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우거진 숲길을 따라 난 오래된 길을 한 시간여 달리자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마재 마을이 나타났다. 수원선경도서관에서 진행한 ‘길 위의 인문학’의 마무리 일정으로 다산생가 탐방에 나선 길이었다. 주차장에서 빠져나와 몇 걸음 옮기자 현대와 전통이 어우러진 커다란 기와건물이 눈앞에 다가왔다. 다산의 모진 삶과 사뭇 대비되는 그 건물이 바로 다산기념관이었다.
기념관에는 다산의 삶의 궤적을 엿볼 수 있는 갖가지 기념물이 전시돼 있었다. 눈길을 끈 건 단연 책자들이다. 다산의 대표 저작인 ‘1표2서’를 비롯한 다양한 책들이 유리관 안에서 조용히, 그러나 커다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하나 같이 허투루 쓴 것이 없을 것이었다. 그리움과 사무침, 울분과 분노를 오롯이 삭이며 한 자 한 자 가슴으로 써내려갔을 것을 생각하다 순간 뭉클해졌다. 때 아닌 격정에 걸음을 떼지 못했다.
안뜰로 나오자 그리 멀지도 높지도 않은 곳에 다산의 묘가 누워있었다. 묘지 너머로는 ‘열수’(참고로, 다산은 한강을 ‘열수’라 불렀으며 본인의 호로 사용하기도 했다.)의 물결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작렬하는 햇빛에 반사된 물결은 강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게 했다. 도리 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현기증이 일었다.
소년등고(少年登高) 황사영이 정약용의 백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과 혼사를 치른 뒤 열흘이 멀다하고 처가가 있는 마재를 찾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나같이 영민하고 학식이 깊었던 처삼촌들과의 교유를 위해서였다. 그들과의 대화는 더없는 즐거움이었고, 가없는 기쁨이었다. 황사영이 수도 없이 들고났던 조안 나루가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나루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2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자리에는 생태공원이 조성돼 있다. 천천히 걸어 공원의 끝자락에 놓인 벤치에 앉아 강물을 보니 거기, 마포와 마재를 오가며 서학에 대해서, 특히 둘째 처삼촌 약종이 들려주는 천주에 대한 얘기에 몸이 굳은 듯 마음이 얼어버린 듯 깊고 큰 충격에 몸서리쳤을 황사영의 얼굴이 그려졌다. 약종은 약용의 세 형 중에서도 유난히 서학에 심취했고,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천주를 섬기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약종의 형과 아우인 약전과 약용은 새로운 학문으로서 서학에 관심을 가졌을 뿐 그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약종은 형과 동생보다는 조카사위 황사영에게 천주신앙을 털어놓곤 했다. 소년의 맑음과 ‘소년등고’의 깊이를 동시에 지닌 황사영은 둘째 처삼촌의 그런 마음을 몸으로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이 세계에는 시공을 초월해서 스스로 근원이 되는 존재가 있으며, 그 존재가 만물을 주재한다는 것은 셋에다 넷을 더하면 일곱이 되는 것과 같아서 증명할 필요가 없고 언설로 다투어야 할 일도 없이 인간의 이성으로 스스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선과 사랑은 세계를 주재하는 자의 원리이며 악과 증오는 그 원리에서 벗어난 자의 타락일 뿐이다. 이 확실한 존재에 대한 느낌이 떠오르는 것이 모든 앎과 학문의 시초이다, 라고 정약종은 가르쳤다. 황사영은 처숙부가 말하는 신이란 강물과 같아서 현재를 모두 거느리고 흘러서 미래의 시간으로 생성되는 지속성으로 여겼다. 그때 황사영은 글이나 말을 통하지 않고 사물을 자신의 마음으로 직접 이해했고, 몸으로 받았다.” (김훈 저, <흑산> 69, 70쪽)
말하는 정약종은 목소리를 낮추었고, 듣는 황사영은 두려움에 떨었다. 황사영의 두려움과 떨림이 20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2014년의 떨림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그 떨림이 전해진 것인지 불현듯 상념에 사로잡혀 덩달아 떨어야 했다. 신유박해 때 체포된 정약용과 형들의 운명은 이후 죽음과 유배로 갈렸다. 약종의 죽음으로 약전과 약용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형이었던 약전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죄스러움이었고, 약용 역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참수 직전까지도 약종은 천주께 기도했다.
‘사람들아, 아 사람들아, 눈을 뜨고 자명한 것의 자명함을 보라.’
다산생가 앞 생태공원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을 한 뒤 일행과 함께 실학박물관으로 향했다. 2층 박물관 입구에는 난데없이 커다란 수레가 비치돼 있었다. 해설사의 설명이 그럴 듯하다. 수레가 곧 실학의 정신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평평하게 길게 뻗은 길보다는 구불구불 요철이 잦은 조선의 길에서 수레를 굴리겠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생을 자처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게 바로 실학이었다. 수레가 김훈의 소설 <흑산>(학고재, 2011)의 ‘마노리’를 떠올리게 했다. 마부 마노리가 황사영의 말을 전하기 위해 낯선 중국의 천주교당에 들었을 때 구베아 주교가 묻는다.
