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해서 강조하듯이 역사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어느 한 사건을 두고 이해당사국의 시각은 완전히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잉카제국의 저항도 페루의 위대한 저항이라는 시각과 스페인의 위대한 정복이라는 시각이 상반됩니다. 제 3세계의 다양한 시각까지 합쳐지면 동전의 양면이 아니라, 6면 퍼즐처럼 아주 복잡해집니다.
여러분이 어떤 시각을 선택하던 다른 시각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시각이지 틀린 시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지배를 당한, 수탈을 당한 아픔이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정복보다는 저항의 시각을 가졌으면 합니다.
용어선택이 바로 시각의 선택을 의미하기 때문에 난감한데, 저는 객관적인 자료정리를 위해 원 자료의 용어 그래도 반란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봉기가 더 어울려서 봉기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중남미 문명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스텍과 잉카 문명을 혼동하기 쉽습니다. 아스텍은 멕시코 남부, 잉카는 페루와 칠레의 제국이었습니다. 사라진 문명 마야 문명은 아스텍 오른쪽의 멕시코 남동부와 과테말라, 온두라스 지역에 존재하다가 멸망했기 때문에 스페인의 정복과 상관이 없습니다.
아래 지도는 잉카 제국의 확장모습입니다.
콩키스타도르의 잉카 정복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와 친인척의 스페인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가 파나마지역에서 내려와 1526년에 잉카제국에 도착했다. 그들이 찾던 엘도라도El dorado(황금도시)에 가장 근접한 제국이었고 피사로는 스페인으로 돌아가 제국을 점령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았다.
그는 1532년에 돌아왔을 당시의 잉카제국은, 후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Atahualpa의 내전과 중미(스페인 원정대가 전한)에서 번진 홍역으로 국력이 크게 약해진 상태였다. 피사로는 겨우 168명, 대포 1문과 27마리의 말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력으로 잉카제국을 위협할 상황이 아니었다.
스페인군은 잉카제국에 합병된 주변 원주민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이고, 내전에서 막 승리를 거둔 아타우알파를 만났는데 그는 8만 명의 병력을 뒤에 남기고 소수의 수행원만 대동한 상태였다. 스페인군의 요구가 제대로 통역되지 않아서 양측이 옥신각신하는 실갱이가 벌어졌고 스페인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새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아타우알파는 스페인군의 목적이 황금이라는 것을 알고 엄청난 양의 금은을 제시했지만 스페인군은 약속을 저버리고 그를 석방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타우알파에게 누명을 씌우고 1533년 8월에 살해하고 동생인 망코 잉카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웠다.
망코 잉카는 스페인 정복자에게 최선을 다해 협력했지만 또 다른 콩키타도르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를 자신이 가지겠다고 나서면서 잉카제국 그리고 스페인군 내부에서 불화가 생겼다. 망코 잉카는 스페인군에게 당했던 온갖 수모를 복수하기 위해 그리고 잉카제국을 되찾기 위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망코의 봉기
망코Manco(그림 참조)는 황제에 오른 후 처음으로 1536년에 스페인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 모두 하나로 뭉쳐 전국에 알려 20일 후에 여기에 오게 하라. 수염기른 자가 알게 해서는 안된다. 퀴소 유판퀴Quizo Yupanqui 장군을 리마Lima로 보내 우리가 여기에서 스페인인을 공격하는 날, 그가 그곳에 있는 자들(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을 공격할 것이다. 그리고 양쪽의 군대가 합쳐서 그들을 전부 죽여 우리를 괴롭혀왔던 악몽을 끝낼 것이다. 이 땅에 기독교인은 한 명도 살려두지 않겠다.”
쿠스코Cuzco에 있던 에르난도 피사로Hernando Pizzaro도 회의를 소집했다. 에르난도는 망코 잉카가 자신을 기만했고 반란을 조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고가 계속 들어왔다. 에르난도는 북쪽으로 겨우 24km 떨어진 유카이 계곡에 대규모 원주민 군대가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제는 칼카Calca에 사령부를 차리고 원주민 군대의 소집을 지시하고 있다고 했다.
