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걸그룹 EXID의 노래 “위아래”가 차트역주행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차트역주행이라 함은 앨범/싱글 발매 직후 어느 정도 인기를 얻었다가 차트 바깥으로 사라졌던 노래가 갑작스럽게 재조명 받으며 차트에 재등장, 상승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대표적으로는 2012년 발매 하여 전국을 강타했다가 시간이 지난 후 자연스럽게 차트 바깥으로 사라졌던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이 2013년 봄에 갑자기 다시 차트에 등장하여 높은 순위를 차지했던 경우가 있다.
EXID의 “위아래”는 지난 2014년 8월 말 발매된 싱글이다. EXID는 2012년 결성한 그룹이지만 멤버의 절반이 교체되는 등의 변화를 겪으며 (정확히는 결성 당시 6명이었으나 3명이 탈퇴하고 2명이 들어옴)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이후 새로운 앨범/싱글을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거의 2년 만에 싱글 “위아래”를 발매하며 활동을 재개했는데, 이 싱글 역시 음원차트에서 하위권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면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필자는 페북에서 EXID의 소속사인 소니뮤직과 친구를 맺고 있어서 이 친구들 소식을 엄청 듣긴 했다;;;).
그런데 이 노래가 11월이 되자 갑자기 차트 역주행을 시작했다. 광고나 드라마/영화 등에 삽입되서 뒤늦게 이름을 알린 덕택에? 아니다. 이 노래가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두 개의 영상 덕분이었다.
2.
먼저, EXID의 멤버 “하니”의 직캠 영상. 직캠은 말 그대로 ‘팬들이 행사/공연 무대 등을 직접 찍은 영상’을 말하는데, 많은 수의 직캠이 보통 그룹 전체가 아닌 한 명의 멤버만을 중심으로 촬영되곤 한다. 이 행사에서 EXID는 방송 활동을 위해 수정했던 안무들을 ‘무삭제판’으로 공개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프리카의 BJ로 남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류지혜가 이 노래를 틀어 놓고 춘 섹시댄스 영상이다. 기본적으로 위 영상, 즉 EXID의 원래 안무(무삭제판 안무)를 따라한 춤이다.
이 영상들은 ‘남초사이트’, 즉 대부분의 유저가 남성으로 구성되는 사이트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다. 당연히 그 이유는 ‘야한 춤’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이 영상들이 남성 유저들의 ‘눈요깃거리’로 끝나지 않고 차트 역주행으로 이어진 것은 참 신기하다. 차트에서 사라졌던 노래가 20위권으로 들어오더니, 11월 22일 열린 EXID의 ‘차트역주행 기념(?) 게릴라 콘서트’가 열린 이후 11월 23일 “위아래”는 대표적인 음원사이트 멜론의 Top 10 진입에 성공했다.
3.
이 현상은 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몇 개 안겨주는데
– 방송사나 기획사/ 등의 홍보 목적이 아닌 팬이 올린 유튜브 직캠 영상, 그리고 (아무리 인기 BJ라고 하더라도) 일개 개인의 인터넷 방송 영상이 음원 순위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인터넷 영상의 힘이 생각보다 굉장히 크다는 것.
– 게다가 야한 춤을 추는 영상에만 관심있을 것 같은 개별적인 남성들의 구매력이 발휘되었다는 것. 보통 여성들에 비해 남성들은 ‘화력’이 약한 편으로 여겨지며, EXID 같은 소위 ‘군소 아이돌’의 경우는 ‘화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규모의 팬덤 자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위아래”의 차트 역주행은 팬덤의 조직적인 행동 덕분이 아니라고 가정할 수 있다. 이것은 멜론에서 “위아래”를 구매한 사람들의 성별과 연령 등의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어야 확실히 증명되겠지만…
– 그리고 ‘노래가 좋은 것 만으로는 뜰 수는 없지만, 어쨌든 뜨려면 일단 노래가 좋아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사례가 아닌가 한다.
사실 이 차트역주행은 소위 ‘얻어 걸린’ 셈인데, 어떻게 보면 싸이의 ‘강제 해외진출’보다도 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다(물론 그 히트와 화제성의 규모는 게임이 안되지만). 적어도 싸이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는 어쨌든 간에 ‘홍보의 목적’으로 기획사가 제작하고 유튜브에 공개한 것이다. 그런데 ‘직캠’이나 ‘BJ댄스’는 “위아래”의 홍보를 위해 제작/유포된 영상이 아니다. EXID의 경우 데뷔 초반부터 ‘노래는 참 좋은데, 뜨질 못하네…’라는 이야기를 계속 들었던 그룹이고 이번 “위아래” 역시 마찬가지 였다. 그런데 소니뮤직도 하지 못한 일을 조악한 화질의 직캠. 그리고 야한 춤과 노출로 승부하는 BJ가 해낸 것이다.
