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고 열심히 읽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책의 내용을 제대로 소화해 의식의 자양분으로 삼는 사람은 드물다.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모르되, 책을 통해 진정한 교양을 쌓기 위해서라면 다독만이 능사는 아니다. 많이 읽는 것보다 깊게 읽고, 사색을 통해 책에서 얻은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독을 경계하고 사색을 늘리라”라는 쇼펜하우어의 일침은 그런 의미다.
책 좋아하는 사람치고 ‘책에 대한 책’ 한두 권쯤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책에 대한 책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다. 특정 책을 소재로 한 소설, 책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책, 책벌레와 도서수집광의 이야기를 다룬 픽션과 논픽션, 그리고 서평집. 근래 꾸준하게 나오고 있는 게 서평집이다. 형식도 다양하고, 내용도 천차만별이고, 수준도 천양지차지만 아무튼 서평집은 책에 대한 정보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길라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책에 대한 책’이 꾸준하게 나오는 이유
특히 당대 지식리더들의 서평집은 교양을 쌓으려는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곤 한다. 거기엔 그들의 책읽기 방식과 과정, 독서목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리더들의 사유의 정수가 담긴 서평집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서평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의 책에선 그러한 기대를 충족하기 힘들다. 그들의 책은 너절한 재탕원고의 조합일 가능성이 큰 데다, 일정한 맥락을 갖지 못한 채 잡다한 감상의 단순나열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의미에서 필명을 떨치는 철학자들의 서평집은 저자들의 책에 대한 남다른 안목과 깊이 있는 사유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강유원의 『주제』와 이정우의 『탐독』이 그것인데, 각각의 책은 새삼 책읽기와 사유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서평, 지식리더들의 경우
강유원의 서평집들은 우선 제목이 압권이다. 『책』과 『주제』, 단순해 보이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듯한 명료한 제목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제목만 봐도 저자가 얼마나 대단한 직설화법의 소유자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주제』는 저자의 거침없는 비판의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때로 그 ‘거침없음’이 걷잡을 수 없는 ‘거칠음’으로 변질되는 게 흠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서문’의 첫 문장부터 대단히 도발적이다.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책’이 몇 권 있다. 아니 다섯 권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 『오디세이아』, 『오이디푸스 왕』, 『신곡』과 『정신현상학』 (…) 책은 ‘자기’를 찾는 과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과정에서 찾아낸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주어야 하며, 이러한 보여줌과 드러냄의 주체는 그러한 행위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인,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통일된 자기여야 하고, 이 모든 것을 완결된 서술 구조 속에서 제시하여야만 하거니와…”(서문 중에서)
자신감인가, 무모함인가? 둘 다일 것이다. 서문에서부터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강유원의 자신감 혹은 무모함이 한편 부럽고, 한편 의아하다. 세상에 그 어떤 이가 ‘세상에는 다섯 권의 책이 있다’고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 강조어법으로 이해하면 그만이지만, 그럼에도 오해의 여지는 남는다. ‘세상의 모든 책을 알고 있다’는 자신감 혹은 자만심의 발로이거나, ‘단지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합당한 책은 이것들 뿐이다’고 단언하는 무모함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강유원의 과격성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특히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의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에 대한 언설도 과하고 억지스런 측면이 있다.
“다치바나가 행하는 것은 분명 지적인 탐구이다. (…) 그러한 탐구가 그의 내면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켰고, 삶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 그가 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다 해도, 그리고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최신의 보고서’를 만들어 주어도 우리는 그의 방대한 지식에 감탄할지언정 감동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런 발언은 마치 80년대 한완상의 ‘지식기사 vs 지식인’ 논의를 재연하는 듯 보이는 데다, 도리 없이 과연 ‘인간의 감정을 도식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과연 어느 정도의 감정 상태를 ‘감탄’이라 하고, 또 어느 정도를 ‘감동’이라 하는가. 도대체 강유원은 다치바나의 책들을 제대로 읽어보기나 하고 하는 말인가.
그의 책을 보면서 감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감동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요즘 같이 ‘책이 안 읽히는 세상’에서 다치바나만큼 책을 매개로 감동 혹은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강유원, 편견 혹은 도발.
강유원의 편견과 그에 따른 도발적 발언은 어느덧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그 자신 학적 비판기제의 작동원리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터, 겪어보고 분석해 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비판의 칼날부터 휘두르는 건 적어도 철학하는 사람의 자세는 아니다. 하물며 특정인에 대한 거의 노골적인 비난 – 지극히 개인적 취향과 판단에 의해 – 은 자제했어야 했다. 차라리 강준만 식 실명비판에 나서든지….
“책세상 출판사에서 펴내고 있는 ‘고전의 세계’ 시리즈는 몇권 사서 읽었지만 ‘우리시대’ 시리즈에서는 이 책(『역사, 철학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이 처음이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책(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을 지칭한 듯 – 필자 主)을 서점에 서서 대충 읽어보고 논리적 허접스러움, 저자의 세계 인식의 천박함, 그리고 황당무계한 문장 스타일에 질겁했던 터라 그 뒤로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때문이다.
사실 문고본 시리즈는 잔뜩 나오지만 골라서 사볼 만한 게 별로 없다. 살림에서 펴내는 ‘살림지식총서’ 시리즈 중에서도 돈 주고 산 것은 『수도원의 역사』뿐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사서 모은 것은 시공사에서 펴내는 ‘디스커버리 총서’밖에 없다.”(37쪽)
필자 역시‘살림지식총서’ 시리즈 가운데 강유원의 『책과 세계』를 읽은 바 있다. 그게 그 시리즈 가운데 처음 읽은 것인데, 첫 인상이 꽤 괜찮아서 이후 틈나는 대로 그 시리즈를 사서 읽고 있다. 그런데 정작 필자 중 한 명인 강유원은 그러한 문고본 시리즈의 가치와 의미를 한마디로 묵살해 버린다. 더구나 ‘우리시대’ 시리즈에 대해서는 거의 폭언에 가까운 폄훼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도대체 지식리더(라고 믿어왔던 사람)의 언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대목이다.
