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이 밝았다. 새벽종이 울리고, 새 아침이 밝았다.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제 십팔대 대통령인 박근혜 정부와 함께 ‘잘 살아보세’의 신화를 다시 한 번 이룩할 첫 해이기도 하다. 아마 지금쯤 박근혜 대통령을 염원했던 5.16(%)의 사람들은 부푼 기대와 벅찬 희망으로 가슴이 출렁출렁 요동치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에는 이면이 있는 법. 박근혜 대통령에 환호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대선 출구조사 결과 발표 직후 ‘멘붕’에 빠져 지금까지도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실제로 내가 아는 한 깨시민은 19일 이후부터 여지껏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만 퍼마시는 중이다. 또 원래 사회당 지지자였지만 ‘박정희 딸이 대통령이 되는 꼴은 절대 못 본다’는 이유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2번을 찍은 지인 하나는 대선 이후 영 입맛도 없고 발기도 시원치 않다고 호소한다. 저마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적지 않은 수의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 탄생’에 깊은 무력감과 멘탈 용해를 경험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물론 ‘ㅍㅍㅅㅅ’는 궁서체까지 써가며 박근혜 대통령을 적극 지지하는 정통 보수 매체인 만큼 대선 결과로 인한 멘붕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일부 트위터리안 사이에서는 ‘딴지일보 우파 버전 사이트’ 또는 ‘보수판 텐아시아 같다’는 극찬도 듣지 않았던가. 그러나 당선인께서 ‘통합’과 ‘100% 대한민국’의 가치를 워낙 강조하시고, 이에 발맞춰 대중적이고 쉬운 언어 구사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이를 대변인으로 임명하는 대통합 행보를 보여주시는 와중에 마냥 51.6%의 기쁨만을 생각할 수는 업는 일. 통합의 시대에 발맞춰 박근혜 대통령을 찍지 않은 48%의 마음도 부드럽게 애무해주고 마데카솔을 발라서 치유해줘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다.
멘붕에서 탈출하는데 영화만큼 좋은 해결책도 없다. 일찍이 히치콕 감독도 ‘영화란 인생의 지루한 부분을 커트한 것’이라 하지 않았나. 적어도 영화가 돌아가는 동안에는 세상 근심걱정도 지금 대통령이 누구인지도 잠시 잊을 수 있다. 또는 ‘레 미제라블’에서 즈앙발즈앙의 희생을 보며 노무현이 생각나서 펑펑 울었다는 한 시민 깨인처럼 극한의 정신승리와 제논에 물대기를 시전하는 것도 가능하다. 영화에는 멘붕을 씻어내는 힘이 있다. 그래서 준비해 봤다. 소외된 48% 국민들의 멘붕을 말끔하게 씻어줄 ‘힐링무비’ 7편이다.
