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에서 세월이 흘러도 영원한 떡밥이 몇가지가 있습니다. 이제는 지겨워서 안 하지만 가깝게는 어느 전투기가 더 우수하냐 부터 시작해서, 멀게는 그리스 팔랑스와 로마 레기온 중 누가 이기느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 실제 전적은 있지만 조종사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지휘관이 누구였는지에 따라 승패가 갈렸고 서로 절정기에 힘겨루기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이죠.
사실 역사에서 What if… 는 가장 재미있지만 반면에 가장 의미없는 질문입니다.
영화 명량 개봉 때문에 조선 수군과 판옥선 등에 대해 다시 정리를 했는데, 무덤 속에 들어갔던 서양 갈레온과의 승부가 다시 부활했더군요. 그래서 재미삼아서 제 개인적인 의견을 정리합니다. 다시 한 번 당부드리지만, 눈, 귀와 입을 여시는 분은 잡상식이라도 가져가실 것이고, 입만 연 분은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할 겁니다.
1. 비교대상 결정
두 전선을 제대로 비교할 수 있는 해전이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습니다. 먼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1592년부터 1598년에 벌어져 조선수군의 전선, 화기와 수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양한 전선이 사용되었지만 주력함은 판옥선이었으니까 이것으로 정해야 하겠죠?
우리는 판옥선으로 단일화되었던 반면에 16세기 말 서양은 매우 다양한 함선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바다이냐에 따라 주력함도 완전히 달랐으니까요. 임진왜란 벌어질 당시의 서양은 캐락Carrack과 갈레온Galleon이 주력함이었는데 영국과 스페인은 전함은 갈레온으로, 상선은 캐락으로 이분해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닻과 노를 함께 사용하는 갤리선은 많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그런 나라의 해군력은 강하지 않았으니까 비교에서 제외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열선을 비교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건 말이 안되죠. 훨씬 뒤의 전선을 비교할 수는 없으니까요.
몇 년 앞서서 스페인 무적함대Armada의 영국침공(1588년)이 벌어져 스페인뿐만 아니라, 영국과 포르투칼의 갈레온, 화기와 해군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고 우리 수군과 좋은 비교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영국의 해전 실력은 입증이 되었으니까 우리는 조금 더 만만한(?) 스페인 갈레온으로 상대를 정하도록 하죠.
2. 판옥선과 갈레온의 비교
두 배의 용도는 완전히 다릅니다. 판옥선은 육지와 가까운 연근해 방어용 함선이고, 갈레온은 원양 공격용 함선입니다. 그래서 판옥선은 지중해처럼 돛과 노를 동시에 사용하는 갤리선 형태에서 머무른 반면에 갈레온은 전열함까지 진화하게 됩니다. 판옥선의 체급부터 알아볼까요? 전해지는 자료가 워낙 부실해서 임진왜란 당시의 실제 크기와 높이에 대해 갑론을박이 많습니다만, 저는 최근에 복원한 판옥선의 체급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규장각 소장의 ‘각선도본’을 토대로 재현해서 통영에 전시하고 있는데 길이 41.8m, 폭 12m, 높이 9.51m에 284톤의 무게입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각선도본은 조선후기 자료로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보다 커진 형태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은 길이가 30m까지 작을 수도 있고 무게도 그만큼 가벼울 겁니다. 그리고 승선인원은 노를 젓는 적군까지 합쳐 160명 정도였습니다. 조선후기 판옥선이 커지면서 200명을 넘게 됩니다만.
이제 갈레온의 체급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제가 일부러 판옥선 중 최대 체급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영국침공 당시에 9개 전대(포르투칼 갤리선 전대는 제외)로 나누었는데 각 전대의 기함의 체급이 대단했습니다. 포르투칼 전대의 기함 산 마르틴San Martin입니다. 모형이라 크기가 짐작되지 않죠? 길이 57m, 배수량 1,000톤의 거함입니다. 선원 469명뿐만 아니라 육군도 300명 이상을 태웠습니다. 무장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영국침공 당시의 스페인 무적함대 전력입니다. 보급함대의 전력도 굉장합니다. 무적함대가 왜 영국함대에게 졌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죠. 스페인어를 전공해서 스페인 무적함대의 궤멸은 가장 나중에 정리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그럼 기함급 갈레온은 얼마 안되고 처음부터 정답이 나오기때문에 가장 일반적인 배수량 500톤 정도의 갈레온으로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산티아고Santiago와 같이 중간체급으로 말이죠. 일부러 배수량 500톤 정도를 정한 이유는 선체의 체급도 있지만 무장 수준 때문에 그렇습니다.
3. 총통과 컬버린
적당한 체급의 두 선수를 찾았으니, 서로의 펀치력을 비교해 봐야겠죠? 판옥선의 무장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고, 포수가 24명 내외, 포탄을 장전하는 화포장이 14명 이내, 활을 쏘는 사부가 22명 내외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단 여기에서는 펀치는 뒤로 미루고 킥을 중심으로만 비교해보도록 하죠.
