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21일
1948년 10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한창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있던 제주도로 출동 대기 중이던 14연대 내 좌익 하사관들이 총을 거꾸로 쥔 후 장교들을 사살해 버리고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봉기한 군대와 그에 동조하는 세력들은 그다지 현명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우익들에 대한 전면적인 복수가 시작됐고, 그 잔인함과 참담함은 봉기 소식을 듣고 달려온 후일의 빨치산 총수 이현상이 “이건 당적 과오다!”라고 부르짖게 만들 정도였다.
그 와중의 10월 21일 이미 눈에 여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살기가 번들거리는 청년들이 또래의 청년들을 잡아 끌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명은 순천사범학교 기독교 학생회장 손동인이었다. 그리고 그를 거칠게 잡아채고 있는 사람은 안재선이라는 학생이었다. 봉기 전 순천 시내의 좌우익 갈등에서 둘은 여러 번 부딪친 바 있었다. 반란 후 체포된 손동인은 인민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당하러 가는 길이었다. 거기에 한 명이 더 끼어든다.
“나도 예수쟁이야..”
“너는 그냥 가라고 했잖냐. 어리니께 봐 준다고.”
“죽일라면 나도 죽여. 나도 예수쟁이니까.”
맹랑한 중학생은 손동인의 동생 손동신이었다. 형제는 용감했지만 용기의 댓가는 끔찍했다. 잠시 후 둘은 시체가 되어 다른 시신들과 함께 차곡차곡 쌓인다.
비명에 간 형제는 애양원이라는 나환자촌을 운영하며 봉사하던 손양원 목사의 아들들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고를 치렀던 그리 흔치 않은 목사였던 손양원은 나환자들을 성실히 돌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처음 나환자들을 대할 때에는 그 역시 눈조차 맞추지 못할 정도로 두렵고 혐오스러웠다고 고백했지만, 나병 환자에게도 거침이 없었던 예수의 제자로서 손양원 목사는 그 난관을 극복해 냈다. 그 딸은 “아버지는 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아버지는 분명 우리 남매의 아버지인데 내가 볼 땐 나환자들의 아버지인 것만 같아 보였다.”고 증언하고 있거니와 그토록 나환자들을 위해 몸바쳐 일하던 그의 생때같은 두 아들이 갑자기 변을 당한 것이다.
손양원 목사가 그 사실을 안 것은 4일 뒤였다. 3남 3녀를 두었지만 두 아들의 죽음 (막내아들은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다) 은 그야말로 기가 막힐 일이었다. 부인과 딸들은 머리 풀고 통곡했고 빨갱이들의 만행에 이를 갈았다. 봉기가 진압되고 다시 국군에게 여수와 순천이 수복되고 좌익들이 백 배의 복수를 당하던 무렵, 손양원 목사는 참으로 기괴한 말을 꺼낸다. 아들들을 죽인 안재선을 용서하고, 그 석방을 탄원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양아들로 삼겠다는 것이다. 손 목사의 딸 손동희가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라는 책에 쓴 대목을 보면 그 장면이 생생하게 재연되어 있다.
“그 학생이 안 잡혔다면 또 모르되 일단 잡힌 이상 모른 채 할 수가 없구나. 내가 무엇 때문에 (신사참배 거부로) 5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견뎌 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제1, 2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등)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동희야. 그 학생을 죽여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그가 죽는다고 오빠들이 살아 돌아오겠느냐?……지금 시대가 바뀌었으니 보복이 반드시 뒤따를 것이다. 골육상잔은 민족의 비극이고 국가의 참사인데 이 민족이 이래 죽고 저래 죽으면 누가 남겠느냐?”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가 남긴 최고의 가르침이자 최악의 명령. 신의 아들쯤 되는 당신예수라면 몰라도 인간으로서는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 당연히 손 목사의 딸도 반항했다. 오히려 그쪽이 인간적이다. “아버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는 겁니까? 다른 목사님들은 그렇지 않는데 아버지는 왜 항시 별난 예수를 믿습니까? 하늘 아래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는 끝내 안재선을 구해 내어 수양아들로 삼았다. 여순 사건의 상처는 깊어서 정신 나간(?) 아버지 대신 그 원수를 갚으려는 사람도 있었기에 손 목사는 항시 안재선 곁에 머무르며 그를 지켰다. 부흥회나 설교 때 자신의 새 아들을 소개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안재선에게 안 좋은 시선이 머물자 그것도 중단했다. 다만 안재선이 세례를 받을 때 손 목사는 어린애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는 수양아들의 성장조차 보지 못할 운명이었다.
6.25가 터지고 전라도 지역은 국군의 변변한 방어망도 없었기에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인민군에게 떨어지지만 손양원 목사는 피난을 포기한다. 나환자들을 두고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공 치하를 살다가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던 날 인민군에게 피살당한다. 장례식 때 상주를 맡은 이는 수양아들 안재선이었다.
안재선은 목사가 되길 바랬던 양아버지의 바램은 지키지 못했다. 그는 평범하고 가난한 월급쟁이로 살았다. 끝내 죄책감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자신이 목사가 되어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손 목사의 결의에 눌려 침묵하기는 했으나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던 손 목사의 딸 동희를 찾아온 안재선은 흐느끼며 말한다. “동희야 나 지금 돌아가면 곧 하늘나라로 간다. 내 네 오빠들을 만나면 엎드려 사죄하마.” 그리고 보름 뒤 그는 암으로 세상을 뜬다.
한국 기독교에서 성자처럼 모셔지는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다. 나는 그의 신앙이 얼마나 강한가를, 그 믿음이 얼마나 튼튼했는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 나는 모르고 굳이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저 나는 그의 행적을 통해 6.25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 기독교가 잃어버렸던 예수의 가르침, “원수를 사랑하라.”는 울림의 여운을 맛보며 지그시 눈 감을 뿐이다.
손양원 목사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겠다고 나댄 자신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긴다면 대관절 무엇이 되겠느냐고 따졌다. 기독교인들만이라도 그 계명에 충실했다면 6.25 전쟁 최대의 민간인 학살인 황해도 신천 대학살 (미군의 짓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인들과 좌익들의 대결에서 말미암았다는 편이 옳을)도 줄었을 것이고, 예수 안 믿어서 쓰나미에 쓸려갔다는 사악한 설교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고, 빨갱이라면 잡아 족칠 생각만 하는 사이비 목사들의 존재도 줄어들지 않았을까.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1948년 10월 21일 일어난 한 형제의 죽음은 진정한 예수쟁이란 누구인가를 드러내고자 했던 하나님의 계획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원문: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