그래도 매일 다양하게 유포되는 각종 직캠과 BJ들의 댄스 속에서 유독 “위아래”가 차트역주행을 이뤄낸 것은 노래’도’ 좋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섹시컨셉도 좋고 야한 뮤비도 좋고 다 좋은데, 아무리 그래도 노래가 안 좋으면 못 뜬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개인적인 규모의 영상물’에 음원 차트가 요동을 칠만큼 우리나라 음원 시장의 폭이 깊지 못하다(혹은 조금 왜곡되어 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중들의 취향과 트렌드가 빨리 반영되는 것도 좋지만, 정도가 조금 심한 것 아닌가 싶다.
4.
그런데 EXID가 나름 ‘역대급’ 차트역주행을 이뤄낸 11월 23일, 또 하나의 “역주행” 사례가 나왔다. 사실 주행을 한 적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엄밀히 말하면 이 사례는 역주행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주인공은 바로 최근 새로운 시즌을 시작한 SBS의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 [K-Pop Star]에 등장한 이진아. 그녀가 11월 23일 방송분에서 부른 “시간아 천천히”가 방송 즉시 화제가 되었고, 그 결과 해당 음원이 다양한 음원사이트 순위 최상위권에 랭크되었다.
사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나온 노래가 방송 직후 음원차트 상위권에 오르는 일은 비교적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진아가 특별한 것은 다른 참가자들과는 달리 그녀는 이미 정규 앨범을 발매한 뮤지션이라는 것, 그리고 화제가 된 “시간아 천천히”는 이 데뷔작에 실린 곡이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칠리 뮤직Chili Music’이라는, 인디 뮤직 쪽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이름값 있는 레이블을 통해 싱글도 아닌 ‘정규 앨범’을 낸 적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차트에서 ‘정주행’ 조차 하지 못했던(어제 방송에는 ‘이 앨범이 50장도 안 팔렸다’는 이야기도 나왔다고 한다) 그녀는 ‘지상파 방송’ 한번 타면서 곧바로 음원판매 순위 1위에 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필자도 이진아의 음반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앨범까지 낸 뮤지션이 케이팝 스타 같은 아마추어를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와도 되느냐?’, 혹은 ‘인디 뮤지션이 자신의 인디 경력을 아마추어 취급해버리고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와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아니니 일단 넘어가자 (사실 이 주제들만 제대로 이야기해도 글 하나 짜리다).
그보다도, 이것은 ‘직캠'(유튜브)이나 ‘개인방송’처럼 ‘대안alternative’로 여겨지는, 혹은 현재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미디어라고 여겨지는 것과’지상파 텔레비전 방송’이라고 하는 기존의 힘있는 미디어 간의 영향력의 크기를 간접적으로나마 가늠해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혹자는 ‘EXID는 그렇게 여기저기 나와봐도 안되다가 직캠이나 아프리카 개인BJ 같은 인터넷 미디어의 힘을 빌려서 겨우 알려졌는데, 이진아는 방송 몇 분 나와서 단번에 1위를 찍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인터넷이다 뭐다 떠들어봐야 텔레비전만한 것이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오히려 반대다. SBS의 [케이팝 스타] 정도 되면 해당 방송국의 ‘간판급’ 예능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직캠’과 ‘아프리카 개인방송’이 지상파의 간판급 예능 프로그램이나 해내는 일을 (조금은 작은 규모지만) 해낸 것이다. 재미있는 일이다.
5.
사실 이진아의 사례는 그렇게까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이미 ‘탑밴드’나 ‘슈퍼스타K’ 등에서 비슷한 경우가 있었음). 하지만 EXID의 경우는 재미있는 성공 사례를 보여주었으니 이제 직캠이나 BJ의 섹시 댄스도 하나의 홍보 루트로 이용될 것은 자명하다. 음반사/기획사 등에서 어느 정도 홍보비를 지원해주고 자신들의 음악을 가지고 섹시 댄스를 춰달라고 한다던지, 좀 더 좋은 화질의 직캠이 ‘팬’이 아닌 소속사쪽에서 제작된다던지 하는 방법 말이다.
직캠이나 아프리카 방송(및 별풍선 등)에 대해 어느 정도 선행연구가 있을 것 같긴 한데(사실 아직 찾아보지 않았다), 좀 더 학술적인 측면을 보완하고 다른 연구들을 읽어본 후 글을 하나 쓰고 싶어진다.
원문: 델리키트의 음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