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9일 작성된 기사입니다.
서준식, 1948년생으로 올해 66세가 되었다. 1971년 김대중-박정희 후보가 맞붙은 대통령 선거 직전 대형 간첩 사건이 여럿 터졌다. 전형적인 간첩 조작이었다. 여러 사건 중의 하나가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다. 형제를 한꺼번에 구속했다. 서승과 서준식이었다. 서승은 서울대 사회학과에 서준식은 서울대 법대에 재학중이었다. 서준식의 당시 나이는 23세. 조선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고 조국에 와서 조국을 배우며 공부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잘못이라면, 형을 따라 북한에 다녀온 것뿐이었다.
조국을 배우러 온 재일교포 청년
서준식은 비록 한국에 와서 공부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반쪽 조국이 어떻게 사는지도 보고 싶었다. 1970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형과 함께 일주일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그 대가는 하루에 1년씩 한국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거였다. 간첩단 사건으로 요란하게 떠들었지만 정작 간첩 행위라 할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가혹한 고문이 반복되었고, 고문을 견디다 못한 형 서승은 분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래도 간첩행위라 할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흔한 가석방도 없었다. 7년을 꼬박 갇혔고, 만기 출소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회안전법으로 다시 기한을 연장했다. 사회안전법 폐지를 위해, 교도소내 처우 개선을 위해 서준식은 싸우고 또 싸웠다. 반복적으로 단식 투쟁을 했고, 그럴수록 석방은 더 어려워보였다.
원래 받은 형기는 7년이었지만 10년을 더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서준식은 17년, 형 서승은 19년이 지나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것도 1987년 6월 항쟁 덕분이었다.
서준식은 최초의 비전향 장기수였다. 전향과 비전향의 차이는 하늘만큼 크지만, 어쩌면 종이 한 장 만큼일 수도 있다. 우연과 필연이 겹쳐서 전향하지 않을 수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 이돈명 변호사 같은 분들이 서준식의 석방을 위해 힘을 써주었다. 이미 형을 마친 지 10년이 지난 사람을 더 이상 가둬둘 수는 없었다.
출소하자마자 서준식은 자신을 가뒀던 사회안전법의 폐지를 위해 투쟁했다.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마침내 1989년 사회안전법이 전면적으로 폐지되었다.
인권운동을 시작하다
서준식은 몸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다시 싸움판에 나섰다. 당시 최대 재야단체인 전민련에서 활동했다. 처음으로 인권운동이란 개념을 세우기 시작했다.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 명동성당에서 강기훈과 함께 먹고 자면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다시 수감된 것이다.
서준식은 두 번째 감옥에서 나온 다음에 새로운 운동을 구상했다. 본격적으로 인권운동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조그만 연구실 같은 것에서 시작했다. 젊은 법학자들이 모인 민주주의법학연구회가 도움을 주었다. 인권운동사랑방이란 단체를 만들었다. 1993년의 일이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유명한 팩스 신문 ‘인권하루소식’을 발행했고, 다양한 새로운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마침 1993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세계인권대회가 열렸다. 한국에서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들 문제에만 골몰하던 한국의 인권운동가들은 이 대회에 참석해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었다. 우리 문제도 심각하지만 동 티모르처럼 주민의 1/3이 몰살된 비극도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인권운동이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1990년 한국의 대표적 인권단체로, 그 활약은 정말 눈부신 것이었다. 인권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 중심에 바로 서준식이 있었다. 서준식은 인권운동의 활동가였으며, 많은 경우 선생이었고, 멘토이기도 했다.
세 번째 투옥되다
서준식의 고난은 계속되었다. 1997년에는 인권영화제에서 제주 4.3을 다룬 <레드헌트>라는 영화를 상영했다고 구속되기도 했다. 이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영화였다. 부산에서 틀면 문제가 없는데 서준식이 틀면 문제였다. 서준식의 활동에 대한 일종의 괘씸죄였다.
서준식은 감옥에 갇혀서도 인권운동을 했다. 미결수 수의 착용 문제를 최초로 제기했다.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수사를 받을 때나 법원에 출두할 때 관행처럼 입어야 했던 수의 착용이 헌법 위반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언제나 그는 고민했고 싸웠다. 싸워서 이길 줄도 알았다.
