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느닷없이 만리타향 독일에 출현한 한국인들 꽤 많았다. 60년대 초반 광부들이 갔고 1966년 10월 2일부터는 여자 간호사들이 추가됐다. 간호사 파독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이수길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독일에서) 내가 담당하고 있던 병동에 23명의 영아 환자들이 있었는데 배속된 간호사가 부족해서 아기들에게 그때마다 우유를 먹이지 못하고 있었다. 병원장 말이 당시 독일에 최소한 3만 명의 간호사가 부족한 상태라고 했다…… 한국 보건사회부에 알아보니 한국에는 간호사 자격증을 가진 3천 명의 여성들이 실직상태라고 했다.”
풍요한 나라의 부족한 일손과 부족한 나라의 풍요로운 일손은 그렇게 궁합이 맞았다.
치열한 경쟁 끝 선발, 눈물의 출국
파독 간호사 선발 과정 역시 광부 때와 마찬가지로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다. 그 와중에 탈락한 간호사들이 왜 내가 탈락했냐며 강력히 항의를 하는 소동이 빚어졌고 “얼굴이 예쁜 여자들만 뽑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아 주관하는 측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우여곡절을 거쳐 1966년 10월 2일 파독 간호사 128명은 비행기트랩을 오른다. 김포공항은 마중 나온 가족들과 먼길 떠나는 딸들의 이별 와중에 눈물바다를 이루었는데 당시 사진을 보면 간호사들은 모두 곱게 차려입은 한복을 입고 있다. 무슨 뜻이었을까. 언제 입어볼지 모를 한복을 마지막으로 입어 본 것이었을까. 아니면 일종의 외교 사절단으로 일률적으로 한복을 입힌 것이었을까.
김황식 전 총리는 ‘파독간호 평가사업 최종보고서’를 인용하여 어떤 간호사의 다음과 같은 회고를 소개한 바 있다.
“처음 프랑크푸르트에 내릴 때 한복을 모두 입고 내렸지요. 남산 타워 같은 곳에 갔는데 우리 테이블에 태극기를 꽂아 주는거야. 그때 모두 울었어요.”
재미있는 것은 간호사들은 초반에는 항상 128명 단위로 파송되었다. 1차도 128명 2차도 3차도 128명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제트여객기 중에서 제일 큰 기종이 ‘DC 8’ 이었는데 총좌석수가 129석이었다. 그러니까 내 자리 하나 빼서 128명이 된 것이다.” (재독교포 김운경과 이수길 교수의 대담 중) 좌석 하나의 여유도 없이 꽉꽉 채워 독일로 날아갔던 사람들……
성실함으로 인정 받은 그녀들의 말년
간호사들은 악착같이 일했다. 단 몇 주도 안되는 독일어 교육을 받고 왔을 뿐인 그들에게 독일어는 한없이 낯설었지만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환자에게 매달렸다.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했지요. 3개월 지나고부터는 간호조무사와 함께 팀을 짜서 병동에 배치가 되었는데 주사 놓고 투약하는 일을 맡았지요. 처음에는 우리 간호사도 청소하는 일을 했어요. 결핵 병실이니 객담을 닦는 일을 해야 했는데 들통 들고 걸레질을 하면서 화장실에 들어가 혼자 울기도 했지요. 말을 못하니 이런 일도 해야 하는구나 싶어서….“ (2010.7.9 <프레시안> 한민족유럽연대 최영숙 대표 인터뷰 – 권은정)
일도 일이었지만 문화의 차이도 그녀들을 쉬지 않고 괴롭혔다.
