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겪을 수 있는 경험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이다. 신비는 예술과 과학의 근본을 이루는 진정한 모태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확실한 길만을 추구하는 과학자는 결코 우주를 맑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미치오 카쿠의 <평행우주>에서 재인용.)
좋은 영화에 대한 반응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좋은 영화는 획일적인 반응을 유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는 논쟁을 유발한다. 논쟁은 더 많은 사람의 관심을 추수한다. 논쟁과 함께 영화는 자연스럽게 흥행가도를 달리게 된다. <인터스텔라>(원제 : Interstellar. 크리스토퍼 놀란 연출, 매튜 맥커너히`앤 해서웨이 주연, 2014년 개봉)가 그의 전형이다.
<인터스텔라>는 과학계, 그들만의 관심사였던 평행우주이론을 단박에 일상의 화제로 둔갑시켰으며, 그 외 다양한 과학계의 이슈들을 지상으로 내려앉혔다. <인터스텔라>를 통해 관심을 환기한 과학적 주제들은 이런 것들이다. 가설에 머물던 평행우주이론은 과연 정설로 굳어질 것인가. 인간은 과연 차원이 다른 우주공간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지구는 소멸될 것이며 인류는 종말을 맞게 될 것인가.
SF영화의 기본 공식은 ‘디스토피아’다. <인터스텔라> 역시 SF문법을 따른다. 그러나 거기 머물지 않는다. 그랬다면 이리 큰 화제가 될 리 없다. 영화적 상상은 가차 없이 절망 혹은 종말 너머로 유영한다. 결국 <인터스텔라>는 희망을 얘기하는 영화이며, 희망의 씨앗은 ‘사랑’이다. 현실과학계에서는 불가능의 영역에 머물고 있던 다차원 우주로의 여행을 영화적 상상력은 간단없이 깨부순다. 거기에 탁월한 영상미와 휴머니즘이 더해져 감동을 선사한다. 걸작의 탄생이다.
SF영화는 ‘디스토피아’, 그것을 넘어선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관심사는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갈린다. 어떤 이는 평행우주이론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며, 또 다른 어떤 이는 새삼 빅뱅이론과 그것을 넘어서는 인플레이션이론에 대한 회의와 확신 사이에서 갈등하게 될 것이다. 아무려나 한 영화에서 이리 다양한 관심사를 수용한 것만으로도 <인터스텔라>는 성공적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과연 영화의 스토리와 장면들은 어느 정도가 사실이고, 또 어떤 것이 상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걸까. 그 점과 관련해서도 –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지만 – 무수한 반론과 불만, 지적이 쏟아진다. 여기선 그중 영화의 중심 테마인 평행우주이론과 생명의 본질을 좇는 것에 머물고자 한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일이다. 책장에 꽂혀 있던 먼지 묻은 책들을 끄집어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책을 수없이 뒤적이고서야 겨우 가닥을 잡아낼 수 있는 일이다.
우선, 우주론(cosmology)의 역사를 살펴 볼 일이다. <평행우주Parallel Worlds>(미치오 카쿠 저, 김영사, 2006)의 서문에 친절한 설명이 들어있다.
우주론은, 말 그대로 우주의 탄생과 진화과정,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운명 등 우주의 전반적인 특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우주론의 첫 번째 혁명은 갈릴레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전의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등 위대한 천문학자들이 남긴 자료에 자신이 직접 만든 천체망원경의 관측 결과를 대입해 마침내 경이로움의 대상이기만 했던 우주를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전환시켰다. 뉴턴은 한발 더 나아가 “모든 천체들은 계산 가능하며 재현 가능한 힘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에 이른다. 이른바 기계적 물리법칙의 출현이다.
우주론의 제2혁명을 이끈, ‘에드윈 허블’과 ‘아인슈타인’
우주론의 제2혁명은 에드윈 허블에 의해 이루어졌다. 반사직경이 100인치나 되는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한 끝에 허블은 모든 은하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서로 멀어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우주가 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역사 깊은 가설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제2혁명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으로부터 더욱 심화되었고, 그로부터 빅뱅이론이 자연스럽게 대두되었다. 빅뱅이론은 조지 가모브(George Gamow)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확고한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거기에 원소의 기원에 관한 프레드 호일(Fred Hoyle)의 연구결과가 더해지면서, 베일에 싸여 있던 우주의 진화과정은 서서히 그 비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주론의 제3혁명은 2000년대 들어 시작되어 지금도 한창 진행 중이다. 제3혁명은 다양한 관측기구의 발달로부터 촉진되었다. 신형 위성과 레이저, 중력파감지기, X-선 망원경, 고성능 슈퍼컴퓨터 등의 최신장비들이 개발되면서 우주론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현대의 천문학자들은 우주가 점점 빠르게 팽창하면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만일 팽창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면, 결국 우주전체가 암흑과 냉기로 가득 차서 모든 생명체가 사라져버리는 ‘거대한 동결(big freeze)’의 시점에 이르게 된다.
