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10월 12일 어느 소년 우익의 광기
얼마 전 퓰리처상 모음집을 샀다. 여러 사진들을 둘러보는데 아래 사연의 사진이 등장했다……
한국 만큼이나 시끄럽던 일본의 1960년
일본의 1960년은 4.19가 터졌던 한국만큼이나 시끄러웠다. 수상 기시 노부스케가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전 국민적인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이른바 안보 투쟁이다. 미국 중심의 냉전 질서에 일본을 편입시키려는 의도가 농후한 조약에 대한 반대는 광범위하게 일어났고 1960년 5월 자민당 정부가 경찰을 의회에 끌어들인 가운데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키자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한국 학생들을 따르라.”는 구호까지 등장한 가운데 학생운동권과 평화운동 세력은 전국적인 항쟁을 벌였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약속된 일본 방문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우리 나라는 신용을 잃었다.”고 비통하게 부르짖던 기시 내각은 물…러났지만 자민당 정부는 통과된 조약안을 폐기하려 들지 않았다.
안보투쟁이 격렬히 벌어지던 당시 선봉에 섰던 야당은 사회당이었다. 그 당수 아사누마는 중공을 방문해 모택동과 회담하고 “미일 제국주의는 공동의 적이며, 미일안보조약 폐기를 위해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돌아올 정도의 강경파였다.
1960년 10월 12일 동경 히비야 공원에서는 정당 연설회가 열렸고, 아사누마 당수는 연단에 올라 열변을 토한다. 그의 연설은 우익들의 야유에 묻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사누마는 굴하지 않고 연설을 이어나갔는데 갑자기 검은 교복 차림의 괴한이 연단 위로 뛰어올랐다.
모두가 당황하여 숨을 죽인 순간 교복의 괴한은 소지하고 있던 긴 칼을 꺼내 아사누마를 사정없이 찔렀다. 첫 칼이 아사누마 몸 깊숙이 꽂혔고, 경비 중이던 형사들이 기겁을 하고 연단으로 뛰어올랐다. 괴한은 칼을 빼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아사누마를 또 한 번 공격했다.
청중들은 그때쯤 되어서야 괴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 야마구치 오또야라는 열 일곱의 소년이었다. 그의 망설임없는 칼질 두 번에 사회당수 아사누마는 절명하고 만다.
경찰에 체포된 야마구치의 호주머니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힌 쪽지가 담겨 있었다.
“너 아사누마 이나지로는 일본의 적화를 기도하고 있다. 나 자신은 너 개인 한 사람에게 원한이 없으나 사회당의 지도적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책임. 방중 때의 폭언과 국회난립의 직접 선동자로서 책임으로 볼 때 너를 용서할 수 없다. 여기에 나는 너에 대해 천벌을 내린다.”
그리고 그는 히로히토 천황의 소화 연호도 아닌 황기(皇紀) 연호를 썼다. 2260년 (1960년) 10월 12일.
육상자위대원의 아들이었던 그는 이미 열 여섯 살에 극우단체의 회원이었고, 아사누마 뿐 아니라 여당의 국회의원, 심지어 2차대전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했던 황족까지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한다. 그는 글자 그대로 철저한 극우 군국주의자였다.
미성년자였던 그는 소년원으로 끌려갔으나 그곳에서 자신의 셔츠를 찢어 목을 매 죽는다. 그의 유서는 이랬다.
“일곱 번 태어난대도 나라에 보답한다. 천황 폐하 만세.”
일본 우익들은 그 장례식을 성대히 거행하고 그에 대한 신화까지도 만들어 냈다. 이를테면 그가 두 번 칼을 찌른 뒤 경찰이 칼날을 손으로 쥐자 그 칼을 빼면 경찰의 손가락이 잘릴 것 같았으므로 의연히 칼자루를 놓고 체포되었다는 식으로.
원자폭탄까지 맞고 수백만이 무의미하게 죽어간 끝에 패전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열 일곱 소년의 광기는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국가적 차원의 반성의 부재였고 과거와의 단절의 실패의 한 단면이었다.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짖으며 자살 돌격을 감행하던 멘탈리티가 극복은 커녕 수정도 거치지 않은 채 한 소년의 뇌리에 온전하게 들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덧붙여졌다면 반공과 안보에 대한 맹신이었을 것이고.
재미있는 건 식민지 깨나 거느리고 거들먹거린 나라의 소년 말고, 그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피눈물 깨나 흘렸다는 나라에도 그 멘탈리티가 유구하게 살아 있다는 점이다.
“백선엽은 간도 특설대로서 좌익 독립군을 죽였으니 친일한 것이 아니라”던가 “일본이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교과서에 넣자고 우기는 ‘현대사학자’들에게서 나는 퓰리처상으로 유명한 아래의 사진에 등장하는 야마구치의 얼굴을 본다.
원문: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