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운영 교수와의 만남
학창 시절 어느 해인가의 학기 초 수강신청 즈음, 어느 과목의 아무개 교수가 학점은 잘 주는지, 수업은 널널한지 등의 정보를 선배로부터 얻어내는 와중에 한 과목을 추천받았다. “사회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과목이었는데 6,7,8, 교시 연강이었다. 당시의 생활 패턴으로 보아 그 수업 제대로 출석하기엔 일찌감치 ‘텄다’는 직감이 왔다.
아니나다를까 첫 수업 시간 나는 노트를 챙기기는커녕 새파란 잔디 위에 드러누워 오수를 즐기고 있었는데 그 수업을 함께 신청한 동기 여학생이 팔목을 잡아끌었다. “수업가자”는 것이었다. 그녀 역시 수업 제끼기로는 정평이 있었던지라 의아해진 내가 뭘 잘못 먹어 이리 열성을 부리냐며 심드렁하게 물었을 때 그녀의 답은 단호했다. “정운영 교수란 말이야. 멋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교수가 멋있는데 왜 나를 끌고 가려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물론 정운영이라는이름이야 익히 알고 있었고 호기심도 있었다. 하지만 첫 수업이고 하니 늘상 그래 왔던 것처럼 빼먹어도 무탈하리라 여기고 있었는데 동기 여학생의 완강함 덕에 나는 수강 신청 정정 전 첫 시간을 사수하는 부지런한 학생이 되고 말았다. 정경대 5층 대강의실의 숱한 책상 사이로 교수님이 입장했을 때 나는 순간 푸흐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추어 농구팀이라면 센터도 넉넉한 장신의 키에 비썩 말라 버린 얼굴은 흡사 밥 못 먹은 프랑켄슈타인의 몰골이었던 것이다. 옆자리의 여자동기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니 취향 참 독특하다?”
어느새인가, 팬이 되었다
하지만 수업을 시작하면서 나는 점차 내 취향이 여자 동기와 동일해져 가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해박한 지식과 간결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유머, 아무리 어려운 이론도 나쁜 내 머리가 이해할 수 았게 풀어내려 주시던 언변…… 이는 대학 시절을 통틀어 세 손가락에 꼽는 명강의였다.
나 역시 비상한 열성을 발휘하여 수업에 임했던 바, 개근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으되 최소한 술 먹는다거나 “오늘은 왠지” 놀고 싶어서 “사회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를 날려먹은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느 날 우연찮게 러시아 혁명 얘기가 나왔고 똑똑한 학생들이 질문이 이어졌다. 돌이켜보면 대학 내내 나를 열등감에 시달리게 할 만큼 영민한 사람들은 참 많았던 것 같다. 질문도 똑똑하고 답변도 해박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가 한창 유행어 사전에 등재되던 때였던지라 사회주의의 현실과 전망에 대한 적극적인 질문이 개진되었는데, 학생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하던 장신의 교수가 천천히 강단을 오가면서 한 마디를 했다.
“여러분.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섣불리 실망하지도 마세요. 세상은 그러기엔 너무 큽니다. ”
그의 모든 명강의는 다 까먹었지만 그 말만큼은 지금도 기억하고, 내 블로그의 소개글로 써먹고 있다. 기대도 실망도 하지 마라. 세상은 그러기엔 너무 크다. 어떤 이는 이 말을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가 했다고도 하는데 적어도 내게는 정운영 교수가 이 잠언의 지적 소유권자다.
그의 강의도 강의였지만 나는 그의 글을 좋아했다. 어디 그 수려하고도 감칠맛나는 문장의 팬이 한둘이었을까마는 어려운 단어 골라 쓰는 것을 멋으로 아는 각종 문건이나 대자보들에 잔뜩 주눅 들어 있었던 내게 그의 글은 숨구멍이었고 청량제였으며 본보기였다. 하지만 팬 치고는 나는 그에 대해 너무나 몰랐다. 이미 내 앞에 섰을 때 그는 암과 조우한 후였고 내가 봤던 ‘밥 굶은 프랑켄슈타인‘은 암 때문에 위를 거의 들어낸 상황의 결과였지만 나는 그것을 몰랐다.
‘변절’, 그의 진정성
조흥은행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의 손자였지만 아버지 대에 재산을 말아먹고 무진 고생을 하며 대학을 졸업한 것이야 당연히 몰랐고, 한신대학교에서 학내 민주화 투쟁에 동참하다가 덤터기를 쓰고 해직되었는지는 대충만 알았고, 책을 사 대느라 일시적으로 신용불량자가 되었던 일화를 지녔는지는 완전히 몰랐다. 내게 그분은 그저 부드럽고 넉넉한 선생님일 뿐이셨다. 결정적으로 학점도 잘 주셨다.
그분이 창간 이후 몸담아 온 한겨레신문을 떠나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옮겼을 즈음은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난 때로부터 근 10년이 흘렀을 때였다. 일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도 그분의 글은 중앙일보를 사서라도 읽었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조정래 작가는 그가 중앙일보로 옮긴 뒤의 글은 굳이 보지 않았노라고 했지만 나는 그 관점이 어떻든 그분의 글을 보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나처럼 단순하진 않았던지라 무지하게 날선 비판과 힐난이 그에게 가해졌었다. 변절이니 돈에 팔렸느니 말도 많았다. 그때 나는 그분의 말이 떠올랐었다. 기대도 실망도 안하면 될 것을….. 세상은 넓은데 왜 한 사람보고 저 난리인가……
그분이 2005년 오늘(주; 2005년 9월 27일) 돌아가셨다. 너무 일찍 가셨다. 그분의 글 중에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칼럼이 있었다. 내 관을 맡길 네 명의 친구 가운데 하나가 죽었다며 비통해 하던 그 글은 아무 상관이 없던 내 가슴을 덥게 했거니와, 그의 관짝 조각 하나 붙일 자격이 없는 나에게도 그의 죽음 지대한 손실이었다. 고인의 전직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끼던 고인의 부인이 한겨레 신문 기자에게 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또 한 번 울컥했었다. “중앙일보로 옮긴 것이 그분에겐 큰 일이었어요. 정말로 큰 일이었어요.”
중앙일보로 옮기기 전에 나왔던 책 <경제학을 위한 변명>의 서문에서 그는 이미 이렇게 예언같은 토로를 하고 있다.
“어느 한 편에 맹목적인 충성을 서약하지 않고서는 잠시나마 버텨내기 힘들도록 편재된 이 나라의 정치 풍토에 나는 대단한 분노를 느낍니다…… 나는 경제평론으로 돈을 버는 일개 서생에 불과하기에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 파벌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지만, 사회 일각에서 목도하게 되는 이런 횡포에는 정말 구토가 치밀어 오릅니다.”
나로서는 그의 내밀한 전후 사정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 변화가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짐작이 간다. 그리고 그에게 미안하고 나를 포함한 우리에게 야속해 했다. 저분조차, 충분히 우리 곁에 서 있을 수 있었던 분조차 우리는 놓치고 말았구나. 그분을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다시는 그분을 볼 수 없게 되었구나. 오늘….. 그분의 생각이 난다. 기대도 실망도 하지 마라, 세상은 그러기엔 너무 크다. 그래 나는, 세상을 얕잡아보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