“한국에서 먹어보지 못한 자연발효 우유를 먹지 않고 내다버려 독일인들의 핀잔도 받았다. 원래 시큼한 맛인데 상한 줄 알았던 것이다. 한번은 직장상사가 빵집에 데려가 케익을 사주길래 고맙게 잘 먹었다. 그런데 나중에 월급 명세서에서 내가 먹은 비용을 제한 것을 발견하곤 당황한 적도 있었다.” (파독 간호사 모임 회장 최정화 : 중앙일보 유권하 기자의 블로그 중 )
그렇게 필사적으로 일했던 한국 간호사들은 점차 독일 병원에서 인정받는다. 그 친절함과 성실함이 널리 알려져 환자들은 한국 간호사를 환영했고, “주사를 언제 놨는지 모르게 순식간에 놓는다.”는 소문이 퍼져 한국 간호사들에게 주사를 맞고자 늘어선 줄이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고 한다. (위 프레시안 인터뷰 중) 원래는 단기 계약이었지만 한국 간호사들을 놔 줄 마음이 없었던 독일 병원들에 의해 한국 간호사들의 독일 체류는 길어만 갔다.
만리타향에 갑자기 연대 규모로 산개한(?) 한국 남녀들은 격무와 향수에 시달리는 와중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꽃을 피워내기도 한다. 간호사들의 기숙사에 무턱대고 침입했다가 사감에게 걸린 광부의 이야기, 휴일만 되면 한국인 간호사들을 만나기 위해 때 빼고 광 내고 간호사들의 거주지로 달려간 광부들의 사연은 지금도 독일 한인 사회에서 무성한 이야기숲을 이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2012년 5월 한국계로서는 세 번째로 미국 연방 종신 판사가 된 존 리 (한국명 이재훈)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 중 한 커플이었다. 아헨 탄광의 광부로 일하던 이선구씨는 한국인 간호사들 편에 배달되어 온 고춧가루를 찾으러 프랑크푸르트 병원에 갔다가 간호사 이화자씨를 만났고 둘은 서너 시간 걸리는 기차 여행을 불사한 연애 끝에 결혼했던 것이다.
이렇듯 행복하고 보람있는 만년을 보내는 이들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독일에서 쓸쓸히 노후를 보내는 간호사들이 많다고 한다. 뼈 빠지게 일해 번 돈을 부쳐 고국의 가족들은 잘 먹고 잘 교육받아 번듯하게 살았지만 정작 자신은 한국인도 독일인도 아닌 애매한 처지가 되어, 이제는 한국 가족들보다도 못한 형편으로 외롭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독일로 간 그녀들을 잊지 않아야 하는 이유
파독 간호사들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 중의 하나는 1977년 불붙기 시작한 강제 송환 반대투쟁일 것이다. 독일에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외국 인력을 송환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한국 간호사들은 베를린에서부터 시작하여 독일 정부 방침에 반대하는 서명 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는 독일 전역으로 번졌고 한국인 간호사들은 그들을 지지하는 독일 시민들과 연대하여 마침내 1978년 사실상의 무기한의 노동권을 따냈던 것이다. 그들의 노력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에서 한국인 간호사들이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하며 덩치가 산 만한 독일 관리를 매섭게 몰아붙이던 모습은 기억에 새롭다. 그녀들의 호소였다.
“우리는 필요할 때 가져왔다가 필요 없으면 버리는 그런 상품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독일로 갔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2008년 9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1965년에서 75년까지 10년간 광부와 간호사들이 온몸을 던져 일궈 고국에 송금한 외화가 1억 153만 달러가 넘는다고 밝혔다. 이는 연평균 1천만 달러 수준으로 1967년 대비 GNP의 2퍼센트에 육박하는 수치였다. (참고로 광부와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는 등의 이야기는 낭설이라고 한다.)
그 돈은 세계 최악, 최빈의 나라가 그 늪에서 몸을 일으켜 박차고 나올 수 있었던 디딤돌 가운데 하나였다. “어디에 묻혀야 할지 분간이 안 간다.”면서 자신이 왜 독일로 와야 했던지를 의아해하는 이제는 백발이 된 광부와 간호사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들은 2만 달러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 모두의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은혜를 일일이 갚을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들을 잊지 않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