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사람들의 시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삶의 냄새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어. 참 자유스럽긴 하지, 화려하고. 하지만 공허한 느낌도 들어. 그게 살아있는 문학이 될 수 있을까. 최근에 JTBC에서 <유나의 거리>라는 드라마를 방영하더라고. 거기 우리가 문학에서 잃어버렸던 어떤 현실의 삶이 나오더라고. 리얼리즘 같은 걸 거기서 볼 수 있어서 참 재미있더라고.
그걸 보면 깡패, 뭐 이런 못사는 사람들 속에 진짜 삶의 얘기가 있고, 따스한 정도 있고, 정의도 있고 그래. 오늘의 우리문학은 옛날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러한 성격을 조금이라도 회복했으면 좋겠어. 시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고.”(문학평론가 고영직과 시인 신경림, 대담 중에서.)
문학평론가 고영직이 전하는 시인 신경림의 <유나의 거리>에 대한 촌평에 격하게 공감했다. 하마터면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유나의 거리>는 그렇게 내게도, 시인에게도 이 시대의 문학으로 여겨졌다. 내 젊은 날의 남루하고 치기어린 감성을 자극하는 문학. 서울변두리의 허름하고 좁은 골목길! 내가 나고 자란 그곳이 TV에서 되살아났고, 나와 내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이 실재로 만들어냈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TV드라마로 되살아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작가 김운경의 드라마가 본디 그렇듯 <유나의 거리>는 결코 하나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는다. 대신 다양한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에피소드를 통해 주조연을 가릴 것 없이 배우들은 모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깊이 있는 연기를 길어 올리고, 보는 사람들 또한 극의 어떤 국면에 자신의 현실과 입장을 대입함으로써 극과 현실을 동일시한다.
<유나의 거리>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가슴 시린 사연을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이다. 주인공 ‘유나’는 전설적인 소매치기의 딸이면서 그 자신도 소매치기이다. 순진하고 우직하며 건실한 청년 ‘창만’은 그런 유나를 좋아한다. 건달 출신의 콜라텍 사장이면서 집주인인 ‘한 사장’과 그 집에서, 그리고 그 직장에서 아옹다옹하며 살아가는 셋방살이 인생들이 드라마를 이끌어 나간다.
왕년의 건달 ‘장 노인’은 드라마의 감초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이웃들이 ‘장 노인’을 깍듯이 모시는 이유는 그가 왕년의 건달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혼자 사는 쓸쓸한 노인이기 때문이다. 그 노인을 대하는 이웃들의 진심과 정성은 때로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 외에도 ‘칠쟁이’와 ‘부킹언니’ 부부, 유나와 한 방을 쓰는 ‘꽃뱀녀’ 미선, 그녀를 좋아하는 허당캐릭터 ‘개삼촌’ 등등.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이다.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 진지하게 삶을 고뇌하며, 진심어린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친다. 저마다 결핍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면서도 수시로 다투고 갈등한다. 서로 부딪고 헐뜯기를 되풀이하면서도 종내 서로를 떠나지 못한다. 서로의 삶을 침범하는 식으로 서로를 챙기는 독특한 교류의 방식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네 삶이란 대개 그런 침범과 간섭, 엿보기와 헐뜯기를 통한 상처받고 상처주기로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느닷없는 참견이 갈등으로 번지고, 그것이 종내 상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 새삼스레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어우러진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 관계의 폭이 넓지 못한 결핍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란 본디 그런 식으로 서로에게 찍짜붙는다. 삶의 문학 또한 그런 것이 아닌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갖가지 감정과 생각과 사건을 포착하는 지난한 작업이 곧 문학이지 않는가.
개성만점의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때로 한심하고 어이없고,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절로 공감하게 하는 기절초풍할 에피소드들은 종내 헛웃음을 짓게 하다가도, 난데없이 뭉클한 감동을 이끌어낸다. 일테면 이런 얘기들이다.
에피소드1. 도둑놈이 훔쳐간 물건을 다시 훔친 유나 일당이 말하는 도둑의 철학.
찜질방에서 자신이 점찍었던 물건을 선수쳐간 도둑을 찾아 후배와 함께 그 집을 털고 돌아오는 길. 보복을 두려워하는 후배에게 유나가 도둑의 철학을 읊어준다.
“도둑질에도 도리가 있는 거야. 도둑질은 하되 남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리고 원래 모든 물건에는 주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어차피 돌고 돌게 되어 있거든. 지들도 훔친 물건이니까 우리가 훔쳤다고 문제 될 건 없어. 걱정하지 마. 이 언니가 다 해결해 줄게.”
에피소드2. 사양길에 접어든 소매치기.
거리를 떠돌다 허탕을 치고 노래방을 찾아온 후배 유나에게 전직 소매치기 양순 언니가 들려주는 얘기다.
양순 : 요즘 누가 지갑에 현찰을 넣고 다니니? 몇 천원어치 물건을 사면서도 다들 카드를 사용하는데. 이제 소매치기도 못 해먹게 생겼다. 업종을 바꾸든지 해야지. 소매치기도 사양 산업이 돼버린 거야.
유나 : 난 못 바꿔. 배운 게 이것뿐이니, 어쩔 수가 없어.
거리의 소매치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유나의 거리>는, 그러나 어두운 인생의 골목길을 환하게 밝혀주는 반가운 가로등과도 같은 드라마다. 시인 신경림이 ‘이 시대의 문학’이라고 말한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드라마의 특징을 좀 더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유나의 거리>는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의 삶 속에 도리 없이 짙게 배어있는 살풍경과 진풍경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문학이 있어야 할 자리가 따로 있을까마는, 문학이 담지 해야 할 것이 그렇지 않겠는가. 질척거리는 진창길과 끈끈하고도 촘촘하게 얽혀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는 무수한 감정의 편린들.
