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1월 3일은 일요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날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국장일이었다. 일주일 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은 박정희 대통령의 공식적인 장례일이었고 이날 초중고 전 학교는 휴교했다. 초등학교 4학년의 눈으로 그날을 돌이켜 본다.
선생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국장이 있기 전날 담임 선생님은 또 한 번 우리의 다리를 아프게 했었다. 종례 때 반장이 일어서 차려 경례 한 후 보통은 짤막하게 얘기하고 앉히는게 상례였는데 그날도 장장 수십 분 동안 장광설을 늘어놓으셨던 것이다.
“내일은 국장일이다. 느그 집안에 아부지가 돌아가시면 우예 되겠노. 밥이 넘어가겠나. 책이 눈에 들어오겠나. 똑같아. 내일은 나라의 아부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는 날이다. 그래서 느그도 학교 안나오는 기다. 공부가 눈에 안들어와서. 선생인 나도 수업을 할 수가 없어서……”
대충 재구성한 멘트는 이렇지만 당시의 선생님 멘트와 대차가 없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나라의 아버지라고 했다.
아싸 어쨌든 학교에 안나오다니 이게 웬 떡이냐. 몇 놈들이 참 철도 없이 복도를 가로지르면서 와 내일 학교 안 나온다 환호하다가 바로 옆반 선생님에게 걸렸다. 그때 십년 굶은 호랑이 멧돼지 본 기세로 교실 문을 박차고 나온 선생님에게 그 몇 놈의 아이들은 눈동자가 돌아가도록 얻어터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동네 유치원 원장님께 심부름을 갔었다. 책상에 앉아서 뭔가 사무를 보고 있던 원장 선생님이 TV를 켜고 계시지 않길래 나는 입바른 소리 잘하는 어린이로서 설레발을 떨었다. “샘예. 국장 보셔야지예. 대통령 장례 아닙니꺼.” 그러면서 역시 호들갑을 계속하면서 티븨를 켰다. 또깍. 흑백 TV에 실황 중계가 비쳐졌다. 광화문 네거리에 긴 아치로 된 박정희 대통령 각하 국장 휘장도 보였다.
그때 나이 쉰 줄의 원장 선생님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일은 참 많이 했지 저 사람이.” “나라의 아버님”이 가신 마당이었기에 나는 의아해서 유치원 원장 샘을 바라 보았다. “저 어르신”도 아니고 “저 분”도 아니고 “저 사람”이라니. 그런데 그 다음 튀어나온 말을 나는 지금도 그 특유의 경상도 억양까지 선명히 기억한다. “소새끼같이. 소새끼같이 열심히 했지.”
서울 사람들이 이 말을 하면 그 뉘앙스가 애매할 수 있으나 경상도 사람이 저 말을 감정을 담아서 하면 그 뜻은 확연하고 명료하다. 그때 원장 선생님은 박정희에 대한 감정이 안좋다는 것은 확실했다.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원장 선생님의 방점은 확연히 열심히 했지가 아니라 소새끼에 찍혀 있었다.
부모님 “불쌍해서 어떡하나”
집에 돌아왔을 때 분위기는 급반전되어 있었다. 직장 나가신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티븨 앞에 못 박혀 계셨다. 그때 모니터에 비친 이는 바로 어려서는 어머니를 닮았나 했더니 나이 들어갈수록 부전녀전인 듯 보이는 바로 그분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선거 때 “불쌍하지 않냐. 일찍 조실부모하고…..”라고 하면서 박근혜 동정론을 펴는 누군가에게 “니 부모는 지금 살아 계시지 않으니 너도 불쌍하구나.” 라고 반문하실 정도로 이성적인 분이시지만 당시 바로 티븨 앞에서 그 말을 하셨다.
“불쌍해서 어떡하나.”
그 후로 펼쳐진 풍경은 영화 <효자동 이발사>를 보면 안다. 영구차는 투명했고 그 안에 태극기 덮인 관이 있었고 육사 생도들이 그 관을 호위하며 천천히 한 발 한 발 각을 지어 걸어갔다, 모르긴 해도 아마 다음날 육사 생도들 무릎 아작났을 것이다. 연도에는 수많은 이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진짜로 부모가 잃은 듯이 울었다. 어떤 할머니는 엎드려서 울었고 우리 동네 곳곳에서도 울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아이고.
그때 나는 알았다 울음은 전염되는 걸.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울음은 전파되었으며 나중에는 소새끼 운운했던 원장 선생님까지 눈시울을 붉혔던 것이다. 이유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곳은 바로 열흘 전만 해도 박정희 타도의 불길이 널름거리며 타올랐던 부산이었다.
김일성의 죽음, 박정희의 죽음
티븨에서 성우가 읽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바치는 조시가 흘러나왔다. 작사자는 이은상이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며 사람들의 등짝을 때리는 채찍같은 시를 지었으며 3.15 부정선거 반대 시위 때는 자제를 호소하며 빨갱이 타령하던 바로 그분. 그분의 조시는 절절하고 명문이었다.
“태산이 무너진 듯 강물이 갈라진 듯/ 이 충격 이 비통 어디다 비기리까/ 이 가을 어인 광풍 낙엽지듯 가시어도/ 가지마다 황금열매 주렁주렁 열렸소이다./ 오천년 이 겨레의 찌든 가난 몰아내고/ 조상의 얼과 전통 찾아서 되살리고/ 세계의 한국으로 큰 발자국 내디뎠기/ 민족의 영도자외다, 역사의 중흥주외다./ (중략) 십자가 지신 오늘 붉은 피 흘리셔도 피의 값 헛되지 않아 보람 더욱 찾으리다./ 육십년 한평생 국민의 동반자였고 / 오직 한길 나라사랑 그길에 바친이여./ 굳센의지 끈질긴 실천 그 누구도 못지을 업적/ 민족사의 금자탑이라 두고두고 우러보리라.(하략)”
태산에 강물도 슬퍼하는 민족의 지도자에 역사의 중흥주요 십자가까지 지신 예수에다가 민족사의 금자탑까지. 이런 워딩을 구사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몇 나라 안된다. 사실 이 날은 그로부터 13년 뒤 김일성 주석의 사망 때 북한이 보여 준 풍경의 전조였으며, 그날 내가 본 모습은 북한에서 보여준 모습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미치는 줄 알았다. 좀 울어야 폼이 나겠는데 눈물은 커녕 육사 생도들 발 틀리는 것만 보였으니까. 진심으로 나는 나의 비애국성에 실망했었고 스스로를 나무랐었다. 울어야 되는 줄로 알았다. 안 울면 안되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 또한 일종의 본능이 아니었을지. 탈북자 출신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가 묘사한 김일성 주석 사망일의 북한 풍경을 보면서 나는 일종의 평행이론의 그림같은 재연에 경악했다. 그때 우리가 비웃던 모습은 바로 우리가 행했던 모습이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박정희 대통령이란 무엇이었을까?
탄핵 전, 사람들은 도대체 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요지부동 40퍼센트이고 특히 나이 든 양반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올인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나도 그랬고….. 하지만 1979년 11월 3일의 모습을 돌아보면 그것이 약간은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말이다.
그들이 박정희의 친일파 경력을 모를까? 심지어 박정희가 독재한 걸 모를까? 그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알고 김형욱을 죽이고 ( 실종이지만) 김대중을 죽이려 했던 이라는 것을 모를까? 연예인들 호출해서 성노예로 삼았던 경력을 모를까? 다 안다. 그럼 조금 다른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1979년 11월 3일에 내가 봤던 풍경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