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의원 50명으로 이루어진 국회인성교육 포럼에서 초·중학교의 인성교육을 의무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인성교육법을 내년4월 중에 통과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법에는 인성교육 교과의 시수를 법으로 정하고, 각 시도 교육감은 인성교육 계획을 수립하고, 각급 학교는 인성교육에 예산의 일정 부분을 반드시 할당하도록 되어 있다.(기사원문보기). (주: 이 글은 2013년 쓰인 글로 2014년 5월 발의되었습니다.)
이 법안을 입법예고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요즘 어린이나 청소년의 인성에서 많은 위험요인들이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학교폭력만 해도 거의 30년간 큰 변화가 없다가 1997년에서 2000년까지 3년 만에 거의 10배 가까이 폭증했고,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학생에 의한 교권침해도 거의 10배 이상 폭증했다.
인성교육에 대한 책임전가
문제는 이것이 과연 인성교육 시간을 늘리거나 강화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 인성교육 부족이 문제였다면 교과수업 이외에 특별한 인성교육이나 수련 혹은 체험 프로그램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1980년대는 지금보다 훨씬 학생 인성이 황폐했어야 했다. 그러나 데이터는 정 반대의 사실을 보여준다.
인성교육 시간이 늘어난 2000년대 학생들의 각종 인성 지표가 인성교육이 전무했던 80년대 학생들보다 훨씬 황폐하다. 이는 학생들의 인성을 황폐화 시킨 원인은 인성교육의 부족이 아니라 다른 것이며, 인성교육이 여기에 따라 계속 강화되어왔지만 이를 막기에 역부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학생들의 인성을 이토록 빠르게 황폐화 시켰고, 인성교육을 언발의 오줌누기로 전락시킨 것일까? 사실 그 답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며, 누구나 직관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갈수록 치열해진 입시경쟁교육,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불안해지는 진로다. 1980년대만 해도 입시지옥은 고등학생이나 되어야 경험하는 것이었다. 또 대학에 진학하면 삶의 경로가 비교적 튼튼해졌기 때문에 도전할만한 가치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입시지옥은 중학교를 거쳐 초등학교, 심지어 미취학 시기까지 내려갔다. 게다가 선행학습으로 남보다 앞서 나가려는 욕심이 지나친 나머지 초등학생이 고등학교 수학을 배워야 할 정도로 강도가 높아졌다. 이는 높은 청년 실업률이 보여주듯 대학이 아니라 소수 명문대학에 진학해야만 할 정도로 경쟁 강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가정의 인성교육 기능도 무너졌다. 1980년대만 부모는 입시경쟁으로 지친 학생들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부모는 젖떼기가 무섭게 순간부터 아이를 입시경쟁의 아레나에 밀어 넣어 싸움을 독려하고 있다. 부모가 입시지옥의 완화제가 아니라 원인제공자가 되었고, 가정이 쉼터가 아니라 막사가 되었다.
이렇게 자신을 싸움터로 내모는 부모 아래에서 겨우 말이나 배웠을 나이부터 경쟁에 시달린 아이들이 사춘기 연령에 도달했을 때 어떤 인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상처받고 외로운 짐승들이 사나워지듯, 상처받고 외로운 청소년들은 시한폭탄 같은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은 백년지계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외로운 손을 잡아 줄 곳이 없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따뜻한 분위기와 안정된 포근함을 느낄 곳이 없다. 그런데 세상은 이들에게 인성이 글러먹었다며 인성교육을 받으라고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성교육 강화가 과연 효과를 볼 수 있을까? 오히려 학교에서 받아야 할 교육의 종류만 하나 더 생긴 아이들이 짜증이나 낼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교육이 백년지대계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교육 정책을 결정할 때는 신중해야 하고, 문제가 되는 현상만 보지 않고 교육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인성이 문제가 되면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역사관이 문제가 되면 역사교육을 강화하는 식의 대증요법은 그 순간 순간 여론의 바람막이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해결은커녕 부작용만 불러올 수 있다.
인성교육이라는 말 자체가 동어반복이며 옥상옥이다. 근대 교육학의 아버지 헤르바르트가 언명했듯, 교육학의 목표는 도덕의 인식과 실천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다. 지식교육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함이며, 덕성교육은 일단 무엇이 옳은지 가려내었으면 실천하는 성향을 길러 주기 위함이며,체육교육은 그러한 실천의 바탕이 되는 건전한 신체를 가꾸기 위함이다.
모든 교과가 바로 인성교육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서로 조화를 이루며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공교육의 목표가 인성교육인 것이다. 인성이란 지성과 덕성과 건강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역대 교육과정 중 인성교육을 목표로 삼지 않았던 교육과정은 하나도 없다. 인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원인은 법이 없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
올바른 문제인식이 필요
우리 학생들의 인성이 황폐해지고 인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은 교육과정이 잘못 되었다거나 인성교육을 경시했다기 보다는 인성교육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는 교육과정이 파행적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교육과정을 파행으로 내몰았는지는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다.
교육과정이 무시되면서 파행적인 입시교육이 실시되었고, 교육과정을 교란하면서 각종 선행학습이 횡횡하였고,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교육과정을 엿가락처럼 이리저리 주무르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사 총체적인 인성교육을 목표로 하고 있는 교육과정이 갖춰져 있다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요즘 아이들의 인성이 걱정되면 해법은 간단하다. 입시교육을 중단하고, 교육과정을 왜곡시키는 사교육을 규제하고, 불안에 들떠 아이들을 아레나로 몰아넣고 있는 학부모에게 쓴소리를 하라. 이 어려운 길이 두려워 외면하고서 내어 놓는 어떤 정책도 문제의 핵심에는 다가가지도 못할 것이며, 공연한 예산 낭비와 학교 업무의 증가라는 부작용만 낳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건데 학생들의 인성이 황폐해진 원인은 인성교육의 부족이 아니며, 청년 실업의 원인은 진로교육의 부족이 아니다. 이것이 하루가 멀다하고 학교에 인성교육,로교육 공문을 내려보내는 교육 당국이 깨달아야 할 불편한 진실이다.
원문 : 부정변증법의 교육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