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리방에서 부르던 노래가 공연으로 나오는 순간
1987년 10월 13일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 앞은 때아닌 장사진이 쳐졌다. 대개 젊은 대학생들이었던 장사진의 면면에는 9할의 설렘과 1할의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공연을 보기 위해 모여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공연에서는 몇 달 전만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불리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노래들이 선보일 예정이었다. 물론 대학가 술집에서나 동아리방에서야 목 터지게 부른 노래들이긴 했지만 그 노래들을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 같은 시내 한 복판에서 ‘공연’의 형태로 만나게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생소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통로까지 꽉꽉 들어차고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관중들은 팜플렛을 보면서 또 한 번 마음이 일렁인다. 어느 야학의 교가로 지어졌던 ‘그루터기’ , 4.19로 죽어간 넋들을 위한 노래 ‘진달래’, 밥 딜런의 클래식 ‘바람만이 아는 대답’ 김민기의 ‘친구’, 일본 제국주의자는 물론 그후 여러 집권자들을 성나게 했던 시에 노래를 붙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갚 그리고 김지하의 시에 처절한 곡을 붙인 ‘녹두꽃’ 등등…
제목만 보아도 “이 노래를 대놓고 부른단 말이지?” 라는 질문이 새어나올만한 노래들이 줄을 있고 있었는데다 피날레는 합창으로 장식되게 짜여져 있었다 한돌의 ‘터’, 그리고 요즘은 한나라당 연찬회에서도 부른다는 소문이 있는 ‘광야에서’ 그리고 87년 당시 부르기만 해도 목이 메어 꺽꺽거리는 사람이 많았던 노래 ‘그날이 오면’까지.
“노찾사”의 시작, 공연의 시작
원래 “노래를 찾는 사람들” 즉 노찾사는 대학 노래패 출신들이 만든 노래모임 새벽을 모태로 했다. 지하 아닌 지하에서 유통되는 노래를 생산하고, 현실과 떨어진 사랑 타령만이 아닌 생생한 삶의 노래와 진실의 소리의 작은 새암이었던 그들이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드디어 지상으로 분출되어 나온 것이다. “합법적인 공간에서 콘서트 한 번 해 보자.”
하지만 아무리 6월 항쟁 뒤끝이라지만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노래모임 새벽의 이름을 대놓고 내걸기에도 찜찜했다. 그래서 당국이 봐도 무난하고 까탈 잡히지 않을만한 사람들로 공연 팀을 구성했다. 잠깐 ‘새벽’ 활동을 했었던 가수 김광석을 비롯하여 학교 선생님, 은행 직원 등이 ‘꼬심’을 당해 끌어들여졌다. 단적인 예로 ‘노찾사’ 초대 대표로서 무대 인사를 했던 사람은 한국은행 대리였다.
공연이 시작됐다. 첫 곡부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라기보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대지를 꿰뚫은 깊은 뿌리와 내일을 드리고선 바쁜 의지로 호롱불 밝히는 이 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맷등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한때는 이런 노래를 부른다고 바로 거리에서 연행되어 머리 깎여서 군대로 끌려가기도 했고 학교 안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로 강당 밖에서 대공계 형사가 주먹을 부르쥐고 서 있기도 했었다.
이미 세상을 뜬 박혜정의 사연
공연 팜플렛에 등장하는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라는 노래의 작사자의 사연은 보다 특별했다. 그는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서울대 국문과 83학번 박혜정이 그였다.
“누워 쉬는 서해의 섬들사이로 해가질 때 눈앞이 아득해 오는 밤
해 지는 풍경으론 상처받지 않으리
별빛에 눈이 부셔 기댈 곳 찾아
서성이다 서성이다 떠나는 나의 그림자 음음음음
언제나 떠날 때가 아름다웠지
오늘도 비는 내리고 거리의 우산들처럼 말없이 돌아가지만
아아아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시인 김수영을 좋아하던 국문학도, 엄한 아버지 탓에 MT 한 번 가지 못했던 모범적인 여대생. 휴학을 해서라도 끔찍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녀에게도 86년은 어김없이 송곳처럼 찾아왔다.
어느 날 집회 도중 서울대 원예과 1학년 이동수가 온몸이 불덩이가 된 채 아크로폴리스로 떨어져 내린다. 그 자리에 있던 문익환 목사는 평생 그 일을 가슴에서 지우지 못했거니와 그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그 광경은 머리 속에서 절대로 떼어내지 못할 충격이었다. 한 학생은 도서관에 뛰어들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사람 죽었다 이 개새끼들아. 나와서 싸우자 싸우지 않겠거든 나와서 구경이라도 해라.”
그날 박혜정도 울면서 돌을 들었다. 용기 없음을 스스로 질책하던 한 젊은이의 폭발이었고 참전할 수 밖에 없었던 전쟁의 발발이었다. 그날 그녀는 평생 처음 외박을 하고 며칠 뒤 한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절망과 무기력, 이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부당하게 빼앗김의 방관, 덧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더 이상 죄지음을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다. 사랑하지 못했던 빚 갚음일 뿐이다.” 그녀는 유서에서 이렇게 썼다. 그로부터 1년 뒤 그녀의 시는 노래로 살아나 객석을 메운 사람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게 된 것이다.
자유의 상징이었던 추모의 무대
이런 모든 사연을 싣고 공연은 막바지로 치달았다. 원래 전태일 추모곡으로 만들어졌던 ‘그날이 오면’으로 공연은 끝났지만 관객들은 당연히 앵콜을 부르며 떠날 줄을 몰랐다.
그때 등장한 것이 공연 중 ‘녹두꽃’으로 사람들을 홀렸던 김광석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이 산하에’ 1절은 갑오농민 전쟁, 2절은 3.1운동 3절은 북만주 항일 무장 투쟁을 형상화한 이 장중한 노래는 김광석의 미성에 실려 새처럼 가볍게 사람들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노래는 승리를 노래하지 않았다.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 없는 통곡’이었고 ‘피에 물든 깃발’의 처참함이었고 ‘붉은 이 산하에 이 한 목숨 묻힐 수 있는’ 막막함이 그득했다.
하지만 관중들도 노래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바로 그런 과거가 어제까지의 일이었고, 박혜정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1987년 10월 13일 오늘 그들이 이 공연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자신들의 앞에서 펼쳐지는 노래 자락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했다. 그것은 자신들이 쟁취한 자유였고, 또 바로 그들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언뜻 오늘을 둘러 보면 25년 전 그날 노찾사가 부른 노래들은 흘러간 옛 노래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삶이 바닥에서부터 무너지고, 고단하고 성마른 삶을 비빌 언덕이 필요할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입을 열 때, 그 노래들은 또 다른 생명력으로 우리 귓전을 때릴 지도 모른다.
1920년대 이상화가 노래한 ‘빼앗긴 봄’이 1980년대에도 슬프게 열린 것처럼.
원문: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