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언론단체 행사에 참가한 작가 김훈이 모처럼 긴 얘기를 쏟아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당대의 문장가에 대한 현장의 반응이 꽤 뜨거웠던 모양이다. 많은 질문이 쏟아졌고, 질문 중에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것도 있었다. 세월호를 소재로 작품을 쓴다면 어떤 작품을 쓰겠느냐는, 곤란할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작가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세월호 사건은 참 말하기 어렵다. 나는 이준석 선장과 참사 다음날 자살한 단원고 교감, 두 인물에 대해 관심이 있다. 선장은 우리 시대의 아주 대표적인 한 캐릭터다. 그 선장은 우리의 이웃이고, 나 자신의 상당 부분이 투영돼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그 선장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소설로 쓰려다 힘들어서 미뤄 놨다.
내가 설정한 것은 이런 거였다. 이준석 선장은 그 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 사회가 그 책임을 요구하기는 상당히 무리가 있다. 어쨌든 자신의 직무를 배반하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다.
교감은 정말 괴롭다. 그는 인솔 책임자인데 제일 먼저 배에서 탈출하고 그 다음날 산에 올라가 목을 매 자살했다. 교감은 탈출할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육지에 올라가 죽을 때까지 그의 마음의 행로,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너무나 괴롭게 다가왔다.” — “나는 왜 쓰는가?” (<조선비즈>)
그의 말에는 작가 김훈은 물론 인간 김훈이 잘 드러나 있다. 만약 여러분이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라. 아마도 희생자들 혹은 그중 특정인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았겠는가. 김훈은 달랐다. 그는 왜 이준석 선장에 주목했을까, 왜 하필이면 자살한 단원고 교감이었을까?
우선은 김훈답다고 말하고 싶다. 역시 김훈이다! 작가 김훈은 이준석 선장과 단원고 교감의 삶과 죽음에서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한 작가 특유의 어떤 감정의 결을 엿보았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으며, 또한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중년의 비루한 삶이었을 수도 있다. 막중한 책임감에 짓눌렸으되 실은 아무런 해결능력도 없으며, 정의나 도덕과는 거리가 먼 소시민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초라한 중년의 모습. 환기하건대, 작가 김훈은 오래전부터 그들의 비루한 삶에 관심을 보여 왔다.
때로 글의 소재는 참으로 엉뚱한 데서 나타난다. 오늘은 작가 김훈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쓸쓸하고 무능한, 그러면서도 책임감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중년의 정서와 그들을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김훈의 소설 속에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상무’ 이미지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한다.
김훈과 상무
김훈의 소설집 <강산무진>을 읽다가 문득 발견한 게 ‘상무’다. 그의 소설들 대부분에는 상무라는 직책을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 「화장」에는 화장품회사 상무가 등장하고, 「언니의 폐경」에선 사고로 죽은 형부(언니의 남편)가 생전에 상무로 재직 중이었고, 화자인 ‘나’의 남편 역시 기업의 중역(아마도 상무쯤 되는)으로 나온다. 또한 <강산무진>의 화자인 ‘나’ 역시 중소업체의 상무로 근무하다 간암 말기판정을 받고 명예퇴직을 신청한다.
꼼꼼히 찾아보면 더 있다. 상무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상무 이미지와 다를 바 없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김훈 소설 속에서 숨 쉰다. 「항로표지」의 대기업 경영진 출신의 중년 사내, 「뼈」의 화자인 교수, 「배웅」의 부도난 하청업체 사장 출신 택시운전사 ‘김장수’ 역시 상무 이미지의 변용이라 하겠다.
