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사람 어네스트 솔베이의 주창으로 국제 물리학, 화학 학회가 처음 열린 게 1911년 10월 29일이었어. 아인슈타인과 퀴리 부인 등 위인전 단골 인사를 포함해서 쟁쟁한 과학자들이 모였고 이후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유서 깊고 정평 있는 모임이지.
나는 이 사람들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아. 허구헌날 수우미양가 중 미를 받아야 했던 물리, 화학을 어렵게 만든 장본인들이니까 말이지. 구시렁구시렁. 넌 또 그것도 점수냐고 타박할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이 첫 솔베이 회의는 그 참석자들의 면모와 논의 내용의 우수함과는 별도로 좀 민망한 스캔들이 얽힌 회의이기도 해. 스캔들의 주인공은 폴란드 출신의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 즉 퀴리 부인과 역시 회의에 참석한 프랑스의 물리학자 폴 랑주뱅이었지.
폴란드 여자 마리 스클로도프스카에게 퀴리의 성을 안겨 줬던 피에르 퀴리는 그로부터 6년 전 석탄 가득 실은 마차에 치어 죽는다. 프랑스 최고의 두뇌이면서 동시에 아내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 연구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착한 남편 피에르가 허무하게 갔을 때 마리 퀴리의 나이는 서른 여덟 살이었어. 학자로서도 여자로서도 한창 나이였다는 것.
전 남편의 제자와의 사랑, 과학계 최대의 스캔들
랑주뱅은 피에르의 제자였어. 그리고 퀴리 부인보다 여섯 살 연하였지. 퀴리 부인이 남편을 잃었다면 랑주뱅은 기질 승한 마누라에 시달리고 있었단다. 수틀리면 병으로 과학자의 제1재산이라 할 머리통을 내려찍기도 했다니 대충 짐작이 가겠지? (그런데 이유가 바람기라면 뭐….. 얘긴 달라지겠지만)
이 아픔 있는 이들이 새로운 사랑에 빠지게 됐는지, 아니면 오해인지는 검색으로도 확정이 안되네. 어떤 이들은 이 스캔들 자체가 랑주뱅의 못된 마누라가 편지를 위조하고 ‘폴란드 계집’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배타적 감정 (드레퓌스 사건이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났음을 기억해 보렴) 이 버무려지고 황색 언론의 뻥튀기 보도가 곁들여진 완벽한 허위이며 공식적인 증거는 없다고 주장해.
일단 그런 주장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나는 퀴리 부인이 당연히 사랑에 빠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 아니 그게 더 인간적이지 않을까.
남편이 죽은 뒤 그녀는 대신 맡은 남편의 강의에서 정확하게 남편이 강의한 뒤부터 진도를 나갔을 만큼 남편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고 남편의 유지에 따라 더욱 과학 연구에 정진했어. 그런 그녀의 사랑이 그녀에게 불명예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열녀문을 세워 줄 것도 아니고. 또 친구들도 마리 퀴리가 랑주뱅의 재능과 인품을 아끼고 사랑했다는 증언은 많이 하고 있어.
“마리는 랑주뱅의 경이로운 지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주위 사람들이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물리학자 장 패랭의 아내 앙리에트)
어쨌든 둘의 관계를 의심했던 랑주뱅의 악처는 남편을 감시한 끝에 퀴리 부인의 편지를 가로채는데 성공했고 한바탕 난리가 나지만 친구들의 중재로 일단 넘어갔다고 해.
하지만 랑주뱅의 아내는 거기서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고 퀴리부인의 실험실까지 몰래 뒤져서 또 다른 증거(?)들을 찾아내. 그 증거(?)들으 보면 퀴리 부인은 이렇게 얘기하기도 해. “더 이상 당신의 아내를 임신시키지 말아요. 그건 우리의 결별을 의미해요.” 글쎄 아인슈타인이 “청어보다 차가운 여자”라고 평한 퀴리 부인이 썼다고 받아들이기엔 좀 뭐하지만, 사람의 속을 누가 알 수 있겠니.
어쨌든 길길이 날뛰기 시작한 랑주뱅의 아내. 랑주뱅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출해 버렸어. 원래 질투가 발동한 여자의 촉이란 상어의 피 냄새 반응 속도만큼이나 빠르고 정확하지. 그녀의 레이더망에 브뤼셀에서 열리고 있던 솔베이 학회에 둘이 참석하고 있음을 알고는 발라당 뒤집어져 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언론에 모든 것을 폭로해 버려. 유태인 드레퓌스를 잡았던 프랑스 극우 언론 (꼭 조중동스러운)들은 폴란드 여자의 프랑스 유부남 낚아채기를 신나게 기사로 긁지. 그 중 한 기사 첫 줄은 아주 유명하단다. “그렇게 신비스럽게 비추던 라듐의 불꽃이…… 그렇게 헌신적으로 그 작용을 연구하는 과학자들 중 하나의 가슴에 불을 당겼다. 그리고 이 과학자의 부인과 아이들은 눈물 속에 있다.” 이런 여성중앙스러운.
