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영화를 보다 보면 도무지 몰입이 아니 되다 못해 실소를 머금으면서 팔목에 돋는 닭살을 다독여야 할 때가 있다. 〈신기전〉도 그랬다. 아니 조선 세종 때 조선에 온 중국 사신이 왜 청나라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냐.
그 이외에도 이런 류의 ‘닭살’들은 치킨집을 차려도 될 정도로 많지만, 최근 몇 년간 나에게 그런 달갑잖은 기회를 준 영화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면 단연 〈한반도〉를 꼽는다. 영화 자체가 잃어버린 대한 제국의 옥새를 찾으면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뀐다는 식의 대단히 억지스러운 설정을 근간으로 삼거니와, 그 가운데 가가소소 앙천대소를 하게 만들었던 장면이 있었던 것이다.
백화점 문화 강좌에서 역사 강의를 하던 주인공 ‘재야 사학자’역을 맡은 조재현이 칠판에 무슨 날짜를 적은 다음, 어리벙벙해서 자리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들에게 이날이 무슨 날인지를 캐묻는다. 나 또한 그 날짜가 도무지 기억에 없는 날이었던지라 그 답을 곰곰이 기다리는데 조재현이 분기탱천하여 아줌마들을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명성황후가 돌아가신 날이야. 이 날을 모르다니 말이 돼?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의 분노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분노를 황당하게 받아내는 것으로 설정된 문화센터 아줌마 역의 엑스트라들에게 동화되는 야릇함이라니…… 그렇다. 아무리 열등생이었을망정 사학과를 졸업한 나도 그날을 전혀 몰랐다. 그런데 그게 1895년 10월 8일(양력)이다.
조선도 함께 개입된 민자영의 죽음
이날 새벽, 몇 달 전 부임한 이후 공사관에 틀어박혀 불경을 외우며 연막을 펴던 일본 공사 미우라는 광폭한 행동을 개시한다. 청일전쟁 이후 벌어진 삼국 간섭 (프랑스,독일 러시아가 일본의 요동 점령을 반대하고 나선 사건) 이후 콧대가 꺾인 일본을 러시아와 미국의 힘을 빌려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조선 조정에 무력을 행사하기로 한 것이다. 그 핵심 목표는 ‘여우’ 조선의 왕비였다.
하나 기억할 것. 이 ‘거사’는 일본인들에 의해서만 행해진 것은 아니다. 친일적이라는 이유로 해산을 명령받은 조선군 훈련대 병사들도 가담했고 대원군도 며느리를 노려 숱한 칼들이 범궐을 하던 그 시간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을 준비하고 있었다.
훈련대장 홍계훈 (임오군란 때 왕비를 죽이겠다고 눈이 시뻘건 구식 군인들 앞에서 왕비를 자신의 여동생이라고 업고 현장을 벗어났던 바로 그 사람이며, 후대의 소설이나 영화에서 왕비를 짝사랑한 것으로 묘사되는 장본인이다)이 일본 낭인들과 그 한 패인 조선군을 막아서다가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후, 지엄한 구중궁궐은 난폭한 군중들의 놀이터가 됐다. 왕의 침전에 칼을 든 폭도들이 몰려들었고, 왕세자는 상투를 잡히고 칼등으로 얻어맞아 혼이 나가 버릴 지경을 당한다
드디어 폭도들은 왕비의 거처에 난입한다. 하지만 이미 13년 전 임오군란 당시 궁궐에 난입한 폭도로부터 목숨을 보전한 경험대로 왕비는 왕비의 옷을 벗어던지고 궁녀로 변장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때 “이 사람은 내 누이 동생 홍 상궁이니라.”고 거짓말을 하여 그녀를 업고 도망갔던 홍계훈 (임오군란 당시 이름은 홍재희)이 광화문 앞에서 벌집이 되어 죽어 있었고, 그를 대신할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왕비는 아수라장 와중에 죽음을 당한다. 어떤 일본인 낭인은 자신의 칼집에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다”라고 새겨 자신이 조선의 왕비를 죽였음을 자랑했지만 그게 사실이라 해도 그가 그 사실을 안 것은 한참 뒤였을 것이다. 왕비의 죽음을 확인한 것은 조선군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시신은 기름이 끼얹어져졌고 한 줌의 흙과 뼛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왕비 세력을 일소하지 않으면 조선을 바꿀 수 없다”
한 나라의 왕비로서는 있을 수 없는 비참한 죽음이었으나 왕비 개인으로서는 그 죽음으로 그녀가 쌓아왔던 악명을 일거에 허무는 죽음이기도 했다. 나라의 명을 재촉하고 가빠져만 가는 숨통을 틀어막았던 민씨 척족의 우두머리였던 그녀의 목숨은 임오군란 당시 왕비를 때려 죽여라는 전무후무한 함성 속에 끝났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자신들의 나라 백성들을 때려잡아 달라고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이고 끝내는 자신의 나라를 다른 나라끼리의 전쟁터로 제공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일본 폭도들을 도운 조선군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의 말은 의외로 견결하다.
나는 무부(武夫)요. 특별한 정견은 없으나 그 당우(黨羽, 왕비 세력)을 일소하지 않으면 무슨 방법으로든 조선을 바꿀 수 없소.
- 『한말 인물의 회상』 권동진 저 중에서
우범선의 생각은 당시 왕비라면 이를 갈던 대다수 조선 백성들의 생각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아니기도 했다. 볼품없는 강아지도 밖에서 물어 뜯겨 피 철철 흘리고 들어오면 몽둥이를 들고 나가 뉘집 개가 내 개를 물었냐고 부르짖게 되는 법, 하물며 미우나 고우나 한 나라의 왕비가 외국인 폭도와 그와 결탁한 ‘역적’들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조선 사람들을 분격시켰다. 그리고 그녀는 신화가 된다.
궁녀 옷으로 갈아입고 몸을 피하던 와중 자신의 험담을 하는 아낙네들을 기억하고 이후 그 마을을 초토화시켰던 왕비는 “내가 조선의 국모니라.” 엄숙하게 선언하면서 폭도들을 위압하는 카리스마의 화신이 되었고, 소복 입고 “조선이여 일어나라 흥왕하여라.” 피를 토하는 애국의 여인이 되었으며 결국은 진보를 자처하는 ‘기자’의 입에서 “명성왕후가 나라를 말아먹었건 말건 역사는 역사로 받아들여 명성황후라고 불러야 하며, 그렇지 못하다면 세종대왕도 봉건통치자로서 이씨 가문의 이익을 위해 일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라는 어이상실의 멘트를 날리도록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이나 봉건 왕조의 신민들도 향용 썼던 ‘민비’라는 호칭이 공화국의 시민들에게는 큰일날 불경으로 받아들여지는 묘한 풍경을 펼쳐 냈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이면서 민비, 그리고 민자영이 비참하게 죽어간 날이다. 동시에 처참하게 죽음으로써 자신의 혼탁한 과거를 절묘하게 가릴 수 있었던 날이기도 하다. 이를 행운이라 불러야 할까 불운이라 불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