<인터스텔라>는 ‘거대한 동결’의 전조로부터 출발한다. 기상의 이변과 악화가 반복되면서 인류는 식량난에 시달리게 된다. 그때 하필이면 전직 우주비행사 쿠퍼(매튜 맥커너히 분)의 집안에 우주로부터 이상한 신호가 답지한다. 쿠퍼와 그의 딸 머피는 자연스럽게 NASA본부로 들어가게 되고, NASA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쿠퍼에게 종말을 맞게 될 지구를 대체할 행성을 찾는 연구프로젝트에 참여시킨다.
지하벙커로 숨어든 NASA는 평행우주이론을 수용, 지구를 대체할 행성을 찾는다. 지구 멸망 후의 대안은 두 가지, 플랜A와 플랜B다. 플랜A는 생존 중인 인간을 우주공간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것이다. 플랜B는 인간을 이주시킬 수 없다면 인간의 씨앗, 즉 수정된 인간의 씨앗을 새로운 우주공간에서 배양해서 인류의 생존을 이어가자는 계획이다. 궁여지책이지만 만약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인류가 웜홀과 블랙홀을 통과할 우주과학을 실현한다면 플랜B는 꽤 현실성 있는 대안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건 생명의 본질적 의미이다. 인간은 왜 생명을 연장하려 할까? 자신이 죽으면 그만일 텐데, 도대체 왜 인간은 자신이 죽은 뒤에도 인류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걸까?
슈뢰딩거, 생명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다!
생명과 관련한 과학계의 관심을 집적한 최초의 책은 에르빈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한울, 2014)이다. 그러나 슈뢰딩거의 책은 생명의 의미를 과학적으로 규명해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 대신 생명에 대한 과학적`철학적 성찰을 유도한다. 질문을 던지면서다. 유전자는 왜 변하지 않는가? 유전자는 어떻게 복제될 수 있는가? 생명체는 어떻게 그 자체가 붕괴되려는 경향에 맞서는가?
슈뢰딩거의 질문에 대한 화답은 반세기 후에 나온다. 1993년 세계적인 석학들이 모여 슈뢰딩거의 주장은 과연 옳았는가에 대해 논쟁을 벌인 뒤 그 논의의 결과물을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 후 50년>(마이클 머피 저, 지호, 2003)이라는 책으로 펴낸 것이다.
생명의 본질을 설명하는 보다 대중적인 책이 후쿠오카 신이치의 <생물과 무생물 사이>(은행나무, 2008)이다. 생명이란 본디 자기 복제의 의지를 갖는다. 그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호흡을 하는 유기체라든지, 현실적인 목적을 추구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존재이유에 불과하다. 생명이냐 무생물이냐는 자기복제의 열망을 갖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구분될 뿐이다. 후쿠오카 신이치는 그걸 단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한다.
“생명이란 자기를 복제하는 시스템이다.”
또한 생명이란, 끝없는 세포분열과 신진대사 등 자기복제와 활동(브라운 운동)을 통해 활력과 에너지를 생산하여 마침내 최대의 엔트로피에 다다라 죽게 될 운명이지만, 다행이 체내의 조직적 상호작용을 통해 ‘동적 평형’을 유지하며 생명활동을 이어간다.
“생명이라는 이름의 동적인 평형은 그 스스로 매 순간순간 위태로울 정도로 균형을 맞추면서 시간 축을 일방통행하고 있다. 이것이 동적인 평형의 위업이다. 이는 절대로 역주행이 불가능하며, 동시에 어느 순간이든 이미 완성된 시스템이다. (중략) 자연의 흐름 앞에 무릎 꿇는 것 외에, 그리고 생명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생물과 무생물 사이> 246~247쪽)
후쿠오카 신이치, 슈뢰딩거에 답하다!
<생물과 무생물 사이>는 슈뢰딩거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던진 질문에 답한다. 그 답변은 다시 영화 <인터스텔라>를 통해 확인된다. 평행우주이론의 구현을 위해 거대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NASA의 책임자 브랜드 박사가 마련한 지구 멸망 후의 대안인 플랜A와 플랜B, 그중에서 보다 현실적이며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보는 플랜B가 바로 생명의 본질, 즉 자기를 복제하는 시스템을 구현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닌 것이다.
<평행우주Parallel Worlds>(미치오 카쿠 저, 김영사, 2006)가 우주론의 역사와 현재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고 있다면 같은 저자의 또 다른 저서 <미래의 물리학>(김영사, 2012)은 우주과학의 미래를 소개한다.
미치오 카쿠, <평행우주>와 <미래의 물리학>
우주과학의 주된 관심은 외계행성에 대한 연구이며, 그것은 종내 인류의 생존조건을 충족할 행성을 발견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미래의 물리학>은 외계행성 연구를 각각 ‘가까운 미래(현재~2030)’와 ‘조금 먼 미래(2030~2070)’, 그리고 ‘아주 먼 미래(2070~2100)’로 설정한 뒤 각기의 주요 연구과제들을 소개한다.