서준식의 인권운동은 매우 광범위하게 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93년부터 서준식이 인권운동사랑방 대표를 그만 둔 2001년까지 인권운동사랑방은 한국 인권운동의 중심이었고 마중물이었다. 서준식은 2001년 인권운동사랑방 대표를 그만 둔 뒤 이 단체 부설 인권운동연구소의 소장으로 2003년 9월까지 활동했다.
그는 세상과도 이별을 고했다. 스스로 잊혀지고 싶다고 했다. 독일 보쿰에서 머물다, 귀국해서는 모 지역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지인들과의 연락도 끊었고, 그저 평범한 한사람의 시민으로만 살고 있다.
서준식은 나에게도 거의 유일한 선배였다. 나도 1992년 새롭게 인권운동을 시작했다. 기댈 곳이 없었다. 온통 새로운 것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하는 시절이었다. 운 좋게 우리는 김영삼-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이를테면 역사의 진보를 믿을만하던 시기에 의기투합을 했고, 여러 인권문제들을 쟁점화시켰고, 또 일부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서준식의 인권운동 마지막 시기에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다. 서준식은 노무현의 당선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젠 감옥갈 일은 없게 되었다고 가족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내가 1999년 새로운 인권단체를 만들 때, 서준식은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였다. 아무 것도 없던 내가 새로운 인권단체 설립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서준식의 도움이었다. 그냥 말로만 도왔던 것은 아니었다. 막 사무실을 내려고 준비할 때, 그는 30만 엔을 건넸다. 컴퓨터 몇 대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고, 인권연대가 받은 첫 번째 후원금이었다.
서준식이 말하는 근육의 운동
서준식의 인권운동은 근육의 운동이었다. 그가 1997년에 쓴 ‘우리 모두 감옥으로 가자’는 칼럼은 운동가의 글쓰기 전형을 보여준다.
“옳은 말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러나 옳은 말이 힘을 지니고 주장되기 위하여는 그 말을 떠받쳐 주고 그 말의 옳음을 실감케 하는 육체적 근거가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엔가 ‘실재’해야 한다.
나는 이 시대에 옳은 말은 무성하되 옳음을 위하여 기꺼이 핍박받으려는 ‘몸’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스스로 철저히 핍박받는 몸이 되지 못하고 있음이 이 시대를 사는 이 인권운동가의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서준식은 불심검문에 대해 말했다. 전경들이 길거리에서 노골적인 불법을 저지르는데도 학생들은 양처럼 온순하기만 했단다. 빽! 소리라도 한번 질러보고 경찰서로 끌려가는 것이 그리도 겁나냐고 질타했다.
“우리가 모두 주민등록증 제시를 거부하고 경찰에 끌려가는 일을 끈질기게 되풀이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영원히 이런 상태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감옥에 가자. 친구랑 함께, 애인이랑 함께,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세 번도 열 번도, 드디어 악법의 씨가 마를 때까지!”라고 외쳤다.
어떤 사람에게는 서준식의 이런 주장이 과격하게 느껴질 것이다. 맞다. 세련된 사람들, 뭐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마지막 월세와 공과금까지 다 마련해놓고는 “미안하다”며 목숨을 끊은 송파의 세 모녀처럼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이 없는 사람들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서준식의 말은 사실 간단하다. 악법에는 불복종으로 투쟁하라는 거다. 경찰관을 공격하라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괴롭힘을 당한만큼 상대를 괴롭히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고분고분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거다. 아니라면, 아니라고 정확히 말해야 하고, 그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있다면 기꺼이 그 고통을 감수하자는 거다.
서준식의 이런 호소는 사실 익숙한 거다. 우리가 지금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존경하는 간디, 마틴 루터 킹, 그리고 넬슨 만델라가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왜 간디, 킹, 만델라의 이야기에는 공감하고 서준식의 이야기에는 공감하지 못하는 걸까. 그건 서준식의 목소리가 ‘지금 여기’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이해와 무관한 영국제국주의, 미국의 인종차별,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는 얼마든지 비난할 수 있지만 박근혜와 이건희, 그리고 구체적인 폭력에는 애써 침묵하라는 거다.
또한 저 멀리 있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근사해보이지만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동시대 사람들은 과소평가되는 경향도 많다.
신념을 지닌 운동
서준식은 입이 아닌, 근육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글이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은 위험한 미신일 수 있다고 했다. 결국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이나 글쟁이들이 만들어내는 미신일 뿐이라는 거다. “그들은 점잖게 말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본적으로 폭력의 원리가 관철되어 있으며, 글로써 사회가 변할 만큼, 이 사회는 아직 신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는 거다.