상무(常務)의 사전적 의미는 일상적인 업무이거나 그러한 일을 맡고 있는 사람, 즉 일반 기업의 ‘상무이사’를 일컫는다. 그러나 김훈 소설에 등장하는 상무는 통상적인 직책의 의미를 초월한 은유이며, 다양한 작품에서 줄기차게 다뤄왔던 중산층의 이미지와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김훈의 소설 속 상무들은 우선은 ‘중산층’ 이미지를 대표한다. 또한 그것은 표면적 권위와 내면의 허무를 동시에 지닌 쓸쓸함과 허위의식의 ‘중년’ 이미지이기도 하다. 사회적 의미, 즉 직책으로서의 상무 역시 소설 속 이미지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예리한 촉수를 지닌 김훈이 그 이미지의 동일성을 포착, 활용하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김훈의 상무는 그 외에도 다양한 이미지를 포괄한다. 젊은 시절 신입사원으로 출발해 임원급인 상무(이사)의 자리에 올랐다는 건 분명 ‘상승과 발전’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상승을 기대하기 힘들며 서서히 퇴각을 준비해야 할 시기를 맞고 있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상무는 ‘하강과 퇴보’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또한 인생항로의 획기적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에서 묵묵히 일했을 때라야 오를 수 있는 고위직이라는 점에서 상무는 도전을 통한 ‘변화’를 추구했다하기보다는 안정과 편의를 모토로 한 ‘안주’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상무, 그리고 중년
그중 소설에서 주로 차용하는 이미지는 쓸쓸하고 차갑고 우울하며, 체념상태에 빠진 중년의 이미지이다. 안 그래도 툭 건드리면 그대로 터져버릴 것 같은, 오줌이 꽉 차 탱탱하게 불은 중년의 방광을 가차 없이 윽박지르고, 짓누르는 김훈의 유려한 문체는 차라리 폐부를 찢고 들어오는 칼날에 다름 아니다.
“간호사가 물러갔다. 도뇨관을 따라서 오줌은 장난감 물총을 쏘듯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쪼르륵 쪼르륵… 침대 밑 오줌통으로 오줌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광의 압박이 서서히 줄어들면서, 몰아쉬는 숨이 쉬어졌다. 병원 유리창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쪼르륵… 쪼르륵… 오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멀고도 선명했다. 그 분홍의 바다 저쪽 끝으로 죽은 아내의 상여가 흘러가고 있었다.” – <화장> 중에서
한편, 허물어져 가는 마음 밑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마지막 정염의 불꽃을 아스라이 바라보며 한숨을 쉬듯 젊은 여직원의 육체를 탐닉하는, 그러면서도 정작 어쩌지는 못하고 환상으로 마음에 가둬둔 채 혼잣말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모습은 차마 애처롭다 못해 외면하고 싶은 처연함이라 하겠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秋殷周).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 – <화장> 중에서
거듭, 김훈 소설이 보여주는 상무(혹은 중년)의 현실은 처량하다. 반평생 가족부양에 대한 부담으로 버거운 노동에 투신하다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는 모습(<언니의 폐경>의 상무), 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나서 우선 이혼한 아내에게 밀린 위자료를 지불하려 서두르고, 나머지 재산 역시 아들에게 물려줄 요량으로 병든 육신을 비행기에 실은 채 타향살이의 쓸쓸함을 담담하게 준비하는 모습(<강산무진>의 상무) .
그렇듯 김훈 소설 속의 상무들은 삶의 덧없음에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체념의 심연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간혹 체념과 허무의 블랙홀을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모습이기도 하지만(<언니의 폐경>에서 사장으로 승진하는 ‘나’의 전 남편), 그것은 – 작가의 생각에도, 독자들의 눈에도 – 성취나 발전이기보다 더 깊은 체념일 뿐이다.
사회적 성공에 걸맞은 화려함을 좇느라 아내를 버리고, 입사 동기에 대한 연민쯤 양복소 매에 달라붙은 먼지쯤으로 여기며 툭 털어내는 결단과 집착이 낳은 부산물일 뿐, 결코 삶의 내용을 채워가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중년의 삶이라는 것이 사실 그렇다. 나이 든다는 건 권위에 살이 붙는 것 같지만 실은 영향력의 축소이며 실존의 결핍일 따름이다. 그래서 김훈의 상무들은 더러 돈으로 핍진한 삶을 달래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것 역시 종래 자신을 위한 자리 마련은 아니지만 말이다. 때로 사납금을 채우기도 버거운 형편없는 경제(<배웅>의 김장수)이기도 하지만, 중년의 경제력은 대체로 남은 아내와 자식에게 원망을 사지 않을 만큼만 허용된다.