[탐욕] – 에릭 본 스트로하임 감독, 깁슨 고우랜드 주연
제아무리 멘탈이 강인한 사람이라도 한번 붕괴된 멘탈을 다시 끌어 모으고 모아서 일으켜 세우는데는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첫 번째 영화는 끝까지 보는데 오랜 시간을 요하는 대작 장편영화로 골라봤다. 초창기 영화감독이자 배우로 이름을 날린 스트로하임의 [탐욕]이다. 1925년작인 이 작품은 프랭크 노리스의 [맥티그]를 각색한 영화인데, 러닝타임이 무려 9시간 30분에 달한다. 지금껏 풀타임 버전을 감상했다는 사람은 한 번도 못 봤다. 내가 본 버전은 2시간 20분 짜리였는데, 상영시간 30분이 지났을 무렵 화장실이 몹시 급해서 국가적인 위기상황을 맞이했지만 영화관 구조상 도저히 화장실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의사 부부가 복권에 당첨되는 초반부 전개는 이미 머리에서 사라졌다. 1시간이 지났을 때는 거의 실성에 가까운 정신상태가 되었고, 2시간 즈음에는 모든 것을 체념했으며 영화가 끝났을 때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깊은 성취감을 경험했다. 그와 같은 강인한 정신력이라면, 박근혜 대통령 아래서의 5년도 얼마든지 꿋꿋하게 견뎌낼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영화 풀버전에 한번 도전해보길 권한다. 참고로, 무성영화에다 흑백영화다. 영화를 보노라면, 어느새 다음 대선 때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주글래 살래] – 김두영 감독, 김승현 주연
멘붕을 씻는 또 하나의 방법은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 나보다 훨씬 못난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 것이다. 네이버 평점 4.88에 빛나는 [주글래 살래]를 추천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계의 거장 김두영 감독의 대표작이다. 감독데뷔 초기 [카리스마]의 감독, [로켓트는 발사됐다]의 연출 등을 통해 걸출하고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준 김 감독은 2002년 이 영화 [주글래 살래]를 통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선명한 방점을 찍었다. 이 영화는 배우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열연으로 유명한데, 생고기로 두들겨 맞는 주연배우 김승현이나 시궁창 물을 들이마시며 박남현에게 두들겨 맞는 곽진영, 피자에 대고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남창희 등이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인물.
보다보면 ‘영화배우들이 겉보기엔 화려해 보이지만 정말 힘들게 벌어먹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 ‘이런 영화에 출연하는 경험에 비하면 박근혜 시대 5년은 그래도 살만한 축에 들겠구나’ 라는 깨달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김대중-김정일 캐릭터 때문에 햇볕정책과 민주당에 대해 없던 적개심까지 생기는 효과는 덤이다.
[주글래 살래]는 보는 이에게 희망도 선사한다. [주글래 살래]가 개봉한 것은 2002년. ‘감독님 주글래?’라는 네이버 댓글이 시사하듯이, 이 영화로 인해 김두영 감독의 경력은 사실상 끝장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김 감독의 영화에 투자하겠다는 제작자가 등장했고, 출연하겠다는 배우도 나타났으며, 심지어는 세계적인 스타 스티븐 시걸까지 김두영 감독과 의기투합했다. 그 결과 2년 뒤인 2004년 ‘죽기전에 꼭 봐야할 한국영화 100’에서 첫손에 꼽을 걸작 [클레멘타인]이 탄생했다.
[클레멘타인]의 네이버 평점은 9,26으로, 댓글을 봐도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의 눈물을 쏟았다는 호평 일색이다. 특히 마지막의 ‘아빠 일어나’ 씬은 한국영화를 넘어 세계영화사를 통틀어도 좀처럼 보기 드문 명장면이다. [주글래 살래]를 찍은 감독에게도 또 한번의 기회는 주어졌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고, 망할 때까지는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48%의 국민들도 다음번 기회에 대한 희망을 가지시라. 다만 2004년을 끝으로 김두영 감독의 신작이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게 함정.
[그때 그 사람들] – 임상수 감독, 백윤식/한석규 주연
시간으로도, ‘아빠 일어나’라는 절절한 외침을 듣고도 멘붕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대놓고 정신승리를 시도하는 것도 방법이다. 10,26 사건을 그려낸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이 제격이다. 영화에서 박정희는 주색에 빠져 정신 못 차리는 늙은이로 희화화되고, 감독에 의해 한껏 조롱을 당하다, 결국에는 부하의 총에 맞아 죽는다. 대통령 뿐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권력있는 자들이 우스꽝스럽게 묘사된다. 물론 박정희가 등장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대통령 당선인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부작용은 피할 수 없다, 앞서 Bayesian님이 멋진 글을 통해 알려주신 ‘불쾌한 기억에서 벗어나는 방법’과는 정반대로 향하는 길이니, 알아서 잘 판단하시길.
