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 일본 정규군의 참패
비극의 앞에는 항상 행복한 서막이 깔린다. 그 기쁨과 즐거움의 시간이 잔인하게 깨져 나가면서 비극의 효과는 극대화되고, 한때 낙관적이었던 미래는 고스란히 캄캄한 흙더미가 되어 사태로 몰려든다. 1920년 경신년도 그 중의 한 해였다.
아직 1919년 기미년의 만세 소리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을 때였다. 조선 팔도에서 단 몇 개의 군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고 만주와 연해주, 중국 대륙 어간까지 조선인이 있던 곳이라면 어디든지 태극기가 물결쳤다.
더군다나 일본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간도 지역은 ‘불령선인’들의 집결지였고 그를 근거로 한 독립군들의 활동도 눈부셨다. 1920년 6월의 봉오동 전투는 일본놈도 별 수 없더라는 자신감을 확실하게 심어 주었다. 경찰도 아닌 일본 정규군이 참혹한 패배를 당한 것이다. 대한독립만세를 진짜로 부를 날이 코앞에 닥친 것 같았다. 널부러진 일본군들의 시체 앞에서 조선인들은 흥분했다.
간도 독립군 소탕을 위해 함정을 판 일본
그러나 일본은 실로 전율할만한 계획을 세워가고 있었다. 10월2일 혼춘의 일본 영사관이 마적에 의해 습격당한다. 습격이라는 단어는 좀 어색하다. 그 마적 두목 장강호를 끌어들인 건 일본이었던 것이다. 울고 싶어 내민 뺨이랄까. 마적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수십 명의 조선인과 중국인, 그리고 약간의 일본인의 시체가 뒹굴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삼아 본격적으로 두만강을 넘는다. 월등한 무력으로 간도 지역의 독립군을 뿌리뽑겠다는 심산이었다. 혼춘 사건이 나자마자 조선에 주둔하던 사단 병력이 움직이고 1920년 10월 5일 그 선봉의 하나였던 야마모도 중대가 독립군 10명을 사살한다. 그 뒤 간도 지방에 살육의 태풍을 몰고 온 악마의 군대의 첫발이었다.
독립군을 소탕하려던 전략은 처음부터 차질을 빚는다. 독립군은 일본군 출병 이전에 안전 지대로 이동하고 있었고 그를 추격하던 일본군이 최악의 참패를 당한 것이다. 청산리 전투다. “총구는 조국의 눈이다! 총알은 조국의 선물이다!”고 이범석이 호령하는 가운데 독립군은 일본군 수천 명을 쓰러뜨렸다.
3만 명의 시체를 낳은 경신대참변
그러나 간도, 혼춘 일대의 조선인들은 그 앙갚음의 대상이 되고 만다. 앙갚음은 무시무시하다라는 형용사가 그 서슬을 잃을 정도로 참혹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한 대목을 그대로 옮긴다.
“각처 촌락의 인가 및 교회,학교, 양곡 수만 석을 불태우고, 남녀노유를 총으로 죽이고, 칼로 죽이고, 매질하여 죽이고, 결박하여 죽이고, 주먹으로 때려 죽이고, 발로 차서 죽이고, 찢어 죽이고, 생매장하고, 가마에 삶고, 해부하고, 코를 꿰고,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못박고, 인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오락 삼아 하였다.”
이른바 경신대참변. 우뚝 솟아오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봉우리 사이의 골짜기는 너무나도 깊었다. 일본군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잔인한 수법을 동원하여 간도의 조선인 사회를 유린했다.
1920년 10월 5일을 기점으로 그 해 연말까지 죽어간 조선인들의 수는 3만을 훌쩍 뛰어넘는다고 한다. 경신대참변을 지근거리에서 겪었던 한 조선인은 이렇게 얘기했다. “일본 사람이 잔인하다를 넘어서서 사람이 참 악마라는 걸 느꼈다. 갓난아이를 허공에 던진 뒤 총검으로 받아서 어느 정도 깊이 꽂히는가 싱글대던 군인들의 모습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분은 내 할아버지였다.
지금 우리의 역사관을 돌아보며
그런 세월을 겪은 이들의 후예치고는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잊고 살고, 때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통치가 근대화 과정에 도움을 주었다는 식의 논리에 선뜻 빠져들기도 한다.
해방 60년이 지난 지금 친일파 척결은 이미 사라져 버린 꿈이라 쳐도, 그 역사적 평가조차 지지부진하다는 것은 1920년 오늘로부터 조선말을 쓴다는 이유로 줄줄이, 대대적으로, 속절없이 죽어간 생령들에게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맘이 드는 오늘.
원문: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