실제로 서준식은 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해 냉랭했다. 서울대 법대를 다녔고 친구와 후배들 중에 법조인이 많았지만, 변호사들이 운동의 중심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들의 역할은 다만 실무적인 역할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서준식의 걱정과 달리 거의 대부분은 시민사회운동, 인권운동은 지식인 중심이 되어 버렸다. 전업 활동가의 노력은 지식인들의 노력에 비해 하위 개념으로 치부되었다. 나라도 중심을 지키며 살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 신념을 지닌 운동가들의 존재는 갈수록 귀하다.
서준식은 정부 보조와 기업 보조를 받는 운동을 극도로 경계했다. 운동이 체제내화 되고, 운동이 그저 직업 운동가의 밥벌이 수단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하지만 돈 문제에서 자유로운 운동가는 별로 없다. 슬프다. 단체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 문제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자본주의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주는 돈, 기업이 주는 돈을 사양해야 한다. 그래야 운동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정부나 기업에서 돈을 받지 않는 단체, 오로지 시민의 자발적 참여만으로 꾸려가는 단체는 별로 없다.
일부 인권단체들은 몇 년 동안 계속해서 가장 중요한 역량을 오로지 모금활동에만 집중하기도 했다. 물론 돈이 있어야 활동도 가능하겠지만, 오로지 돈 이야기만 반복해서 하는 건 문제가 있다. 중요한 건 무엇을 위한 돈이냐는 거다. 성찰이 없어 보여 아쉽기만 하다.
서준식은 “쉽게 눈에 들어오는 지름길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서준식은 이런 점에서 강인한 혁명가 같기도 하다. 성명서 한 장을 쓰기 위해 밤샘을 하는 모습에서는 치열함과 끝없이 노력하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개인 서준식은 매일처럼 이른 아침에 딸들의 공부를 챙겨주고, 후배들과도 격의 없이 잘 어울리고, 가끔 잘 삐지기도 하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잘난 사람들에게는 냉정했지만, 운동을 하고 싶어 하는 후배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했다.
조용히 살고 싶다는 서준식
그 서준식이 지금, 이곳에 없다. 어디서도 서준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2005년에 서씨 형제 사건에 대한 외교문서가 공개되었을 때, 연합뉴스와 했던 인터뷰가 그의 마지막 사회적 발언이었다.
“사회활동은 이제 은퇴했다. 아픔이 많았고 힘든 인생이다.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냥 조용히 살고 싶다.”
“인권운동과 사회활동에서 은퇴한 지가 1년이 됐다. 요즘은 누구도 안 만나고 있다. 앞으로도 다시 사회적인 활동은 안 할 것.”
“힘든 인생이었고 지금도 힘든 인생이다. 개인이 사는 것, 먹고 사는 것도 힘들다.”
“요즘은 그냥 집에서 딸들과 함께 지낸다. 앞으로 아무 계획이 없다. 이대로 한 시민으로서 조용히 살 계획.”
그의 심경을 알 수 있는 단서는 또 있다. 2008년 발행한 <서준식의 옥중서한>의 머리말에 쓴 것이다.
“독일로 ‘피난’ 온 지 2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한국 지인들과 소통을 끊고 과거와 거의 완벽하게 단절된 삶을 살아왔다. 나에게는 다만 사춘기 딸들을 위해 몸을 바친다는 목표 말고는 아무런 전망도 없었다. 전망이 없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때로 외로움이 살을 저미는 듯 아프지만 이런 타향의 외로움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만큼 떠나오기 전 한국은 나에게 고통의 바다 그 자체였다. 4년 전 나의 삶의 두 기둥, 즉 ‘운동’과 ‘가정’은 한꺼번에 무너졌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 무너진 폐허에 선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깊은 상처는 아물 줄 모른다.”
인권운동사랑방에 대해서는 “모양새는 결별이지만 사실상 쫓겨난 것”이라고 했고, 그 낭패감은 “지금도 치명적”이라고 했다.
그가 없는 인권운동도 이제 10년이 지났다. 폭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폭력을 넘어서는 싸움도 여전하다. 하지만, 그가 외쳤던 근육의 운동 대신, 온통 말의 운동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돈 문제에 엄격하자던 그의 주장도 여러 가지 이유를 내건 실용주의 때문에 저 만치 밀려나 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입의 운동이 아닌 몸의 운동이 더욱 절실한 지금, 세상은 서준식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원문 : 시사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