 대여섯 개 떠다니는 숭늉
그러니까 최하층민의 식사로 묘사되는 것이 밥과 김치다. 가끔 인간시대 등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조손가정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것을 비춰주는데 이때 그들의 식사 풍경이 냉장고에서 꺼낸 김치와 밥이다. 여기에다 김이나 계란이 올라가면 아이들이 좋아하고는 한다.
건강식을 주장하거나 몸매를 관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탄수화물 섭취가 죄악시되어가고 있다. 주부 및 중장년층들의 건강식 유행과 달리 탄수화물 섭취 제한에 대한 주장은 젊은 고학력자들 사이에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추세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칼로리 섭취 비율 중 탄수화물 비율이 너무 높아서 문제가 되며 단백질 함량을 더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과거 한때의 절반 정도인데 말이다. 이제 쌀밥은 ‘나쁜 음식’이 되었다.
원문: 찬별은 초식동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