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주: 일베에서 폭식 투쟁이라는 어이없는 시위를 한 적이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지만, 표현을 하는 사람도 천박하거나 남을 해치는 자유는 삼가야겠죠.
나치 친위대, 홍위병과 크메르 루주, 모두 이렇게 마음이 병든 사람들의 집단 광기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역사를 배운다면, 집단 광기는 결국 자신에게 더욱 큰 피해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정치운명이 결정난 페르시아 원정입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페르시아 원정
기원전 53년 6월 9일, 페르시아 출신의 파르티아(Parthia) 기마부대가 로마 보병부대를 카레(Carrhae)로 끌어들여 포위했다. 평원을 날렵하게 질주하며 화살을 날려 로마군 방패를 꿰뚫었다. 일방적으로 진행된 이 전투에서 3만 명의 로마군단은 완전히 사라졌다. 전사자 중에는 로마 1차 삼두정치의 마르쿠스 리시니우스 크라수스도 있었다.
로마는 페르시아 왕국에 대한 보복을 간절히 원했지만 국내의 정치상황과 내전이 더 위급했다. 기원전 41년, 페르시아 원정에 나서기로 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병력을 모아 동쪽으로 출발했다. 그는 동부왕국을 거치면서 왕들을 만나 자금과 병력을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그 중에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도 있었다. 28살이었던 그녀는, 플루타르크의 말에 따르면 외모와 품성 모두 최절정기였다. 두 사람은 길리기아의 타르수스에서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안토니우스의 오판과 후퇴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알렉산드리아 궁전에서 겨울을 보냈다. 파르티아 복수계획은 그렇게 미뤄졌고 병력을 시리아 총독 루시우스 데시디우스 삭사에게 맡겼다.
그가 이집트에서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파르티아 왕세자 파코루스와 로마 망명객 라비에누스의 군대가 선제공격에 나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시리아를 침공했다. 라비에누스의 아버지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도와 골족과 싸웠지만 나중에 카이사르를 버리고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편을 들었었다. 라이베누스는 카이사르의 정적인 마르쿠스 브루투스 와 카이우스 롱기누스 진영에 가담했고 파르티아와의 협상에 나섰었다.
공화파가 몰락하자 그는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의 관대한 제안을 뿌리치고 페르시아에 남았다. 이제 그는 파르티아군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와 파코루스는 진군로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쓸어버리고 지중해 안티오크에 이르렀다. 알렉산드르 대왕이 300년 전에 점령한 후 처음으로 페르시아군이 안티오크에 나타난 것이었다.
기원전 40년 3월,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군의 침공을 보고 받았고 즉시 페니키아 해안의 티레로 달려갔다. 도착해서 받은 보고는 완전히 절망적이었다. 파르티아군은 주변 동맹국을 굴복시켰고 시리아에 남겨둔 로마군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편에서 자신에게 대항했던 공화파였다. 시리아 주둔군은 공화파 라비에누스를 따라 페르시아에 합류하거나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시리아를 내줬다. 충성스러운 총독 삭사만이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사했다.
파르티아군은 시리아를 점령한 후에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라비에누스가 절반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향했고 나머지 절반은 파코루스와 함께 남진해서 유대왕국을 점령하고 안티고누스를 왕으로 앉혔다.
동쪽의 절망적인 소식과 함께, 아내 풀비아에 대한 소식도 들어왔다. 로마에서 안토니우스 대신에 옥타비아누스에게 대항했던 그녀는 패해 도시에서 도망쳐나와야 했다. 한때 동전에 얼굴을 새긴 최초의 여성일 정도로 강력했던 그녀는 남편에게서 더 큰 힘과 명성을 만들어내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남편은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 정신이 없다는 치욕스러운 소식이 들려왔고 남편에게 가는 여행길에 죽고 말았다.
반등의 기회가 찾아오다
이제 안토니우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남았다. 동쪽에 남아 파르티아군을 상대하거나 로마로 돌아가서 무너져내린 기반을 되찾아야 했다. 그는 본국 상황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귀향하기 전에 능력있는 지휘관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진화를 맡겼다. 나중에 탁월한 선택으로 증명되었다.
안토니우스는 급히 돌아왔지만 10월이 되어서야 옥타비아누스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책임을 죽은 아내 풀비아에게 돌리면서 정적이자 동맹인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개선에 최선을 다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에게 이복누나를 새신부로 추천했고 안토니우스는 동맹회복을 위해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제 안토니우스는 보다 실질적인 동맹을 원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시실리, 사르디니아와 서부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는 폼페이우스(카이사르의 정적 폼페이우스의 아들)를 처리해야 했고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반드시 필요했다. 안토니우스는 120척의 함선을 빌려주는 대신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모병한 2만 명을 지원받기로 했다. 그렇지만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실제로 전달된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정작 로마에 있는 동안 동부에서 희소식을 들었다. 벤티디우스는 11개 군단을 모병했고 라비에누스의 소아시아 침공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로마군은 15년 전에 크라수스가 겪었던 참패를 잊지 않고 있었고 어떻게 하면 궁기병의 강력한 화살세례를 막아낼 것인지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다.
먼저 로마병사의 표준 나무방패를 보강했다. 이전의 방패는 파르티아 화살에 너무 쉽게 뚫렸었다. 그리고 궁술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했다. 파르티아 궁기병이 사용하는 복합궁을 사용하는 궁병을 대거 고용하거나 징집했다.
마지막으로 투석병도 대거 동원했다.
다빗과 골리앗의 전설적인 대결 훨씬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원시무기는 집단으로 사용하면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고 큰 비용도 들지 않았다. 단순한 가죽끈만 있으면 무기는 어디에나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다빗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단 한 방으로 적을 쓰러트리기는 매우 힘들었지만 수천 개의 돌팔매가 한꺼번에 쏟아지면 적의 궁병이나 기병의 기세를 꺾을 수 있었다. 특히 (등자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적의 말을 놀라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군은 거북대형으로 수비전술을 바꿨다. 파르티아 궁기병이 로마군 대열을 위협하면, 로마군은 방패를 겹쳐들고 화살을 막았다.
벤티디우스는 길리기아에 병력을 집결시킨 후에 소아시아 접경의 산악협로로 기병을 보냈다. 만약 협로를 장악한다면 라비에누스의 파르티아군의 배후를 끊을 수 있었다. 전과에 눈이 멀어 판단력이 흐렸던 크라수스와 달리, 벤티디우스는 신속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로마군에 유리한 지형을 전장을 선택했다. 평지는 적의 기병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언덕이 이어진 지형을 골라 기병의 돌파력을 상쇄시킬 생각이었다.
※ 이 글은 「로마의 무덤, 파르티아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