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태동기: 새로운 종교이자 삶의 방식
요즘의 과학은 돈과 명예같은 세속적인 것에 관한 것이 되었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오늘날 그것이 그렇다는것을 부정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과학은 항상 그래왔다는 주장에 저항하기도 힘들 정도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과학은 단순히 돈이나 명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새로운 문화였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었으며 어떻게 말하면 새로운 종교였다.
그에 대응하는 활동이 동양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과학의 뿌리는 서구다. 그리고 그 서구가 과학혁명을 일으켜 과학의 시대를 연 것은 바로 종교가 돈과 명예같은 세속에 대한 것이 되었을 때다. 얼마전 이제 손바닥만한 바티칸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교황이 한국에 방문하여 가난한 종교를 설파했지만 교황은 한때 유럽 대부분에 땅을 소유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권력자이며 부자였다. 뒤집어 말하면 가장 큰 가난한 농부의 수탈자였다.
가장 순수한 종교였던 과학
우리는 지금 대단한 것과 지금 시들어 줄어든 것을 항상 그랬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종교가 가장 번성했을 시대의 엘리트 유럽 청년에게 당연한 직업전망은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할 능력이 있고 환경이 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오늘날 서울대나 MIT에서 교수가 될 능력과 기회가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과 비슷하게 보였을 것이다.
성직은 권력과 돈과 함께 부패했다. 사실 그 안에 들어가서 다르게 살 방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저 거대한 시스템의 한 부속으로 그 부패가 진행되는 것을 촉진하기 위해 일했을 뿐이다.
시스템은 당연히 재능있는 자를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 뽑아 올렸고, 일단 시스템의 일부가 되면 개인들은 느끼게 된다. 누구 한 개인이 이 시스템을 정화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 졌다는 것을. 연금설계가 잘못되어 국가재산이 파탄나고 있어도 어떤 개인이 모두들 물러서고 손해봐서 고칩시다라고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듯이 말이다. 모두가 그런 엘리트코스를 걸어서 자기몫의 풍요를 누리겠다고 줄서 있는데, 그런 시스템이 그토록 거대해 졌는데 어떻게 한 개인이 그 관성을 뒤집을 수가 있겠는가.
아직 과학의 세기가 본격화되지 않았던 시절, 어쩌면 가장 순수한 종교인들은 과학자였다. 왜냐면 그들은 자연의 법칙을 추구했는데 당시로서는 종교적 이유가 아니면 그런걸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이란 주제가 모든 논의의 중심에 있을 때 신학이 모든 학문의 이유가 된다. 자연법칙의 탐구도 신의 위대함을보여주는 도구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된다.
부유한 성직자들이 밤이고 낮이고 권력이니 세력싸움이니 돈문제를 가지고 골몰하는 동안 여전히 어딜봐도 돈이 될 수 없고, 소수의 순수한 사람들만이 관심을 가질 자연법칙을 탐구하는 것에 헌신하는 과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 시대에 가장 순수한 종교인들중의 하나였고 주류문화의 한구석에 붙은 아마추어 취미활동을 즐기는사람들이었다. 기분 나쁘면 불러다가 이단이라고 부르고 화형을 시키거나 자기 주장을 번복하도록 재판에 붙일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세속화되어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도구가 된 과학과 학문
그러나 역사는 보여준다. 성직이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것이 되었을때 그들이 보기에는 비합리적이고 시시해 보였던 과학자들이 그들을 대체 하기 시작하였다. 세상은 더 이상 신에게 의존하며 돌아가지 않고 자연의 법칙에 의존하며 돌아가게 되었다. 수많은 천재들이 이 사업에 뛰어들고 대학이 번창한다. 드디어는 라플라스같은 사람이 신과 같은 가정은 필요없다고 선언하는 시대가 오고, 유럽인들에게 이제 종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오늘날 과학은 중세의 종교이상으로 돈과 명예에 대한 것이 되었다. 나는 이제까지 과학에 대해서 말했지만 사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이란 학문의 전부가 아니면 대부분을 말한다. 그 사고방식의 측면에서 그들은 같은 기초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법칙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도 사회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돈과 명예를 위해서 하는 학문 바로 세속화된 학문은 이제 직업이 되었다. 즉 일을 하면 돈과 명예를 돌려받는 거래가 되었다. 전세계에는 수없이 많이 그들의 교회가, 즉 대학이 서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늘날 MIT 교수가 될수 있는 청년이 그걸 거부한다는 것은 완전히 미친짓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돈이나 명예와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에 골몰하는 사람들을 취미 사상가라고 부르기로 해보자. 이런 학문의 세속화 시대에 취미사상가들은 멸종하는 희귀한 사람들이거나 멸종의 위협을 당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어떤 특정한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이런 사람들을 추방하거나 박해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쓴 것때문에 대학교수나 총장들을 모두 나쁜 사람으로 부패한 인간으로만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그런 사람도 많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시스템의 문제다.