에르난도는 망코와 비약 우무Villac Umu의 이탈을 허락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절대절명의 순간이기 때문에 후회하거나 질책할 시간도 부족했다. 우선 그들을 집결을 막고 황제를 다시 붙잡아야 했다. 에르난도는 원주민 군대의 정확한 움직임을 알아내려고 23살의 동생 후안Juan에게 70명의 기병을 맡겨 칼카로 보냈다. 후안은 그 일대를 정찰하고 망코 잉카를 찾아 체포하고 발견하는 모든 원주민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16km 정도 달린 정찰대는 계곡 아래의 푸른 유카이강 너머를 바라보았다. 평소에 말을 풀어 먹이던 평원의 모습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푸른 계곡은 이제 잉카 병사의 베이지 색으로 완전히 변해 있었다. 마치 장난감 병정을 땅에 쏟아 놓은 것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망코 잉카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사실이었다.
후안 피사로는 기병을 이끌고 용감하게 계곡 아래로 내려가 칼카로 향했다. 반대편 강변의 원주민 전사가 소리를 지르며 스페인군을 자극했다. 말이 물을 가르며 나아가는 동안 돌팔매가 날아들며 바람을 가르거나 갑옷을 때렸다. 스페인군은 반대편 강변에 오르자 마자 투석병을 창이나 칼로 베었다. 간단한 전투 후에 스페인군은 칼카로 말을 몰고 들어가 집마다 뒤지며 망코 잉카를 찾았지만 망코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다음 3일 동안, 스페인군은 칼카에 남아 다음 작전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였고 잉카군은 언덕 위에 포진한 채로 스페인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잉카군의 엄청난 숫자를 생각하면 공격하지 않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4일째가 되어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쿠스코에서 온 스페인 병사가 에르난도의 전갈을 가지고 왔다. 후안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쿠스코로 달려가야 했다. 잉카군의 목표는 쿠스코였다.
기병은 스페인군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고 이들이 없다면 10마리의 말과 함께 쿠스코에 남겨진 나머지 126명은 잉카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기병대는 포위망을 뚫고 바로 도시로 들어가 본대와 합류했지만 86명의 기병이 더해졌다고 해도 양쪽의 병력차이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스페인군이나 현지 스파이 모두 망코 잉카의 반란시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쿠스코에 갇힌 스페인군의 총 병력은 196명, 거기에 약간의 아프리카 노예와 500명의 원주민 동맹군이 전부였다. 망코는 병력을 계속 모았고 에르난도는 주변 언덕으로 기병정찰을 여러 번 보내 잉카군의 전력을 파악했다. 그 때마다 숫자의 우위를 믿은 잉카군이 물러서지 않고 돌팔매를 날렸다.
한 번은 에르난도와 8명의 병사가 포위당해 프란시스코 메히아가 끌려가 말과 함께 목이 잘리는 일도 벌어졌다.
비약 우무는 즉시 스페인군을 공격하자고 재촉했지만 황제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군과함께 싸웠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무서운 화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최대한 병력을 모아 스페인군의 화승총이나 기병도 아무 힘도 못쓸 정도의 전력차이를 만들고 싶었다.
일단 쿠스코의 스페인군을 모두 죽이면 리마의 프란시스코 피사로를 공격해 페루 중앙을 해방시킬 생각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잉카군은 10~20만 명까지 불어났다. 그렇지만 잉카군의 절대 다수는 농부나 목동으로 황제의 명령을 받고 달려온 비정규군이었고 실제 정규군은 얼마 되지 않았다.
병사들은 정글 활, 새총, 단창, 도끼와 곤봉을 들고 왔다. 투척 무기를 든 병사들이 서면 백병전 무기를 든 병사들이 그 뒤에 밀집대형으로 섰다.
(잉카 전사의 무장인데… 스페인군의 중무장과 비교하면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시내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르나베 코보 신부의 기록을 보자.
