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글로 소통하는 시대다. 인터넷 기반의 디지털매체가 일상생활의 중심권역으로 들어온 뒤 글쓰기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문자와 카톡, 메신지를 비롯한 개인 간의 소통수단은 물론이거니와 블로그와 페이스북, 트위터 등 보다 많은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 역시 글쓰기를 소통의 수단으로 삼는다. 디지털의 역설이라 할 만하다. 디지털문화가 발전할수록 아날로그적 글쓰기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글쓰기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생각만큼 잘 써지지 않을뿐더러 막상 심각하게 고민해서 써놓고 보면 도처에서 비문이나 어색한 표현이 속출한다. 혼자만의 공간에 쓰는 것이라면 모를까 블로그나 페이스북처럼 공개된 공간에 쓰는 글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 도대체 무슨 수를 써야 글쓰기 실력을 키울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하지만 해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결국 글쓰기가 곧 스트레스가 되면서 되레 글쓰기로부터 멀어지기 십상이다.
말이 아닌 글로 소통하는 시대!
글쓰기 관련 책의 출간이 봇물을 이루는 건 그런 현실의 반영이다. 글쓰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글쓰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꾸준하게 팔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인 일인가. 글쓰기 관련 책을 읽어봐도 도통 글 실력은 늘지 않는다. 늘 제자리걸음이다. 아쉽고 답답하다. 이유가 뭘까?
글쓰기는 어찌 보면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닮았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막상 풀려고 하면 벽에 부닥친다. 책 몇 권 읽는다고 갑자기 글 실력이 늘지는 않는다. 방법은 없는 건 아니다. 많이 쓰면 는다. 계속해서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글 감각이 생긴다. 감각을 얻기 위해 꾸준히 써야하고, 그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또 꾸준히 써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매일 무슨 글을 쓴단 말인가. 신변잡기적인 글을 주구장창 써본들 글 실력이 늘 리 없다. 그렇다고 열일을 제쳐두고 글쓰기에만 매달릴 수도 없는 현실이다. 대체 무엇을 쓴단 말인가. 도대체 어찌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 방법을 찾아보자.
첫째, 쓰기 전에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덮어놓고 글쓰기의 방법을 찾기보다 왜 글을 쓰는지, 어떤 글을 쓰려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써야 한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글을 쓰기 전에 충분한 사색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쇼펜하우어 문장론>에서 들려주는 얘기다. 생각하지 않고 쓰면 제대로 된 글이 될 리 없다. 쓰기 위해 억지로 생각하는 건 자기기만이다. 사색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하물며 독서조차 해악이 될 수 있다. 어찌 보면 ‘반(反)독서주의’로도 보이는 그의 주장은 단호하다.
사색 없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아무리 그 수가 많더라도 제대로 정리해놓지 않으면 장서의 효용가치는 기대할 수 없다. 반대로 그 수는 적더라도 완벽하게 정리해놓은 장서는 많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지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많은 지식을 섭렵해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면 그 가치는 불분명해지고, 양적으로는 조금 부족해 보여도 자신의 주관적인 이성을 통해 여러 번 고찰한 결과라면 매우 소중한 지적 자산이 될 수 있다.”
결국 자신의 생각을 영글게 하는 건 다독이 아니라 숙독이며, 또한 독서를 통해 받아들인 타인의 사상을 자신의 사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오랜 사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색이 곧 좋은 문장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는 게 쇼펜하우어의 주장이다.
“표현이 모호하고 불명확한 문장은 그만큼 정신적으로 빈곤하다는 반증이다. 이처럼 표현이 모호해지는 이유는 거의 대부분이 사상적으로 불명료하기 때문이며, 작가의 사상이 불명료하다는 것은 사색의 오류, 모순, 부정에서 시작된다.”
둘째, 올바른 독서가 중요하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기 이전에 성실한 독자일 가능성이 높다. 읽어야 비로소 쓸 수 있다. 읽지 않고서 좋은 글을 쓰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좋은 글쓰기를 바란다면 먼저 잘 읽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물론 무턱대고 많이 읽는다고 좋은 건 아니다. 독서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다. 중요한 건 ‘천천히 읽기’와 ‘변증법적 읽기’이다.