대학에 돈을 가지고 오는 교수가 칭송받는 사회
자기 시대 이야기를 하면 편견이 들어가기 쉬우니까 다시 서구 중세로 돌아갔다고 관찰자로 생각해 보자. 종교가 방대한 권력과 부를 소유한 시대에 어떤 사람이 그 시스템에 많이 필요할까? 권력과 부는 많으니까 그것과는 상관없는 사람일까? 아니다. 더더욱 권력과 부를 지키고 불려나가는데 수완을 발휘할 사람이다. 그들이 그렇게 할수 있다는 것은 찬양받고 따라서 그렇게 할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종교의 수호성인으로써 훌룡한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다시 현대로 돌아와 보라. 더 많은 연구비를 모아올수 있는 대학교수, 국제저널에 논문을 마구 출판하는 교수, 더 많은 예산을 만들어 내고, 기부금을 받고, 투자운영을 잘해서 대학을 부자로 만들어 내는 총장이 칭찬받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학문의 진정한 수호성인으로 여겨지지 않는가? 이 시대적 유사함은 우리에게 한가지를 묻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화형당한 부르노나 종교재판을 받은 갈릴레오를 양산하고 있지 않은 것은 확실한가?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몇년전에 학자와 오타쿠라는 글에서 쓴적이 있다. 다르게 말하면 학문이 세속화될 때 오타쿠 혹은 취미적 사상가들은 몰려난다. 더 많은 돈을 투자하고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면 당장은 결과가, 특히 논문같은 것이 양산되어져 나올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산효율 다시 말해 논문 한편을 생산하기 위해 드는 돈이라던가, 양질의 과학적 성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드는 돈의 차원에서 나빠질 것이다. 논문 사기 사건도 터질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그랬듯이 말이다. 오늘날 교황은 다시 가난하지 않은 성직자는 옳지 않다고 말한다. 나는 가난하지 않은 학자는 옳지 않다고 해야 할까? 문제는 주객이 뒤바뀌는 것이다.
최근에는 과거의 종교가 그랬듯 지금의 시스템도 내부로부터의 개혁은 불가능하며 결국 그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비참한 몰락만이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런 미래는 어쩌면 먼 미래가 아니라 코앞에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때가 있다.
대안이 없더라도 질문과 비판이 필요할 때
빌 게이츠와 마크 주커버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중퇴했다. 스티브 잡스도 제대로 대학교육을 못받고 리드대학중퇴의 학력을 가졌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서 가장 많이 떠들어 대는 사람들에 이 사람들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이들이 아니라도 나는 한국에 대해 생각할 때도 번번이 가장 똑똑한 사람은 혹시 대학을 안나와야만 하는건가 하는 생각을 한적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교수들이 학생머리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빌 게이츠나 마크 주커버그가 MIT교수보다 훨씬 큰 부와 영향력을 가졌다는 점이 아니다. 모든 것이 세속화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데 그걸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요점을 보지 못하게 된다. 돈은 기업이 가졌으며 대학이 가진게 아니라는 지적도 옳다. 그러나 우리가 종종 말하는 것처럼 자본이나 시장이라는 것이 스스로 움직이는물건은 아니다. 언제나 그 뒤에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 있다.
우리를 지배하는 사고 방식의 교회가 바로 대학이다. 우리로서는 그것을 꽤뚫어보기가 힘들 뿐이다. 사실 저절로 법칙에 따라 자본이나 시장이 움직인다는 시각자체가 바로 과학적, 법칙적 시각이다.
이 글에서 내가 대안적 사고 방식을 논할수는 없다. 첫째로 나도 답을 모르고 둘째로 내 생각이 있다고 해도 글말미에 몇줄로 쓸수 있을 분량은 아니다. 흥미를 위해 말해보자면나는 우리가 인간의 마음을 좀 더 깊이 공부하는 시대로 가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답이 뭐가 되든 결국 우리는 답보다 일단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면 답을 찾지는 못한다고 해도 모두 진리라던가, 삶의 의미, 가치 따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종교도 과학도 실은 모두 이런 질문에 대해 성실하게 고민했던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생각과 문화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조금씩 일어나는게 아니라 어떤 혁명적 변화를 겪고 거의 앞 시대와 단절되다 시피하는 까닭은 하나의 아이디어, 하나의 문화적 흐름이 주류가 되면서 원래의 질문을 잃어버리고 지나치게 세속화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었는데 어느새 먹기위해 살게 되어 버린 것이다. 지나치게 세속화되어 버린 시스템은 그 관성을 해결할 수가 없고 결국은 철저히 비판받고 대체되어 질 것이다.사실 시간이 지나도 항상 질문은 같은 데 말이다.
하지만 그 질문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 미래의 주인공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