그들의 주무기인 새총은 말, 심지어 기병까지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의 큰 돌을 날렸다. 실제로 그 위력은 화승총과 맞먹는다. 20m 밖에서 한 병사의 오래된 칼을 두 동강내는 것도 본 적이 있다. 원주민이 계속 도착했고 쿠스코 포위망은 두터워지다 못해 이제는 쿠스코 바로 외곽까지 진을 칠 정도로 늘어났다. 잉카군은 밤낮으로 고함을 치며 스페인군이 제대로 잠자지 못하게 방해했다.
총공격
1536년 5월 6일, 망코는 총공격을 명령했다. 원주민은 언덕 아래의 도시를 향해 창, 돌, 화살을 마구 날렸다.
거리에 있던 스페인 병사는 급히 몸을 숨겼다. 엄호지원을 받은 백병전 병사는 밀집대형으로 천천히 도시로 들어가 중앙광장으로 향했다.
전사 대부분은 기이한 깃털을 꽂은 악령 헬멧을 썼다. 4,000km 길이의 제국을 정복한 전사군단이 이제는 잉카제국의 수도를 되찾기 위해 돌아왔다. 망코의 전략은 간단했다. 먼저 스페인군을 중앙으로 몰아넣고 압도적인 병력으로 동시에 공격해서 전멸시키는 전략이었다.
사방에서 원주민이 다가오자 스페인군은 점점 줄어드는 그물망에 걸린 것을 알았다. 화살과 돌팔매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사크사이와만Saqsaywaman 요새(사진 참조)를 점령한 비약 우무는 2시간 가리에 있는 칼카의 망코에게 계속 전령을 보내 의견을 조율했다.
다른 곳에 있던 스페인군도 잉카군의 공격이 줄어든 틈을 타 중앙광장으로 후퇴했다. 잉카군의 전략이 포위해서 압박을 가하는 것이라면 스페인군의 전략은 중앙광장의 순투르 후아시Suntur Huasi와 하툰 칸차Hatun Cancha 석조건물에서 버티는 것이었다.
에르난도 피사로와 에르난 폰세 데 레온이 한 건물씩 차지하고 지휘를 맡았다. 스페인군이 두 건물 안으로 몸을 숨기자 잉카군의 투척무기가 비오듯이 쏟아졌다.
어두운 실내에서 병사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며 구원을 빌었다. 에르난도 피사로는 시급하게 다음 행동을 준비해야 했다. 망코는 건물 안에서 버티는 스페인군을 몰아내기 위해 도시의 건물 지붕에 불을 질렀다. 먼저 외곽의 건물에 불을 지르고는 거기에 돌을 빨갛게 달궈 도시의 건물지붕으로 날려보냈다. 하툰 칸차 지붕에도 불이 붙었고 기도를 올리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위를 쳐다봤다.
이제부터는 서로 다른 기록이 남아있다. 어떤 자료는 쿠스코 전체가 불탔지만 하툰 칸차 지붕은 불이 꺼졌다고 했는데 미리 지붕에 올려 보냈던 아프리카 노예가 날아오는 투사무기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불을 껐을 것이다.
이제 반격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안에서 죽느니 나가는 것이 나아 보였다. 돌덩이가 무수하게 쏟아졌지만 인디언 동맹과 함께 아래 거리의 적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불붙은 지붕이 무너지자, 원주민 전사는 이제 벽위로 올라가 스페인군의 기병공격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 전사도 전투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스페인군에게 맞섰다. 예전처럼 중장갑의 기병을 보기만 해도 도망치는 일은 없었다.
하루 종일 도시 전체는 연기를 내뿜었고 거리에서는 격전이 벌어졌다. 좁은 거리에서는 잉카군이 가장 의지하는 숫자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스페인군의 역습
그리고 스페인군은 조금만 더 버티면 혼란을 수습할 귀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잉카군은 태양신 인티Inti(그림 참조)가 언덕 아래로 사라지면 잉카군도 뒤로 물러나 그날 하루를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망코의 군대는 중앙 광장부근까지 장악한 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튿날 날이 새자마자 먼 언덕부터 시작해서 도심까지 수만 명의 전사가 고함을 치고 악기를 두드리며 기세를 올렸다. 스페인 기병과 보병은 아프리카 노예와 원주민 동맹군과 함께 중앙 광장에서 이들을 기다렸다. 원주민 전사는 집 벽을 타고 접근하며 아래에 있는 적에게 돌덩이를 날렸다. 아래의 좁은 거리에서는 양쪽이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고 있었다.
