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호크 다운이라는 영화가 있었지.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미군 델타포스와 소말리아 민병대와의 격전을 내용으로 한 영화고 리들리 스코트 감독이 나 아직 안죽었다고 외치듯 만든 영화인데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재미없었던 영화야. 다큐멘터리 보는 기분이었어. 영화가 아니라.
그런데 영화 마지막에 올라온 자막 하나가 기억에 남아 있어. 영화 속에서 미군이 악전고투를 치르는 걸로 나오고 많은 병사들이 픽픽 쓰러져가고 헬기도 몇 개 떨어지고 하는 모습을 보여 줘 놓고 미군 사망자 19명, 소말리아 사망자 천여 명이라는 자막이 등장하니까. 그래서 역시 헐리웃 놈들 사실은 대학살을 벌여 놓고 자기들 영웅으로 만들지 않았냐고 분개하는 목소리도 있었어.
소말리아의 역사: 강대국에게 짓밟히고 팽개쳐진 나라
소말리아 역사 강의를 하면 아마 불면증에는 특효약이 되겠지만 그만큼 재미없으니 블랙 호크 다운 이전 상황을 압축 액기스로 해 줄게. 독립 후 소말리아를 오래 다스리던 독재자 바레 대통령이 물러난 뒤 소말리아는 바레를 쫓아낸 군벌들간의 내전으로 무정부 상태에 빠져. 거기다 우리 어렸을 때 이디오피아를 덮친 기근같은 흉악한 기근이 소말리아를 덮치면서 수백만이 굶어죽는 사태가 발생하고 내전은 멈추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생지옥이 연출된 거라.
사실 소말리아는 가난한 나라고 석유도 추정량만 있지 생산량은 없는 나라야. (참고로 이런 나라 가운데는 북한도 있다. 아무도 북한을 산유국으로 보진 않지) 지정학적으로는 ‘아프리카의 뿔’로서 중동 지역을 감싸고 인도양을 굽어보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이라고 쓰고 불운한이라고 읽는) 나라였고, 그 덕에 냉전 시대에는 강대국들의 러브콜을 받긴 했지만 냉전이 끝난 90년대에는 그 가치를 상실하고 있었어.
미국도 그다지 관심을 가지고 뛰어들 곳은 아니었다는 얘기야. 물론 미 제국주의자에게 치를 떠는 사람들은 소말리아의 모든 문제도 결국은 미국 탓이라고 주장하지만 난 거기에 동의하지 않아.
정부가 무너지고 온갖 군벌들과 무장 양아치들이 설치는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맞아 죽어가고 찔려 죽어가니 UN이 개입했고 평화유지군으로서 여러 나라 군대가 파견되지. 이즈음 미국 선거에서 클린턴이 승리하는데 현 대통령 부시는 덜커덕 미군 해병대의 소말리아 평화 유지군 파견을 승인해 버려. 왜, 인권 존중의 구수한 라면 생색은 자기가 끓여먹고 설겆이는 클린턴이 할 테니까.
증오가득한 소말리아 민병대에게 격추된 블랙호크
소말리아 민병대의 저항이 거세지고 UN군들이 사지가 찢기는 죽음을 당하는 (같은 이슬람교도인 파키스탄 군이었지) 참사까지 빚어지고 잔류 미군 가운데에도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그 배후조종자라 할 소말리아 군벌 파라 아이디드 (이 인간 이름의 뜻이 ‘굴복하지 않는 자’라나) 를 그냥 둘 수 없다는 기류가 확산되지. 미군 지휘관은 어느 호텔에서 아이디드 일행이 회합을 가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특공대를 출동시켜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게 돼.
블랙호크 헬기에 올라탄 델타포스 특공대 즉 미군이 세계에 자랑하는 특공 용사들이 모가디슈 상공을 날아가게 되는데 처음부터 뭔가 좀 엇나간 느낌이 든다. 이 야간 침투와 기습의 전문가들이 벌건 대낮에 로켓포가 시장바닥에 굴러다니는 내전 절정의 모가디슈 시내에 투입됐으니까.
블랙 호크 헬기 가격은 200억원 가량….. 하지만 비싼 헬기라고 해도 대낮에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로켓포 공격을 모조리 피하기란 쉽지 않았어. 결국 두 개가 격추됐고 미국이 애지중지 키운 델타포스 18명이 죽고 7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하는 작전 실패가 발생하게 돼. 그리고 아이디드를 자루에 잡아 넣고 오는 것을 임무로 했던 델타포스는 살아남기 위한 전쟁을 벌이게 됐고.