[로얄 어페어] – 니콜라이 아르셀 감독, 알리시아 빈칸데르/매즈 미켈슨 주연
좀 더 고차원적인 정신승리를 하는 방법도 있다. 비록 지금은 보수가 승리하고 역사가 퇴행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먼 훗날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는 쪽은 ‘진보’가 될 거라고 위안을 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최근 개봉한 영화 [로얄 어페어]를 권한다. 영화의 배경은 18세기 덴마크. 주인공은 정신분열증을 앓는 왕 크리스티안 7세와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으로 건너온 왕비, 그리고 왕의 주치의인 요한 스트루엔시 이렇게 세 명이다.
당시만 해도 수구적인 국가였던 덴마크에서 영국 젊은 왕비와 독일 출신 육체파 의사는 계몽주의 사상에 물든 이질적인 존재들이다.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육체적으로도 하나가 된 두 사람은 왕의 신뢰를 등에 업고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련의 개혁 정책을 밀어붙인다. 천연두 예방접종, 검열폐지, 고문금지, 출판의 자유보장 등이 대표적이다. 너무 정치 얘기만 나오면 관객이 따분할까 걱정했는지, 중간중간 왕비와 의사의 ‘ㅍㅍㅅㅅ’ 씬도 보여준다.
하지만 기득권 귀족들의 반발이 점차 거세지고, 심지어는 귀족들의 선동에 넘어간 백성들도 –개혁법안이 실은 자신들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트루엔시에 저항한다. 아마 ‘시민 깨인’들이라면 이 대목을 보면서 ‘자신들을 위한 후보 문재인 대신 박근혜를 찍는 무지몽매한 서민과 노인들을 보는 것 같다’고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결국 반대파에 의해 왕비와 의사의 관계가 발각되면서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난다. 의사는 참수형을 당하고, 왕비는 유폐된다. 모든 개혁 정책은 원위치로 돌아간다.
여기서 끝이라면 덴마크판 야권 멘붕 스토리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반전은 영화가 끝난 뒤에 있다. 왕비와 의사가 추진했던 정책들은 왕자였던 프레데릭 6세가 즉위한 뒤에 대부분 다시 살아났다. 오늘날 덴마크는 세계 최고의 복지시스템을 갖춘 국가로 꼽히며, 유럽 전체의 우경화 흐름 속에서도 좌파정당인 사민당이 집권하고 있다. #민주당은 좌파정당이 아니라는 게 함정_
[찰리 윌슨의 전쟁] – 마이크 니콜스 감독, 톰 행크스 주연
입헌군주제 국가인 덴마크 역사 이야기가 영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면, 미국 정치권 이야기로 눈을 돌려 보자. [찰리 윌슨의 전쟁]은 마이크 니콜스 감독과 애런 소킨이 힘을 합쳐 만든 ‘민주당 투표독려’ 영화다. 1980년대 텍사스 하원의원 찰리 윌슨(톰 행크스)의 실화를 소재로 삼았다. 주인공 찰리는 로비스트, CIA 요원과 힘을 합쳐 아프가니스탄에 무기를 지원하고 마침내 소련군대를 내쫓는데 성공한다. 찰리는 사생활은 다소 문란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투철한 국가관, 프로다운 일처리 솜씨를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반면 기독교 근본주의자로 채워진 공화당 정부와 관료들은 무능하고 현실감각이 떨어지며 민주주의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존재들로 대조를 이룬다.
영화는 부시 정부 말기인 2007년에 개봉했다. 그래서인지 곳곳에 ‘민주당에 투표하라’는 메시지가 가득한데,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은 찰리와 보좌관 보니(에이미 아담스)의 대화 장면. 찰리는 자신이 흑인 100여명을 투표하게 선동해서 이웃에 사는 못된 구의원을 낙선시킨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게자신이 민주주의를 사랑하게 된 계기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감동한 보니는 마치 장화신은 고양이 같은 눈망울로 의원님을 바라본다. 길게 말할 것 없이, 민주당 찍으라는 얘기다.
