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정론직필 언론인의 사설
전쟁이 끝난 뒤 2년이 갓 넘을 무렵의 세상은 살벌하고 어지럽고 무엇보다 전쟁의 광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휴전 이후 내내 시끄러웠던 중립국 감시단 문제는 그 일각이었다. 중립국 감시단으로 남측은 스위스와 스웨덴을 내세웠고 북측은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를 내세웠는데 체코와 폴란드가 소련 영향 하의 ‘빨갱이 국가’라는 점은 빨간색만 보면 흥분하던 이승만 정권으로서는 수용불가의 문제였다.
외교적으로 어찌해 볼 역량 따위는 충청북도 갯벌만큼도 없었으니만큼 할 수 있는 일은 휴전 협정 반대 데모 때부터 즐겨 썼던 ‘궐기대회’가 다였다. 행정 조직은 동네마다 지역마다 더 많은 인원울 동원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고, 중립국 감시단 반대 데모는 ‘요원의 불길’ 처럼 일어났다.
특히 서울에서 고위 인사가 지방 나들이라도 나올라치면 그 눈에 들기 위한 ‘자발적인 움작임’은 더욱 맹렬하게 불을 뿜었다. 가장 용이한 동원 대상은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이었다. 대구에 UN대표부 대사이자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임병직이 방문했을 때 수천 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전폐하고 대구의 늦더위 아래에서 4시간 동안이나 목이 쉬어라 체코 폴란드 물러가라 외쳤던 풍경은 한 지사적 언론인의 인내력에 구멍을 뚫었다.
1955년 9월 13일, 대구매일신문의 주필 최석채는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을 싣는다.
“….최근 대구시내의 예로서는 현관의 출영에까지 학생들을 이용하고 도열을 지어 3, 4시간 동안이나 귀중한 공부시간을 허비시키고 잔서(殘暑)의 폭양(暴陽)밑에 서게 한 것을 목격하였다. 그 현관(顯官)이 대구시민과 무슨 큰 인연이 있고, 또 거시적으로 환영하여야 할 대단한 국가적 공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수천 수만 남녀학도들이 면학(勉學)을 집어치워 버리고 한사람 앞에 10환씩 돈을 내어 수기를 사 가지고 길바닥에 늘어서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치 못한다…..”
야만의 끝 “백주(대낮)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
사실 이 사설이 유명해진 것은 그 명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사설을 보고 난리를 떨었던 군상들의 대응들이 너무나 유치하고 어이가 없음과 동시에 야만적이었던 탓에 최석채의 사설은 더욱 이름을 떨치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설이 실리자마자 대구 시내에는 “대구매일의 이적행위를 규탄한다!”, “대구매일의 사설 필자 최석채를 처단하라!”는 문구가 적힌 벽보가 곳곳에 나붙었고, “사설 중 문제된 일부를 취소할 것, 집필자를 처단할 것, 사과문을 대구 시내 4개 일간 신문에 게재할 것”을 요구하는 통고문이 대구 매일신문사에 보내졌다.
이때만 해도 대구는 최대의 야당 도시였다. 대구 매일신문이 이 통고를 묵살하자 오후 4시 10분 경 국민회 경상북도 본부 총무차장 김민, 자유당 경북도당부 감찰부장 홍영섭 등 20여 명의 정치 깡패들이 대구 매일신문사를 습격, 사원들에게 중경상을 입히고 인쇄시설을 파괴한 후 달아난다. 이런 황당한 사태에 직면한 국회에서 화급히 내려보낸 진상조사단 앞에서 경북도경 사찰과장 신상수 (이런 이름들은 기억해 줘야 한다)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긴다.
“백주(대낮)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
테러는 당연히 으슥한 밤이나 미명의 새벽에 이뤄지는 것이 정석인 바,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 행해진 행동들이 어찌 테러일 수 있겠는가 하는 반문이자 선언이었다. 아마 이런 역설은 세계사에도 드물 것이다. 이 망언의 역사는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고백과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하여 구입했을 뿐이다”는 친환경 독백과 “25퍼센트를 넘었으면 사실상 승리”라는 억지로 면면히 이어지는 야만의 시조이기도 하거니와, 그 통렬한 허 찌름은 그 후계 망언들의 빛을 바래게 하기에 충분하다.
여전히 계속되는 야만
더욱 감동적인 것은 대한민국 국립 경찰이 언론사를 습격하여 직원들은 곤죽으로 만들고 윤전기를 때려 부순 정치 깡패들은 검거하지 않은 채 매일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 최석채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는 사실이다. 멋지다 국가보안법, 장렬하다 국가보안법.
그 논리는 최석채의 사설이 체코, 폴란드 등 북측 중립국 감시단의 활동을 용인했을뿐더러 북한방송에서도 인용됨으로써, ‘적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널리 북한을 이롭게 하는 놈들은 내 밥이다’는 홍북인간 (?) 정신은 그때도 요즘처럼 발휘됐다. 아… 참, 차이는 있다. 1955년 당시 김병로 대법원장 하의 사법부는 초지일관 최석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요즘의 사법부? 애써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1955년 9월. 한 언론인은 자신이 목격한 현실에 치를 떨면서 자신의 인생을 지워버릴지도 모를 검은 먹을 갈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건 아니며, 이래서는 아니되며, 여기에 눈감으면 나는 사람이 아니다는 생각으로 그는 붓을 들었고, 시련을 겪었다. 그 이름을 기억하자 최석채. 그 사설 때문에 난리가 난 뒤, 한 경찰 간부가 말한다.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지.” 기억하자 경북도경 사찰과장 신상수. 이완용만 나쁜 놈이 아니다.
그리고 2014년 우리는 ‘원장님 말씀’에 따라 자국민을 상대로 ‘심리전’을 행하며 ‘좌익효수’니 뭐니 하는 희한한 아이디로 노골적인 선거 개입을 했던 정보기관의 수장에게 ‘국정개입은으로 인한 국정원법 위반은 유죄이지만 공직 선거법 위반은 무죄’라는 엽기적인 판결에 접한다. 이완용, 신상수만 나쁜 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