노벨상 수상 취소까지 갈 뻔한 해프닝과 퀴리 부인의 풍모
랑주뱅은 격노해서 신문 편집자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20세기 초까지도 결투가 불법이 아니었다는?) 무기는 총. 몇 발짝 걷고 뒤돌아서서 방아쇠를 당기려는데 편집자는 총구를 바닥으로 향하고 있었어. “프랑스 최고의 두뇌를 죽이긴 싫소.”
이 상황에서 그 머리에 총을 갈길 수는 없었던지라 결투는 싱겁게 끝나고 말았지.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어.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갔고 퀴리 부인의 집 앞에는 폴란드 여자 물러가라는, 어디에나 있는 오지랖 넓고 정의감 넘치는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했지. 퀴리 부인이 몸을 피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프랑스 과학계는 싸늘했어. 결정적인 건 노벨상 위원회의 동요였지.
스캔들이 본격화하기 전 노벨상위원회는 퀴리 부인에게 두 번째 노벨상을 결정했지만 퀴리 부인과 랑주뱅 사이의 편지(위조?)가 공개되고 랑주뱅과 신문 편집자간에 결투가 벌어지고 난리굿판이 벌어지자 이거 안되겠다 꼬리를 뺀 거지. 노벨상 아카데미 위원 아레니우스는 퀴리부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만일 그 편지 내용이 사실이라면 노벨상 아카데미는 부인의 수상을 결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카데미 사무총장이나 제게 이곳으로 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됐다는 전보를 쳐 주십시오. 법적으로 랑제방과 당신이 관계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기 전에는 상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곧 죽어도 자기들이 수상을 거부한 게 아니라 퀴리 부인이 결연히 “나의 결백이 입증되기까지는 수상을 거절”하는 모양새를 내 달라는 지극히 한국 남자들스러운 발상.
여기서 퀴리 부인은 그녀의 과학자로서의 업적 이외에 또 다른 형태의 ‘위인’으로서의 풍모를 보여 줘. 이런 답을 쓴 거지.
“아카데미의 의견에 제가 따라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저는 제 신념에 따르겠습니다. 당신의 조언은 잘못입니다. 상은 라듐과 폴로늄의 발견에 수여된 것입니다. 과학적 연구에 대한 평가가 사생활에 대한 중상과 모략에 의하여 영향 받는 건 부당한 일입니다.”
그리고 대놓고 스웨덴 왕립아카데미의 관자놀이에 명중하는 라이트 훅 한 방. 부라보.
“나는 당신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슬픕니다.”
당당한 연구자이자 당당한 여성, 퀴리 부인
퀴리 부인은 꿋꿋하게 스웨덴으로 향하고 노벨상을 받아. 이때 힘을 실어 준 게 아인슈타인이라더군. 자기 마누라한테는 못할 짓을 했던 이 위인이 마리 퀴리에게는 “언론 보도 따위 신경쓰지 마세요.”라며 퀴리 부인을 응원하지.
그런데 마리 퀴리는 고맙다가도 떨떠름했을 거야. 이 아인슈타인이라는 사람 언론에는 “에 또 퀴리 부인은 누굴 유혹할 깜냥이 못돼요. 그러니까 똑똑하고 열정적이지만 누구에게 치명적일만큼 매력적이지는 못하다구요.” 라고 퀴리 부인을 변호(?)했거든. 이게 지금 편을 드는 거야 디스하는 거야.
어쨌든 퀴리 부인은 그 숱한 스캔들과 프랑스 언론의 압박과 스웨덴 노벨상 위원회의 우려를 무릅쓰고 당연히 받아야 했지만 받는데 난항을 겪었던 노벨상을 받는다. 그러면서 위기를 돌파했고 스캔들도 갈수록 잦아들었지. 랑주뱅은 가정으로 돌아갔고.
이 스캔들이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 나는 중요하지 않다고 보고, 오히려 나는 사실일 때 마리 퀴리는 더 존경스러워진다.
그 사랑이 가져다 준 충격과 공포 속에서도 의연하게 “나의 사생활과 과학적 연구에 대한 평가가 무슨 상관인가.”라고 당당하게 맞설 줄알고, 자신의 권리를 또박또박 주장하며 두 번째 노벨상을 거머쥐어 돌아간 남편과 자신의 명예를 드날린 여자라면 나라도 목을 매고 사랑하고 싶어지지 않겠냐고.
더 재미있는 건 퀴리 부인의 맏딸 이렌 퀴리의 딸, 그러니까 손녀딸 엘렌 줄리오는 랑주뱅의 손자와 결혼했다는 거. 마침내 사랑은 손녀대에 이뤄진 것일까? 이 모든 걸 지켜보던 퀴리 부인의 둘째 딸 에브 퀴리, 엄마의 전기를 쓰면서 거의 모든 것을 들여다봤을 그녀는 놀랍게도 103세까지 살다가 2007년에야 죽었어.
어때? 한층 더 가깝게 느껴지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