영화는 민주당을 찍지 않으면 생길 수 있는 나쁜 결과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찰리 윌슨의 노력은 아프간에서소련이 철수하면서 처음에는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공화당 정부는 아프간에 대한 교육과 복구 사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찰리의 계획을 묵살한다. 결과는 ‘그 뒤로 우리는 죽을 쒔다’는 찰리의 나레이션 그대로다. 아프간은 극심한 내전과 소련 시절보다 더한 참사에 시달리고, 이는 탈레반 같은 세력이 힘을 키우는 결과를 낳는다. 찰리가 지원한 무기들은 좀 더 시간이 흐른 뒤 미국을 겨냥한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다.
만일 멍청하고 무능한 공화당 정권이 아니었다면, 정권에서 찰리의 아프간 재건 계획을 승인했다면,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게 이 영화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민주당 지지자들로 가득한 헐리우드 영화다운 결론이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공화당을 새누리당으로, 미국 민주당을 한국 민주당으로, 아프간 정책을 햇볕정책 등등에 적당히 끼워맞춰서 마음껏 딸딸이정신승리의 나래를 펼쳐보자.
[미스트] –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 토마스 제인 주연
정신승리로도 멘붕이 어떻게 해결이 안 된다면, 이제는 현실을 인정하고 체념할 차례다. 많은 야권 지지자들이 박근혜를 선택한 51.6%를 죽어도 이해할 수 없다고 호소한다. 박근혜를 찍는 것은 너무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바보짓이라며 절규한다. 아직까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화한 [미스트]를 보며 생각을 바꿔보자.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멍청하고 무모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초반부에 나오는 아이 엄마처럼 보인다. 반면 주인공인 데이빗은 시종일관 냉정하고 침착하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안개가 모두 걷히고 군인들이 나타나는 순간, 상황은 단숨에 역전된다. 모든 조건을 따져볼 때 가장 올바른 것처럼 보였던 데이빗의 선택이 알고보니 최악의 결정이었음이 드러난다. 멍청한 희생자처럼 보였던 아이 엄마는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 인간 이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그리고 박근혜를 찍은 –깨시민들이 무지몽매하다고 그렇게도 욕하는- 이웃집 노인들의 선택이, 알고 보면 옳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어쩌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데는 우리의 깜찍한 머리로는 미처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우주적인 계시나 거대한 계획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박정희 향수를 더 이상 미련의 여지없이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서라든가, 아니면 영화속 마을처럼 한국을 초토화시키기 위해서라든가…
[퍼스트 레이디 – 그녀에게] – 한창학 감독, 한은정 주연
이제 최후의 단계까지 왔다. 지금까지 본 6편의 영화로도 멘붕이 해소되지 않았다면,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어차피 박근혜를 아무리 반대해 봐야 달라질 현실도 아닌데, 기왕 이렇게 된거 가카의 말씀대로 마음을 편안하게 먹자.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자. 과거 만주군과 국군과 남로당을 자유로이 오갔던 어떤 분처럼, 반박 진영에서 친박으로 갈아타는 거다. 원래 우리 편의 승리를 원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어린 시절 쌍방울을 응원하던 한 친구는, 맨날 지는게 지겹다며 해태 팬으로 전향한 뒤 혈색도 좋아지고 변비도 사라지고 정력도 강해졌다.
친박이 되기로 마음먹고 나면, 남은 5년이 보다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머지않아 완성될 시대의 역작 [퍼스트 레이디-그녀에게]의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자. 육영수 여사의 일대기를 그린 이 영화는 시나리오 작가 출신인 한창학 감독이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았다. 한 감독은 2000년 [찍히면 죽는다]라는, 거의 [주글래 살래]급 명작의 각본을 쓴 바 있다. 굉장한 작품이 탄생할 것 같아 기대가 크다.
김두용 감독에게 맡기면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