판옥선 천자, 지자, 현자 총통을 24문 정도 무장했는데, 기록을 보면 가장 막강한 한 방인 천자총통은 화약소비가 극심해서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판옥선의 주무장은 지자와 현자총통이 되는데… 현자총통의 탄은 무게가 겨우 800g 밖에 안되기 때문에 갈레온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아래의 지자총통으로 통일하겠습니다.
다시 요약하면 판옥선은 지자총통 24문 무장입니다. 갈레온은 체급이 있다보니 막강한 포를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무시 무시한 캐논은 기함급으로 넘기기로 하고… 16세기에 사용하던 다양한 포 중에 가장 널리 사용된 컬버린Culverin, 3번을 선택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5번 팔콘Falcon이나 6번 팔코네트Falconet를 장착하기도 했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미 서양에서 뒷전으로 밀려났고 컬버린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팔콘과 컬버린 중간의 세이커Saker도 있지만 이건 영국해군이 주로 사용한 것이니까 컬버린으로 밀고 나가겠습니다.
우리의 총통이든 컬버린이든 최대 사거리는 수 km가 넘지만 그 거리에서 목표물을 맞춘다는 것은 말도 안되니까 두 포 모두 유효사거리 400m 이내로 봐야 할 겁니다. 여기에서 총통의 결정적인 약점이 2가지가 드러납니다.
– 지자총통의 포격 위력이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지자총통은 탄 무게는 약 5kg인데 반해 일반 컬버린의 탄 무게는 천자총통과 비슷한 8kg입니다. 가장 작은 컬버린이라고 해도 6.6kg으로 지자총통에 비해 훨씬 무겁습니다. 총통의 탄속에 대한 데이터가 없어서 추측할 수 밖에 없는데 대형인 컬버린의 탄속이 훨씬 큰 것으로 생각됩니다.
– 총통은 수평사격이 어려운 구조입니다.
총통은 갑판 위에서 발사하고 최대한 각도를 내린다고 해도 곡사포의 성격을 가지는 반면에, 컬버린은 어느 갑판에 놓이던 상관없이 수평에 가까운 사격으로 판옥선의 포수를 노리거나 치명적인 아래부분을 노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갈레온의 포갑판에서 포격전이 벌어질 경우, 판옥선의 포수와 사수는 포격에 노출되는 반면에 갈레온의 포수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사격을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에서는 판옥선의 높이가 왜군의 주력선인 세키부네보다 많이 높아서 노출되어도 큰 위협은 없었습니다.
4. 사수와 육군
판옥선과 갈레온 모두 원거리 포격전에서 승부를 내기 힘들 겁니다. 두 전선 모두 방어력이나 체급이 강하다 보니 400m 포격전에서는 상대의 발을 붙잡아 두는 피해 정도가 예상됩니다. 영국 해군이 무적함대를 괴롭혔던 것처럼, 판옥선이 기민한 기동을 하기 힘들기 때문에 근접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제가 정한 중간 체급의 갈레온에는 약 100명 이상의 육군이 탑승할 수 있었고 근접전이 벌어지면 약 250명의 선원까지 포함해서 350명 정도의 병력이 근접전을 펼치게 됩니다. 반면에 우리는 160명 중에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병력은 격군까지 동원한다고 해도 상대의 절반 이하가 될 겁니다.
결국 두 배의 승부는 우리의 사수와 갈레온에 탑승한 육군의 맞대결로 결정날 것입니다. 우리의 복합궁이나 사수의 실력도 대단하겠지만 (만약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대결을 가정한다면) 스페인의 육군에게는 당할 방법이 없겠죠. 스페인 육군은 당시 세계최강이었고 유럽의 온갖 전장에 동원된 최정예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왜군과는 비교도 안되는 체격과 중무장이어서 갈레온에 탑승한 육군은 근접전에서 우리 수군을 압도했을 겁니다.
이 정도가 제 결론인데, 아무래도 영국원정에서 그랬듯이 태풍과 같은 가변변수가 훨씬 큰 영향을 미칩니다. 원양에서 대결할 것이냐 아니면 근해에서 대결할 것이냐에 따라 달라지고, 해군 지휘관을 누구로 결정할 것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리고 육군을 태울 것이냐(판옥선은 방법이 없습니다만)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다른 떡밥처럼, 한 번이라도 대결이 벌어졌다면 모를까, 그냥 상상 속의 대결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결론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상상하는 것이 좋겠죠?
P.S. 영화의 영향으로 포격전 몇 번으로 배가 침몰한다는 착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판옥선과 갈레온 모두 상대의 포격으로는 침몰시키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침공에서도 전투에서 잃은 전함은 5척(나포 포함)이고 영국해군은 탄약이 떨어져서 후퇴했을 정도입니다. 근접전은 벌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