최근의 드라마들이 가진 들의 막장스토리를 보여준다면 <유나의 거리>는 정반대의 이야기구조를 가진 드라마다. 얼핏 막장으로 내몰린 인생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뜻밖에도 진한 사람냄새가 베어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시도는 작가 김운경이 일관되게 지향해 온 지론이기도 하다. 그의 드라마는 늘 그런 식이었다. 변두리 서민의 삶과 그들이 뿜어내는 훈훈하고도 우스광스런 일상의 이야기들 말이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그러나 사람의 온기가 흠씬 묻어나는 서민들의 소박한 삶의 이야기를 그린 <서울의 달>과 <서울 뚝배기>, <파랑새는 있다>까지. 변두리의 골목길과 그곳에서 아옹다옹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 그들의 질펀한 입담 속에서 드러나는 어이없는 허세와 허풍, 슬픔과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온기와 온정. <유나의 거리>는 김운경표 휴먼드라마의 현재형이다.
<유나의 거리>의 또 다른 미덕은 해학과 유머가 쉴새없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앞서 소개한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단지 몇 마디 대사로, 혹은 의뭉스러운 표정연기로 시청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다시 에피소드 하나를 살펴보자.
에피소드3. 화투치다 쓰러진 장 노인의 땡값.
‘개삼촌’ 계팔과 화투를 치던 장 노인이 쇼크를 받고 쓰러진다. 병원으로 향하는 앰블런스 안에서 장 노인이 희미한 의식을 추슬러 가까스로 말을 꺼낸다. 창만은 장 노인의 의식이 돌아온 걸 반가워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힘겹게 눈을 뜬 장 노인은 마치 생의 마지막 순간, 유언을 남기는 것처럼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말을 이어간다.
장 노인 : 창만아, 나 장땡이었다. 계팔이가 팔땡이고 난 장땡이니까 땡값 받아야 한다. 원래 땡끼리는 땡값 없지만 장땡은 다른 거다. 혹시 나 어떻게 되더라도 니가 계팔이한테 꼭 땡값 받아줘라. 알았지?”
창만 : 예, 알았어요, 어르신. 제가 땡값 꼭 받아놓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확실히 받아놓는다니까요.
<유나의 거리>는 스타시스템을 거부한다. 한물 간 것 같은, 그러나 깊은 연기내공을 가진 배우들이 주·조연을 도맡는다. 연기자의 새로운 발견이면서 깊은 연기혼의 발굴이다. 결과적으로 고도의 전략적 캐스팅인 셈이다.
하기사, 그렇다. 웬만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가 아니라면 어찌 그리도 능청스럽게 왕년의 건달, 부패한 경찰, 노래방 주인, 콜라텍 부킹언니, 춤선생, 사기꾼, 소매치기, 꽃뱀의 아우라를 내뿜을 수 있단 말인가. 단지 연기가 아닌 삶의 경험을 그대로 풀어내는 듯한 자연스러운 연기, 그걸 뽑아내려는 작가의 심모원려가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간미학이다. 영화미학의 꽃이 미장센이라면, 스튜디오와 현실의 공간을 오가며 찍는 TV드라마의 꽃은 응당 이야기가 모이는 곳, 즉 소통공간의 창조적 연출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당과 옥상, 마당과 맞닿아있는 골목과 거리의 절묘한 배치와 조화는 <유나의 거리>가 갖는 생동감과 활력의 또 다른 한 축이다.
막장드라마들 대부분이 대저택 혹은 고급 아파트의 화려한 거실에서 박제된 인형과도 같은 배우들의 말장난 같은 대사로 억지 이야기를 이어간다면, <유나의 거리>의 공간들은 저마다 대사없는 연기자로 살아 숨 쉰다.
동네 어귀의 편의점 길카페, 서민들이 애용하는 공간인 변두리노래방, 어르신들이 모여드는 콜라텍. 그곳들은 하나 같이 현실 속에서 살아숨쉬는 공간들이다. 공간 활용의 백미는 역시 전통의 소통공간인 마당과 옥상이다. 부잣집의 넓은 거실 대신 소박하고 번다한 마당이 등장함으로써 드라마는 한결 친근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건축가 김진애의 말마따나 마당은 이야기가 모이는 소통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몸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겐 생계를 위한 생활공간이다. 일어나 마당을 거쳐 일을 나가고, 돌아와 마당에 모여 환담을 나누고, 마당에서 한바탕 욕지기를 주고받으며 싸움질을 하고, 그러다가 다시 마당에 모여서 한바탕 수박파티라도 하고나면, 그렇게 그날 하루의 피곤한 일과가 마무리 된다. <유나의 거리>의 모든 이야기는 마당과 옥상, 그리고 골목길에서 시작되고 마당에서 마무리 된다.
어느덧 문학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 우리 곁엔 대체 어떤 문학이 있는가? 문학은 아직도 우리 곁에서 삶의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는가? 생뚱맞은 질문이지만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시인 신경림이 “리얼리즘이 사라진 이 시대의 문학이 안타깝다”고 말한 것은 진실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 <유나의 거리>는 문학이 사라진 시대에 새로운 문학으로 우뚝 선 드라마다. 이제 문학은 책이라는 무거운 옷을 벗고 스크린이라는 가벼운, 그러나 편리한 새 옷으로 갈아입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려나, <유나의 거리>는 ‘이 시대의 문학’이다.
원문: 대안미디어 너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