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라는 거대한 행사가 끝났다. 투표율이 일정 수치를 넘으면 춤을 추겠다, 노래를 하겠다는 둥 온갖 유명인들의 ‘공약’이 등장했다. 투표를 해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이 어쩌고,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어쩌고 하는 말들이 타임라인엔 가득했다. 그리고, 이 ‘축제’에서 철저히 배제된 채로, 아무 권리도 행사하지 못한 채 그저 투표를 위해 길게 늘어선 줄, 그리고 개표방송만을 바라보는 눈길이 있었다. 바로 청소년과 외국인이다.
청소년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보자. 지난 총선에서 가장 많이 들렸던 얘기가 바로 20대 개새끼론이다. 20대는 투표를 안 한다, 놀러만 다닌다, 이기적이다, 보수적이다 등등. 그런데 이상하게도, 청소년 투표권을 주장하면 ‘그들은 미성숙하니까 투표권을 줄 수 없다’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 미성숙하던 사람이 성인이 되면 갑자기 정치적으로 성숙해져서 투표를 통한 자기주장이 가능해지는 것일까?
20대에게 높은 정치의식을 요구하는 게 한국 사회이지만, 정작 청소년기에 정치 사회화를 위한 교육을 하고자 하는 노력은 전무하다. 자신을 정치적 주체로 인지하고, 자신의 의견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며 투표를 비롯한 갖은 정치적 수단으로 주장을 관철하는 정치 행위는 하루아침에 가능해지는 게 아니라, 긴 시간의 노력과 고민과 배움과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한국에선, 학생이 뭘 아냐,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라며 철저히 정치에서 배제하고, 정치적 관심을 거세한다. 그리고선 성인이 되자마자 투표할 것을 요구한다. 애초에 가르치지도 않고, 정치적 주체로서 행동하는 법에 대한 교육도 하지 않고 알아서 잘할 것을 요구하니, 이 얼마나 ‘성인 중심적인’, 그리고 꼰대스럽고 억지스러운 요구이고 바람인가.
공정택을 뽑을 때, 곽노현을 뽑을 때, 그리고 이번 대선과 함께 문용린 교육감을 뽑을 때 청소년의 의견은 얼마나 반영되었을까?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은 별로 없지만, 청소년의 의견이 거의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 자체는 명백할 것이다. 교육감의 정책과 사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 물을 필요도 없이 청소년들이다. 그런데 청소년은, 교육감 선거에 단 한 표도 행사할 수가 없었다. 청소년이 유권자가 아닌 이상, 교육감은 청소년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그들이 원하는 정책을 만들고자 하지 않아도 되고, 그들에게 비난을 받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청소년은 어른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적당히 뽑은 교육감 아래서 그저 복종해야만 했다. 청소년에게 무엇이 좋을지, 무엇이 필요할지는 오로지 어른들의 손에 맡겨졌다. 당사자인 청소년들은 아무 주체적 권리도 행사하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미성숙하다는 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이유라면, 그렇다면 성인들은 어떤가. 그들은 과연 정치적으로 성숙한가? 글쎄, 아마도 아니지 않을까. 자신이 믿는 후보가 무조건 당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타인의 비판에는 귀를 닫고, 노동자 대통령 후보에게 거대 정당의 후보를 지지할 것을 요구하는 게 과연 정치적으로 성숙한 시민일까? 일베와 아고라에서 온갖 욕설과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건 정치적으로 성숙한 행위일까? 그저 새누리당이기 때문에, 혹은 민주당이기 때문에 공약 한 줄 읽지 않고 투표장으로 가는 건 과연 정치적으로 성숙한 것일까? 만약 정치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면, 대한민국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전체의 채 1%에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청소년이 아직 정치적 주체로서 행위할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걸 조기에 교육할 생각을 해야지, 배제할 생각을 하면 대단히 곤란하다. 또 다른 이유로서는, 아직 순수한 청소년에게 정치라는 ‘더러운 것’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도 있었다.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번엔 외국인 참정권이다.[1] 외국인 참정권을 반대하는 ‘표면적’ 이유는 무엇일까?[2] 첫째는 그들이 ‘한국인’과 같은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는 그들의 ‘국가관’이 ‘한국인’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논의를 조금 더 편하게 하기 위해, 여기서 말하는 외국인은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 혹은 한국에서 직업을 가지고 장기체류하는 자, 또는 한국인과 혼인관계에 있는 외국인으로 한정한다. 선거 결과에 따른 영향을 받는 당사자에게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므로.)