– 조선에서 여기까지 며칠이 걸렸는가?
– 오십 일이 걸렸습니다.
– 왜 수레를 쓰지 않는가?
– 길이 나빠서 바퀴를 쓰지 못하고 오직 걷기만 합니다.
– 훌륭하다. 먼 길을 오고 또 가는 일은 아름답다.
말을 끌고 건너갔던 모든 들판 길과 산맥을 넘어가는 고갯길, 눈 쌓인 길들과 바람 불던 길들이 마노리의 눈앞에 떠올랐다. 마노리는 그 길들 위에서 오가는 일의 놀라움을 혼자서 새기고 있었다. 오가는 일이 아름답다고 하니, 주교가 어떻게 마부의 일을 아는 것인지 마노리는 의아했다. 이후 마노리는 구베아 주교로부터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천민 마부 마노리가 천주교도로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 구베아 주교의 말이 자꾸만 앞질러 달리는 생각을 잡아채었다.
“먼 길을 오고 또 가는 일은 아름답다.”
사람이 사람에게로 간다는 것이 사람살이의 근본이다. 마노리는 길에서 알았고 나는 마재의 실학박물관 전시실 입구에 설치된 수레를 보면서 어렴풋이 그 깊이를 헤아려 보았다. 실학이란 사람이 사람에게 가고, 또 사람이 사람에게 올 수 있도록 길을 놓는 일이며, 그 위에서 수레를 끄는 일이다.
박물관에서는 마침 다산을 기리는 특별전시회 <유배지의 제자들>를 열고 있었다. 거기 다산과 제자 황상과의 만남에 얽힌 긴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놓은 전시물이 있었다. 둘의 만남은 정민 교수의 <삶을 바꾼 만남>(문학동네, 2011)을 통해 먼저 만났던 터였다.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어인 일인가. 그토록 다양한 얘깃거리 중에서 내 마음을 흔든 건 ‘정황계(丁黃契)’다. 정약용과 사제의 연을 맺었던 황상이 스승의 사후까지 그 신의를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결국 신의와 우의가 자손들에게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요즘 세태를 생각해 보면 절로 무릎을 치게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가문의 몰락과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병환 등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정약용의 두 아들, 학연과 학유는 번듯하게 자라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산은 두 아들에 대한 애틋함과 자상함, 무엇보다도 엄한 아비로서의 소임을 다하려 발버둥 쳤다. 천리 밖의 아버지가 먼 데 사는 아들을 교육하는 유일한 방법은 서신이었고, 그 서신은 곧 학연과 학유의 삶의 지침이 되었다. 한창 학문에 정진할 나이에 혹여 나태해지거나 혹여 위축될 것을 염려했던 아비는 두 아들을 차례로 유배지 강진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 외롭고 긴 여정에서의 상념과 다산의 아버님께 받았던 가르침을 학유의 입장에서 정리한 책이 작가 안소영이 엮은 <다산의 아버님께>(보림, 2008)이다.
“흐르는 물처럼 순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세상의 미끈한 겉면만 바라보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한번쯤 곤두박질쳐져본 사람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그 사이사이 세세하게 잡힌 세상의 주름까지도 눈에 보입니다. 아버님은 세상의 주름, 곧 나라와 백성의 생생한 현실을 보아야만 비로소 사람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왜 학문을 하는지 알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저는 이제야 비로소 어렴풋하게나마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안소영 저, <다산의 아버님께> ‘학유가 다산의 아버님께 쓴 편지’의 일부분.)
실학박물관을 나와 다시 생태공원에 나갔을 때 잠시 소란스런 일이 발생했다. 도도한 열수의 이녘과 저녘을 잇는 산맥의 수려함과 그 속에 담긴 피 묻은 역사의 자취를 좇기도 부족한 시간이었으나, 사람들이란 아집과 편견의 미몽을 벗지 못했다. 두물머리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놓고 한바탕 시비가 벌어졌다. 혹자는 강 건너 산의 뒤쪽에 있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그 방향일 리가 없다며 산을 넘기보다는 강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야 비로소 두물머리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지도를 펴놓고도 방위와 독도를 모르는 우리는 지금껏 무엇을 살아왔던 걸까.
아무려나 다산과 약전은 눈앞의 물길을 따라 내려갔을 것이다. 한때는 주상의 부름을 받아 대관의 길을 꿈꾸며 흘러갔을 테지만, 창졸간에 천주교도로 몰려 그 물길을 따라 송파 나루를 지나고 배다리를 놓았던 뚝섬 길도 지나쳐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언제 돌아올지, 삶의 길인지 죽음의 길인지도 모른 채. 조카사위 황사영이 약종을 만나러 올라왔던 물길을 처삼촌들은 다시 거슬러 머나 먼 유배의 길에 올랐다.