스페인군은 기병돌격이 최후의 전술이었다. 기병이 돌격하며 잉카군의 대열을 무너트리면 보병이 뒤따라가 수많은 병사를 베고 찔러서 죽였고 거리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거리에 시체가 쌓이고 잉카군이 장애물을 설치하면서 기병의 파괴력도 크게 줄어들었다. 23살의 알폰소 데 토로는, 원주민 전사가 쓰러트린 벽에 깔려 넘어졌다가 급히 달려온 동료의 구원을 받고 간신히 살아 돌아갔다.
그리고 잉카군은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 말고도 수로를 무너트려 거리에 물을 채워 기병의 발목을 잡았다. 볼라Bola라는 덫을 던져서 정말로 기병의 발목을 잡아 묶기도 했다.
압도적인 격차와 좌절
잉카군의 숫자와 기세는 대단했지만 스페인 병사 하나를 죽이려면 비교도 안될 정도의 원주민 전사가 죽어야 했다. 스페인군의 중장갑, 말과 날카로운 철제 무기는 원주민 전사의 무기로는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잉카군은 계속 달려들었고 잉카 제국의 상징인 쿠스코의 거리는 시체로 가득 찼다.
다시 하루를 번 스페인군은 사크사이와만 요새를 야습해서 잉카군의 지휘부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방어거점으로 삼기로 했다. 에르난데스와 스페인군은 사다리를 가지고 공터를 안전하게 건너 벽에 다가섰다. 잉카 경비병은 무방비로 기습을 당했고 첫 번째 벽을 너무나도 쉽게 내주었다.
적의 기습을 알게 된 잉카군이 잠에서 깨어나 돌덩이를 던져댔지만 스페인군은 계속 사다리를 올려가며 다음 벽을 공격했다. 뒤로 물러나던 잉카군도 마지막 벽인 세 번째까지 몰리자 결국 백병전을 벌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날이 샐 때까지 마지막 보루를 내주지 않았다.
사크사이와만 요새는 서로가 포위하는 희한한 광경이 벌어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벽을 장악한 스페인군은 다시 외곽에 몰려든 잉카군에게 포위되었다. 그렇지만 세 번째 벽에 몰린 잉카군과 지휘부의 상황이 더 어려웠다. 그들은 이제 돌이나 화살이 남지 않았고 먹을 물도 없었다.
요새에 갇힌 비약 우무와 잉카군 지휘관은 이제 스페인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수 밖에 없었는데 스페인군은 이들을 절대로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에르난도 피사로는 나머지 벽의 3개 탑을 동시에 공격했고 궁지에 몰린 잉카군은 학살을 당했다.
칼카의 망코가 증원군을 보내 과감한 공격을 퍼부었다면 스페인군은 더 이상 방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크사이와만 요새의 예기치 못한 급반전에 기세를 잃은 잉카군은 곧이어 칠레원정에서 돌아온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공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다.
잉카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던 망코는 오지의 빌카밤바 계곡에 몸을 숨기고 스페인군의 추격을 막아내기 급급했다. 스페인군은 피사로 추종자와 알마그로 추종자 간의 내전이 벌어져 두 사람 모두 목숨을 잃었다.
망코는 스페인군의 내전에 힘입어 두 번째 봉기를 지시했는데 이번에는 지난 번과 같은 대회전을 피하고 각 지역의 스페인 주둔군을 격리시켜 공격해 성공을 거뒀다. 그렇지만 스페인군이 곧바로 대규모 원정군을 꾸리자 망코는 다시 빌카밤바 계곡으로 도망쳤다.
만약 망코가 자신의 목숨을 각오하고 쿠스코를 장악하고 피사로 군대를 전멸시켰다면 잉카 제국은 스페인군의 침입을 해안지대로 축소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망코의 첫 번째 반란은 2~4천 명을 잃고 35명의 스페인군을 죽이는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