외국인은 내국인과 거의 같은 의무를 수행하고, 선거 결과에 따른 영향을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권리는 행사하지 못하는 배제된 계층이다. 일단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내국인과 동일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이다. 생각해보자. 외국인은 세금을 안 내나? 외국인은 치안과 질서 유지의 의무가 없나? 그들도 갖은 부가세와 소비세, 소득세와 사회보험료를 내고, 그들도 범죄를 저지르면 경찰에 붙들려간다. 과연 내국인들은 외국인들에 비해 어떤 의무를 더 수행하고 있다는 것일까? 국방의 의무? 외국인들이 내는 세금은 결과적으로 국방비로도 쓰이고, 군대에 안 간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싶다면 내국인 여성들과 군대에 가지 않는/못한 남성들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적용하여 투표권을 박탈해야 한다. 또한, 의무 수행이 투표권의 전제 조건이라면, 외국에 거주하면서도 대선과 국회의원 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재외국민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게다가 그들은 투표 결과로 인한 영향도 대단히 미미하게 받는데, 그럼에도 투표권이 있다는 건 어떻게 봐야 하는가?
실제로 헌법재판소는 의무이행을 하지 않음을 이유로 재외국민 선거권을 인정해오지 않다가 (97헌마253), 2007년, 재외국민 투표를 인정하지 않았던 공직선거법과 주민투표법에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의 내용 중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할 뿐 주권자인 국민의 지위를 국민의 의무를 전제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납세 및 국방의 의무이행을 선거권부여의 조건으로 하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현행 헌법의 다른 규정들도 국민의 기본권행사를 납세나 국방의 의무 이행에 대한 반대급부로 예정하고 있지 않다.” 라는 부분은 대단히 흥미롭다. (2004헌마644) 또한 한국의 지방선거법은 영주 자격을 지닌 외국인 성인의 주민투표를 인정하고 있다. 이를 보더라도 굳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는 건 이상하다.
두 번째는 ‘국가관’이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국가관을 갖고, 같은 소속감을 갖고 있나요?” 없으면 어쩔 건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그들이 사는 국가의 전복과 몰락을 위해 투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국내에 거주하는 그들의 이해관계가 내국민들과 완전히 배치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은 투표가 가능할만큼 충분히 국내 사정을 알지 못하고, 정치 사회화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이 없다면 한국의 정치에 관여할 자격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반대로, ‘한국인’이라면 다들 같은 ‘정상적인’ 국가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투표권에 앞서 전국민을 대상으로 국가관 사상조사라도 벌인 적이 있던가?
이런 청소년와 외국인 배제는, 결론적으로 한국인 성인들의,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었다. 투표를 통해서 주권을 행사하고, 투표를 통해서 자신이 사는 세계를 직접 바꿀 수 있다는 투표 독려의 외침은 청소년과 외국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그 와중에 청소년과 외국인은, 그들이 조금도 선택하지 않은 결과, 그들이 조금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던 결과를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여야만 했다. 주권 행사에서 배제된 시민들. 과연 그들을 정치 참여의 과정에서 배제하는 것은 정당한가.
- 1. 사실 외국인 참정권에 대한 논의가 가장 뜨거웠던 곳 중 하나는 일본이다. 이 논의의 중심에는 재일조선인이 있었다. 이들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일본 국적이 없다. 이들에게 투표권을 줘도 되는 것인가, 하는 건 한동안 일본 정치권에서 꽤나 뜨거운 감자여서, 당연하게도 자민당을 비롯한 보수층은 이를 극렬히 반대해 왔다. 일본의 재일조선인의 경우, 참정권 문제는 무엇보다 뿌리 깊은 일본사회의 외국인(재일조선인) 혐오와 차별의 맥락과 이어지기 때문에 여기서 간단히 말하는 것은 어렵다. ↩
- 2. 여기서 표면적이라는 단어를 강조한 건, 외국인 차별과 혐오의 맥락은 일단 배제했음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