사색의 중요성을 강조한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프랑스 인문학자 에밀 파게의 독서론으로 이어진다. 근간 <단단한 독서>(에밀 파게 저, 유유 간, 2014)는 천천히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읽었다는 걸 과시하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면 책은 온전히 사색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천천히 읽고 거듭해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책 읽는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선 책을 천천히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뒤로도 계속 천천히, 자신이 마지막으로 읽게 될 소중한 책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책을 천천히 읽어 나가야 한다.”
에밀 파게가 일러주는 느리게 읽기의 미덕은 다양하다. 우선, 느리게 읽으면 책에서 받은 첫인상에 속지 않는다. 둘째, 자신을 몰각해 버리는 일이 없다. 셋째, 게을러지지 않는다. 넷째, 읽어야 할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구별할 수 있다.
천천히 읽기와 거듭 읽기가 중요하다!
천천히 읽기와 더불어 한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도 중요하다. 이른바 ‘거듭 읽기’다. 거듭 읽기는 우선, 작가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생긴다. 작가의 생각에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지 않게 되는 것이다. 둘째, 문체를 즐기게 된다. 셋째, 자신과 비교하기 위해 거듭 읽는다.
무엇보다 천천히 읽기의 미덕은 저자의 생각에 끌려 다니지 않으면서 책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는 점이다. 쇼펜하우어의 말마따나 중요한 건 몇 권의 책을 읽느냐가 아니라 단 한권을 읽더라도 제대로 자기 것으로 소화하며 읽는 것이다.
에밀 파게의 천천히 거듭 읽기와 더불어 주목할 것은 월터 카우프만이 <인문학의 미래>(동녘 간, 2011)에서 제시한 변증법적 독서이다. 변증법적 독서는 첫째, 성찰되지 않은 삶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불만을 떠올리게 하는 독서이다. 변증법적 독서가들은 문화 충격을 회피하기보다는 그것을 기대한다. 이들은 자신의 삶과 믿음, 그리고 가치를 점검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텍스트에서 도움을 받으려 한다. 따라서 텍스트는 자기 해방의 보조물이다.
둘째, 대화하는 독서이다. 텍스트는 우리가 그것에 질문을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지는 대화의 상대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역사철학적 독서이다. 소크라테스적 요소와 대화적 요소가 역사철학적 요소와 함께 온전히 결합했을 때 비로소 변증법적 독서가 가능해진다. 즉, 텍스트에 매몰되는 걸 경계하며, 끊임없이 논증, 해법, 저자에 대한 평가가 병행하며 읽어야 한다. 카우프만의 변증법적 책읽기를 한마디로 말하면 묻고, 대화하고, 분석하는 독서이다.
변증법적 독서 ; 묻고, 대화하고, 분석하는 독서
셋째, 쓰되 꾸준히 써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무엇을 쓸 것인지, 왜 쓰는지에 대해 충분히 사색했다면, 그리고 천천히 읽기와 변증법적 독서를 통해 지적 자극을 받았거나 영감을 떠올렸다면 이제 그걸 글로 표현해야 한다. 글쓰기는 단지 기록이 아니라 중요한 사색의 과정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깊은 사색을 했더라도 그걸 글로 정리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상누각이 되고 만다. 기록되고 표현되지 않은 생각이란 언제든 휘발돼 버릴 수 있다. 글쓰기는 현실적 필요에 의한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분명하게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독자가 모이지만, 모호하게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비평가만 몰려들 뿐이다.”
알베르 카뮈의 말이다. 좋은 글이란 멋진 글이나 유려한 문체를 가진 글이 아니라 분명하게 쓴 글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 아름다운 문장이란 없다. 다만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묘사된 단문의 아름다움만이 있을 뿐이다. 불필요한 수식을 빼고, 채 정리되지 않은 생각으로 이리저리 비틀고 휘젓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오롯이 담은 간결한 글이라야 좋은 글이다.
보르헤스 “결정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글이란 한 번에 완성되는 법이 없다. “결정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르헤스의 지적은 그런 의미이다. 글은 갈고닦는 것이지 결코 한 번에 완벽해질 수 없다. 결국 꾸준히 쓰고 줄기차게 고치는 것이야말로 글쓰기의 요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