“8월 중순에 명예퇴직을 신청하면 일 년 치 보너스 천오백만 원을 포기하는 대신 명예퇴직 위로금 팔천오백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 산소에서 돌아온 날 저녁에 아들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편지의 요점은 퇴직금과 주식과 아파트를 처분한 돈을 모두 가지고 LA로 와서 미국의 요양시설에 입원하라는 것이었다. (…)
출국 전에 아파트가 팔린다면 내가 미국으로 가져갈 수 있는 돈은 칠억 오천만 원쯤이었고 LA에서 주정부가 운영하는 공공요양시설에 입원하게 된다면 그 돈은 결국 아들의 몫이 될 것이었다.” (<강산무진> 중에서)
그럼에도 아내나 자식은 “왜 당신은 더 많이 남기지 않았느냐”고 푸념한다. 그럴 땐 화를 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저 조용히 삶의 뒤안길로 물러서면 그만이다. 김훈 소설 속의 상무들이 대체로 그런 모습들이다.
그런데 굳이 그 물러나는 사람의 등에 대고 구제불능의 마초라는 둥, 노회한 권위주의자라는 둥, 합리적인 삶을 살지 못한 답답한 인생이라는 둥 생뚱맞은 비난을 퍼부을 건 무엇인가. 김훈의 상무들에게는 그저 서서히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강산무진도’를 바라보며 실제의 「강산무진江山無盡」속으로 들어가는 길만 남아있을 뿐인데 말이다.
이순신으로 이어지는 상무의 의미
한국문학의 기념비적 성취라 할 <칼의 노래>와 그 외 일련의 역사소설에도 어김없이 상무가 등장한다. 무(武)를 숭상하는 이순신은 표면적으로는 ‘상무(尙武)’정신으로 무장한 듯하지만 그의 내면을 관류하는 의식은 앞서 언급한 소설 속의 상무(常務)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순신의 상무 이미지는 중의적이기까지 해서 더 넓고 더 깊다.
한편으로는 출중한 전술능력과 남다른 충(忠)의 화신이어서 되레 견제 받고 질시 받는 상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적 군왕제도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신하로서의 상무이다.
“나는 정치적 상징성(적장 가토의 목을 종묘사직의 제단에 바치기를 원하는 임금의 바람에 따르는)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한 움큼이 조선의 전부였다.(…) 나는 정치에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칼의 노래> 중에서)
그러나 어찌 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선을 넘나드는 전선에 선 장수의 고독과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임금과 그 임금의 명령에 살고 죽는 숙명을 지닌 요령부득의 신하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을 터다.
“울어지지 않는 울음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불덩어리가 내 몸 깊은 곳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방책, 아아 방책. 그때 나는 차라리 의금부 형틀에서 죽었기를 바랐다. 방책 없는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또다시 방책을 찾는다.(…)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었고,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나에게 있을 것이었다.”
이순신이라는 상무는 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죽음으로서 상무의 괴로움을 벗고자 했다 한들 그의 죽음은 국가적으로 큰 슬픔이면서 손실이었다. 동시에 그의 죽음은 죽음으로서 자유를 얻고자 했던 한 외로운 ‘상무’의 예고된 최후이기도 했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 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갔다.” (<칼의 노래> 중에서)
김훈의 최근작 <흑산>에 등장하는 다산 정약용 역시 또 다른 ‘상무’였다. 그 올곧고 개혁적인 ‘상무’의 급부상을 두려워했던 기득권세력, 즉 노론벽파의 간교한 술책이 신유박해를 불러왔음을 김훈은 아프게, 그러나 또렷한 어조로 고발한다. 그 바람에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혹은 참수 당했고 혹은 유배되었으며, 그의 조카사위 황사영 역시 배론의 토굴에서 생포되어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작가 김훈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때로 괴로워하고, 때로 신음하고 있는 상무들을 살펴보았다. ‘지금, 여기’의 상무들은 물론 ‘과거’의 상무들 역시 버거운 짐을 지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밥벌이의 지겨움>이면서 또한 살아내고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다. 내려놓자니 내려놓을 수 없고, 짊어지고 있자니 더 이상 그럴 힘도 없는 중년의 업보.
오해하지는 말자. 희생자들의 원통함과 억울함 대신 선장과 단원고 교감의 비겁 혹은 비루함에 주목하는 것은 김훈 특유의 작품구상방식이며, 세상사의 이치를 파헤치는 방식이다. ‘영웅 이순신’을 끌어내려 ‘인간 이순신, 혹은 상무 이순신’ 을 그렸던 <칼의 노래>가 그랬고, <강산무진>과 <화장>, <언니의 폐경>에서 보여주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