대체 무엇이, 그토록 맑은 영혼과 향학열에 불타던 형제들을, 혹은 참형의 길로, 혹은 유배의 길로 이끌었을까.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수를 결심했던 정조는 우선 힘을 기를 필요가 있었다. 예의 참기 힘든 분노를 가슴에 품고 있었으나 정조는 연산군 등속과는 사뭇 다른 결을 가진 왕이었다. 그는 학자였다. 신중함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학문의 신봉자였으며, 윤휴와의 북벌논쟁에서 승리한 뒤 권력의 노른자위를 독식했던 송시열 정파의 200년 권력에 둘러싸여 겨우겨우 살아갈 정도의 쥐꼬리 권력을 쥐었을 뿐인 힘없는 왕이었다. 그런 왕에게 젊고 유능하며 영민한 청년학자 다산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그를 비롯한 남인계열의 소장학자가 커가는 모습, 그들을 비호하며 키우는 것이야말로 정조가 가슴에 품었던 꿈과 이상을 이루어내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
곡절 끝에 정약용을 동부승지에 제수했을 때 노론의 반대가 거칠고 노골적이었다. 스스로 물러나 있는 것이 자신에게, 무엇보다 왕에게 이로울 것이라 판단한 정약용은 부러 지방으로, 고향으로 나돌기 시작한다. 와중에 궁중에서는 모종의 음모가 꾸며졌다. 정조와 그의 젊은 가신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와 파란만장한 생을 견뎌온 야심가 정순왕후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순간, 정조가 승하했다. 1800년의 일이며, 이듬해부터 대대적인 천주교도 발본의 기치가 내걸렸다. 이른바, 신유박해(1801년)이다.
정조의 정약용에 대한 신임은 각별했다. 오죽하면 신하에게 면전에서 “반드시 식견 있는 선비”라는 말을 했을까. 역사 저술가 이덕일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통해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어떠했는지 예를 들어 증명해 보인다.
정약용이 성균관에 들어가 대과공부를 하던 때의 일이다. 정조는 <중용>에서 자신이 의문으로 여긴 70여 항목을 뽑아 느닷없이 여기에 답하라는 과제를 내주고는 했다. 그중 이발기발설(理發氣發設)에 대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학설의 차이점을 가장 먼저 물었다. 대부분의 태학생들이 퇴계의 사단(四端)이 이발(理發: 이가 발하고 기가 따른다는 주장, 이 – 사림, 기 – 훈구)이라는 학설을 지지했는데, 정약용만 율곡의 기발(氣發: 이는 기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는 주장)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황은 양반 사대부의 신분적 특권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정치인이고, 이이는 서자들이 변방에 자원입대하면 과거응시 자격을 주고 천인들이 변방에 자원입대하면 양인으로 신분 상승시켜주자는 신분제 완화 방안을 제시했던 정치인이다.
이황의 학맥에서 진보적인 정치인들이 등장하는 반면 이이의 학맥에서 수구적인 정치인들이 대거 등장하는 것이 한국 정치사의 아이러니 중의 하나다. 정약용은 굳이 계보를 따지면 이황 계열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이의 기발을 지지한 것은 그가 그만큼 진보적인 철학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토록 왕의 총애를 받았던 정약용은 왜 하필이면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걸까. 이덕일은 그 이유를 ‘보유론(補儒論)’에서 찾는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천문, 농경, 측량 등에 대한 서양 과학기술의 일종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생설에 얽히기는 했지만 서학을 천주교라는 새로운 교리체계를 가진 종교가 아니라 유학의 한 별파로 생각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즉, 보유론의 견지에서 서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조선은 왜 그토록 천주교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걸까. 그 이유 역시 정치적 맥락에서 이해할 법하다. 하나는, 조선 성리학의 ‘교조화’였다. 노론은 일당독재를 계속하면서 성리학 이외의 모든 사상체계를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몰았다. 두 번째는, 천주교를 신봉한 양반 대다수가 남인이라는 데 있었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남인들을 중용하려 하자 노론은 천주교를 빌미로 남인들을 실각시키려 했다. 세 번째는, 당시 교황청의 경직된 교리 해석과 그 기계적 강요에 있었다. 특히 제사와 장례 문제에 대한 교황청의 경직된 해석과 강요는 노론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조선인들에게 거부감을 주었다.
정약용과 그의 형 약종, 약전은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들이며 또한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문재(文才)는 그들을 희생양에 머물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흑산도로 유배된 약전은 유배기간 동안 조선 최초의 생물학도감인 <자산어보>를 집필했으며, 약용 역시 18년의 유배기간과 귀향 후까지 집필에 전념해 ‘1표2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비롯해서 무려 500여권의 저작을 집필해냈다. 그 정신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려니 새삼 현기증만 더할 뿐이다.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멀고도 아득하며 깊고 지고한 정신의 한 경지였다.
대체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몰아붙였던 것일까. 절실함이었을 테다. 살고자 하는 절절한 의지와 삶을 초월한 사유의 경지. 그것들은 끝내 절절한 열정으로 승화되었다. 마치 삶을 초월하는 것으로 새로운 삶을 추구했던 이름 없는 민초들의 절절함이 고스란히 녹아든 언문으로 쓴 기도문처럼.
주여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어미 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게 하소서.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을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주여 주를 배반한 자들을 모두 거두시어 당신의 품에 안으소서.
주여 우리 죄를 묻지 마옵시고 다만 사하여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최초의 언문 기도문, 김훈의 <흑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