우선, 가까운 미래(2030~2070)의 연구과제로는 태양계 내의 천체이며,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Europa)에 대한 연구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천문학자들은 태양계의 생명체가 ‘골디락존(Goldilocks Zone,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모든 환경이 생명체의 생존에 알맞게 조성되어 있는 지역.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라는 동화에서 유래됨.)’에만 존재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지구는 태양계 전체를 통틀어 액체상태의 물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수성은 태양과 너무 가까워서 모든 물이 증발해버렸고, 목성은 태양과 너무 멀어서 물이 있다 해도 꽁꽁 얼어붙을 것이다. 그런데 DNA와 단백질이 형성되려면 액체상태의 물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므로, 태양계의 생명체는 오직 지구(또는 화성)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오래된 통념이었다.
‘가까운 미래’, 유로파(Europa)와 달 착륙 유인우주선 연구
최근 들어 그러한 통념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우주탐사선 보이저(Voyager)호가 목성의 위성 근처를 지나가다가 얼음으로 덮여있는 유로파의 지하에 생명체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천문학자들은 태양계에 태양 이외의 다른 에너지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유로파의 표면 얼음층 밑에서는 조력(潮力)에 의한 열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참고로, 2009년에 개봉된 제임스 캐머런의 영화 <아바타>의 배경도 목성형 외계행성이 아니라 그 주변을 도는 위성이었다.) 이 발견에 자극을 받은 과학자들은 2020년 발사를 목적으로 유로파-목성계 미션(Europa Jupiter System Mission, EJSM)을 준비하고 있다. 가까운 미래의 연구과제로는 달 착륙의 재개와 유인우주선의 발사 등을 포함한다.
‘조금 먼 미래(2030~2070)’는 화성탐사와 우주관광, 그리고 ‘아주 먼 미래(2070~2010)’에는 우주엘리베이터와 ‘항성 간 우주선, 스타십’의 출현, 핵로켓과 램제트 융합, 반물질로켓과 나노우주선이 출현할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조금 먼 미래’와 ‘아주 먼 미래’, 화성탐사, 반물질로켓과 나노우주선 개발.
아이작 아시모프의 SF소설 <신들 자신God Themselves>은 하필이면 스토리의 시대적 배경을 서기 2070년으로 잡고 있다. 2070년은 미치오 카쿠가 설명한 대로 우주과학의 ‘조금 먼 미래’와 ‘아주 먼 미래’의 기준이 되는 시점이다. 소설 속 과학자들은 ‘텅스텐-186’이 ‘플루토늄-186’이라는 신비의 물질로 변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이 물질이 다른 우주에서 왔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알고 보니, 그것은 ‘핵력의 세기가 다른 우주’ 즉, 평행우주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이 계획한 일종의 ‘생존 작전’이었다. 문학적 상상력은 늘 실제의 과학연구를 촉진하거나 자극을 준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신들 자신>과 영화 속의 ‘그들’, 인간의 사랑!
소설 <신들 자신>의 시대적 배경이 2070년인 것도 그렇거니와 하필이면 제목이 <신들 자신>인 것도 재미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자주 표현된 ‘그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회전하는 블랙홀을 통과한 쿠퍼가 맞닥뜨린 경이로운 공간에서의 유영이다.
쿠퍼와 교신하는 로봇 타스는 그 공간을 일러 ‘그들’이 선물한 공간이라 말한다. 그곳은 과거의 공간이면서, 현재의 공간이며, 미래의 공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상상의 공간이면서 차원이 다른 공간인 것이다. 그 공간은 또한 전설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동방원정에 나섰던 알렉산드로스가 서아시아의 해안에서 높은 파도와 절벽에 막혀 있을 때 갑자기 바다가 잔잔해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 기적을 일러 ‘사다리(klimakos)’라고 부른다. 오늘날 ‘절정’을 뜻하는 클라이맥스(Climax)는 이 ‘사다리(klimakos)’에서 유래했다. 알렉산드로스가 고르디오스의 매듭(Gordian knot)을 자른 뒤 승승장구한 것은 바로 그 사다리, 즉 클리마코스를 지난 직후의 일이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Climax)와 알렉산드로스의 사다리(klimakos)
기적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거나 절대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위험을 무릅쓰고 가파른 절벽을 사다리로 기어올랐듯 끊임없는 도전이 기적을 만들어낸다. 블랙홀의 내부에서 쿠퍼가 맞닥뜨린 공간은 ‘신들 자신’이나 ‘그들’이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쿠퍼 곧,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간의 도전, 그 도전을 가능하게 했던 가족에 대한 사랑, 끝까지 아버지 쿠퍼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머피의 인내와 사랑이 결실을 맺은 기적이다.
인간의 짧은 삶에 비해 우주과학은 멀리 있고 느리게 발전한다. 그러나 믿음과 도전은 우주과학의 미래를 밝게 해준다. 하여, 인류는 인류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가치이자 이념인 생명을 지키는 일에서도 기적을 만들어낼 것이다. <인터스텔라>의 메시지가 그것이다.
“인간의 생각은 악보이고, 인간의 삶은 재즈처럼 비딱한 음악이다.”(율리 체, <형사 실프와 평행우주의 인생들>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