떨어진 블랙호크 헬기는 슈퍼 61과 슈퍼 64였어 61기는 근처에 있던 레인저 부대원들이 구조를 위해 출동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64기였어. 근처에 도움을 줄 미군도 장비도 없었거든. 마이크 듀란트를 비롯한 64기의 승무원들은 그야말로 검은 파도에 휘말려 산산이 부서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
아이디드를 체포하려는 작전의 와중에 미군의 오폭으로 수백명의 민간인들이 죽어가는 상황들이 있어서 소말리아 사람들에게 미군에 대한 증오심은 충만해 있었고 불운한 미군들은 곧 토막이 나고 창자가 뽑혀지고 (파키스탄 군이 당한 거) 길바닥에 질질 끌려다녀야 할 운명이었어.
라이언 일병 구하기보다 만화 같은 마이크 듀란트 구하기
합리적으로 보면 이들의 희생은 피할 수 없었어, 그들을 구원할 병력도 없었고 구하려고 섣불리 다가갔다가는 로켓포에 어떻게 얻어터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야. 땅에 떨어진 사람이나 하늘 위에서 지켜보던 사람이나 애가 타지만 도리가 없었지. 그때 게리 고든과 랜디 서거트라는 델타포스 병사 둘이 뜻밖의 무전을 보낸다.
“우리가 내려가서 엄호하겠다. 승인 요청한다.”
둘은 그럴 의무는 없었어. 하지만 그들은 아주 작은 가능성에 자신들의 목숨을 건 거였지. 둘은 군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결단을 내린 거야. 땅에 떨어져 부상을 입은 채 천 명의 분노한 사람들에 갈갈이 찢겨질 위기의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가냘픈 희망에 자신들의 목숨을 건 거지.
당연히 지휘부에서는 이 용감하지만 비이성적인 요청에 응하지 않아. “이 사람들아 자네들도 죽어.”
하지만 게리 고든은 또 한 번 허락을 요청한다. “내려가서 듀란트 (61호기 승무원)를 보호하겠습니다!”
영화가 아니야. 실제 상황이야. 두 군인은 마치 생존한 몸으로 지옥에 들어간 테세우스와 헤라클레스처럼 1천명의 살의 그득한 사람의 파도 속으로 내려간다. 마이크 듀란트, 허리와 대퇴부가 부서진 몸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결혼 반지를 빼서 콘솔 위에 올려 놨다는 (왜 그랬는지는 본인도 모른다는데) 듀란트는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게리와 랜디가 어떻게 보였을까.
1천대 2. 장렬하다기엔 너무나 처연한 총격전이 벌어진다. 천하의 델타포스라지만 미군에게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있던 (미군의 오폭으로 수십 명의 소말리아인이 죽기도 했거든) 소말리아 사람들의 분노도 컸어. 처음엔 게리 고든이 쓰러지고 다음으로는 랜디 서거트가 총을 맞아 죽어간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던 듀란트가 희망을 포기하고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동안 소말리아 사람들의 거친 손발이 그에 육박했지.
기적적 생환
그 순간 작은 기적이 일어나. 한 소말리아 군벌 지휘관이 소총을 쏘면서 듀란트를 요절내려던 소말리아인들을 가로막았어. 영화 속에서는 “아이디드님이 이 죄수를 죽이지 말라신다.”고 말한 것으로 나오지만 그 급박한 상황에서 아이디드의 명령이 내려왔을지는 의문이야.
분명한 건 게리 고든과 랜디 서거트의 결단은 스스로의 목숨을 잃게 했고 그 시신조차 엉망으로 훼손되게 했지만 듀란트만은 살렸다는 거. 마이크 듀란트는 기적적으로 생환된다.
어떤 전쟁이든 추악하지 않은 전쟁은 없을 거야. 자존심이든 민족의 영광이든 해방이든 천하 없는 명분이라도 결국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거고, 그 누군가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될 뿐이야. 더군다나 누구에게든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걸려 있을 때 인간은 똥통에 뛰어들 수도 있고 같은 사람을 뜯어먹을 수도 있고, 소총 한 자루로 천 명을 죽일 수도 있게 돼. 그게 사람이니까.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누군가의 가냘픈 희망을 위해 도박판에 올릴 수 있다는 용기는 그 자체로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이익과 생명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을 거고, 그 사람들의 행동은 아군은 물론 심지어 적병이더라도 경의를 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
그럴 수 없이 뭉툭하고 평범한 두 미군 병사는 그 일을 했다. 1993년 10월 3일의 일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