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모뎀과 ADSL의 시대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빈부의 격차가 극심하던 시대였다. 여유 좀 있는 친구들이 밤새 전화선을 붙잡고 PC 통신과 정체불명의 외국 사이트를 통해 온갖 어둠의 에픽템들을 수집하는 동안, 가난한 자들은 1.44MB짜리 플로피 디스크를 들고 그 에픽템들을 복사해주기를 간청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나마 빈자들의 위안이 될 만한 것이 있었다면, 명예를 추구한 부자들의 시혜 덕분에 나름의 낙수효과가 있었다는 점이었을까.
결핍은 상상력을 잉태한다. 자원 부족에 허덕이던 이 혈기 왕성한 아이들은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의 단어, 똘이의 파란만장한 경험담, 옛날 옛적 선조들이 춘화를 보고 방중술이란 걸 썼더라는 기담만으로도 흥분의 나래를 펼쳤다. 광랜과 당나귀의 시대가 열리며 츠보미부터 빌리 형님까지 그 어떤 취향을 갖고 있든 클릭 몇 번으로 자료를 찾을 수 있게 된 오늘날 생각하자면, 상상할 수 있을 뿐 실감할 순 없는 보릿고개였던 것이다.
‘방중술’을 담고 있다는 중국의 고서 ‘소녀경’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구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고, 구한다 한들 어차피 한문으로 쓰여져 있을 게 뻔하니 적극적으로 구할 까닭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스토리만 대강 알고 있었을 뿐이다. 체위를 비롯한 온갖 것들을 망라한 성(性) 지침서라는 것, 그리고 그 등장인물이 무려 ‘소녀’라는 것.
떡밥으로만 존재할 뿐 그 누구도 제대로 접해본 적 없을 이 전설의 책, ‘소녀경’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소녀경’은 중국의 고대 의학서인 ‘황제내경’의 한 편으로 ‘소녀경 내편’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 유래가 불명확하다. 황제내경 자체가 워낙 오랜 책인데다가, 그 내용이 중국 고대 신화 속의 인물 황제(黃帝) 헌원이 그의 신하들과 나눈 대화로 구성되어 실제로 누가 썼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까닭이다. 어쨌든 실제로는 수나라 때에 기초가 짜여지고 당나라 초기 손사막이라는 사람이 완성했다고 하니, 실제로는 대강 7세기 경 쓰여진 책이라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뭔가 김이 빠지지만, 아직 실망하시기엔 이르다. 이 책을 둘러싼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2004년 자유문고에서 청나라 때의 고증학자 섭덕휘(십덕후 아님)가 정리한 새로운 판본을 한의학박사 최형주 씨가 번역하여 낸 적이 있는데, 한 달만에 청소년 유해간행물로 결정되었다(…).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직접 나서 ‘뭔가 있는 책’이라 증거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보도록 하자.
책은 별다른 프롤로그나 상황 설명도 없이, ‘황제’와 ‘소녀’의 대화로 시작된다. 그 전설적인 신화 속의 군주 ‘황제’가 묻는다. “아 요새 몸이 영 안 좋고 기분도 꿀꿀하고 뭔가 울컥 울컥 겁도 나는데 이거 왜 그런 거임?” 이에 이 책의 또 한 명의 주인공 ‘소녀’가 대답한다. “성관계에 문제가 있으시군요.”
그냥 몸이 안 좋다고 했을 뿐인데, 절대 군주에게 과감하게 처음부터 돌직구를 날려대는 ‘소녀’. ‘소녀’라는 이름에서 떠오르는 이런 저런 이미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만나기만 해도 겁나서 바로 죽을 것 같다. 대체 제목까지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소녀’란 누구인가. 우리가 꿈꾸던 그 ‘소녀’가 아니란 말인가.
‘소녀’라는 이름에 낚인 수많은 ‘소년’들에게 애도를. 일단 그녀의 정체는 우리가 꿈꾸던 소녀(少女) – 그러니까 걸(girl)이 아니라, 소녀(素女)라는 신녀다. 워낙 옛날 사람이니 그에 대한 신화도 판본이 많고 어지러운데, 여와(인간을 만들었다는 여신), 서왕모(신선 중 최고의 여신), 상아(달의 여신) 등과 함께 최고의 미녀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애당초 창세 신화급의 인물이라는 얘기다(…). 일찍이 신선계에 들어가 방중술을 익히고 어린 남자들의 정기를 얻어(…) 불로장생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서왕모의 수제자라는 얘기도 있고 평범한 사람과 결혼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어쨌든 이런 저런 설화에서 이미 신녀가 된 상태로 등장하므로 딱히 그럴듯한 스토리는 없다. 오히려 이현세 씨의 만화 ‘천국의 신화’에서 나름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부여받는데, 그다지 권할 만한 스토리가 아니라서(…) 어쨌든 이쯤 되는 인물이니까 절대군주 앞에서 “님 섹스 개판임”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셈이다.
어린 남자들의 정기를 뽑아먹고(…) 불로장생의 이치를 깨우친 신녀, ‘소녀’. 그녀가 전하는 불로장생하는 성관계란 어떤 것일까. ‘소녀경’의 실체에 대해 이제부터 차근차근 접근해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