그런 그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자신 있게, 역사서술의 방법론에 대해, 자연과학에 대해, 그리고 근대와 탈근대 논의에 대해, 파시즘에 대해, 전쟁에 대해, 한국과 동아시아에 대해 휘황찬란한 글들을 써놓고 있다. 가관이다. 그리고 안타깝다. 19세기 독일철학계의 어느 지점에 매몰된 채 21세기를 조망하려니 현실이 마냥 버겁고, 더럽고, 답답할 것이다.
그 점은 이해된다. 그렇기로, 서슴없이 욕지기를 퍼질러놓는 식으로 자기존재를 과시하려는 현시욕만큼은 이제 좀 거둬들였으면 좋겠다. 자신을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더 이상 ‘헤겔’로는 현실 – 그의 표현대로라면 ‘지금, 여기’ – 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강유원이 사회철학의 도그마에 빠져 있다면, 이정우는 특유의 ‘가로지르기’를 통해 사유를 확장하고 깊이 있게 다듬고 있다. 그 자신 ‘유목적 사유의 탄생’이라 일컬은 대로 그의 사유의 유영은 실로 전방위적이다.
지적 가로지르기의 모범, 철학자 이정우.
이정우의 『탐독』은 한마디로 정교하게 조각된 조각품이다. 특히 이정우의 인생 자체가 곧 책과의 동거였음을 확인케 해주는 그의 ‘탐독의 삶’은 그 자체로 감탄을 자아낸다. 에필로그의 첫 문장이 책을 간명하게 정리해준다.
“문학책들을 읽으면서 인간과 인생을 깊숙이 반추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 후 과학책들을 읽으면서 물질, 생명, 문화를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철학책들을 읽으면서 다양한 지식들을 창조적으로 종합하는 사유 능력을 배웠다.”(에필로그 중에서)
그러한 지적 모험과 유목의 과정들은 본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한 인간은 직업, 전공, 계층을 비롯해 자신이 속해 있는 장의 영향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장과 장 사이에는 거의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의 간극이 패여 있고, 한 인간의 삶도 옮겨 다니는 장들에 따라 뚝뚝 끊어지기도 한다. 훗날 나는 ‘가로지르기’의 개념과 실천을 통해서 이런 간극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
그 유목이 힘들었고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달았다. 바로 그 유목이 내 사유라는 것을. 그때까지 힘겹게 했던 가로지르기, 바로 그것이 내 사유의 본질이고 스타일이라는 것을. 정처 없이 유목하던 나는 결국 유목 자체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었고, 역설적으로 표현해서 유목에, 가로지르기에 안착하게 되었던 것이다.”(186~187쪽)
“가로지르기가 그것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가로지르기를 통해서 기존의 담론 체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사유를 창조했을 때 그것이 의미 있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가로지르기는 그저 막연한 유목이 아니다. 그 모든 가로지르기는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을 둘러싸고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코 어떤 한 담론으로 해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230쪽)
‘지금, 여기’의 철학은 무엇인가?
그러나 『탐독』 역시 아쉬운 점은 있다. 학문(자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했던 강유원이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는,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의 본질이라 할 ‘지금, 여기’의 문제가 결여된 듯해 보인다는 점이다. 모름지기 지식리더로서 현실사회의 문제들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대안을 모색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없는 유목적 사유를 통해 학문적 깊이가 더해진들 그것이 종래 현실사회의 제문제들과 올곧게 결합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게 – 개인적 성취의 문제는 차치하고 –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인용했던 카뮈의 『이방인』의 한 대목을 저자에게 돌려주고 싶다.
“뫼르소는 형이상학자 – 삼류 형이상학자 – 인 신부에게 공박을 가한다. 당신은 마치 세계와 인생에 대해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기라도 한 듯이, ‘진리’를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내게 당신이 말하는 이야기들은 아무런 설득력도 현실감도 없다. 그런 공허하고 사변적인 주장들은 밝게 빛나는 태양빛의 한 줄기, 따스한 모래사장 한 구석, 여인의 짧은 체취, 어린아이의 미소보다도 무가치한 것이다. 당신이 삶에 대해서, 이 대지의 위대함에 대해서, 내 신체와 해변, 대지, 햇볕과의 일치감에 대해서 알기라도 하는가?”(157~158쪽)
새삼 서평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표정훈은 『탐서주의자의 책』에서 서평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책 내용을 정리·전달·평가하는 글이나 말로서, 책의 물질적·형식적 상황이나 책의 기획, 제작, 유통 측면에 대한 평가도 포함할 수 있다. 또한 필자나 발언자 이외의 1인 이상의 수용자가 있어야 하고, 다수의 공중이 접근할 수 있는 매체나 제도를 전제로 한다.”
서평 – 책 내용을 정리, 전달, 평가하는 글. 그러나 그의 정의는 허전하다. 별반 진지해 보이지 않으며, 논리를 가장했지만 지나치게 건조한 문체로 인해 설득력이 반감되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의가 의미 있는 건 서평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조차 그것에 대해 정의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것이 바로 서평이라는 독특한 글쓰기의 지난한 특성이라는 점을 새삼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겸손해야 한다. 특히 책과 책의 저자를 대하는 태도의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올바른 서평을 쓸 수 있다.
책에 대한 더 깊은 시각, 글쓰기에 대한 깊은 조언을 듣고 싶다면!
원문 : 최준영의 주책잡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