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애들이 노년 원망론을 펼친다. “너네가 뽑았으니 이제 너네가 당해라”는 식으로 50대를 비웃는다. 트위터에서, 페이스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한국 사회는 놀라울 정도로 윗세대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 위아래간 예의는 따지지만 ‘세대론’이 대두되는 구도 속에서 50대는 역사에서 지워져야 하는 흑역사다. 젊은 세대에게 50대는 걸리적거리는 꼰대일 뿐이다. 이번 선거에서 20대부터 40대까지 이 구도에 따라왔다. 이 세대갈등의 결과는 어떨까? 이 기획은 성공할까?
NAVER.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 어리석은 결과의 선택은 “경제발전은 박정희가 한 게 아니라 당시 노동자들이 한 겁니다.”에 대해 “그 당시 노동자가 나이든 게 나다. 싸가지 없는 좌파놈들아.”란 답변으로 돌아왔다. 50대는 지워버려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현역이며, 486보다 훨씬 더 산업화에서, 민주화에서 이 나라의 주역이었다.
50대 요약 : 빡세게 일하고, 민주화를 이룬 꼰대들
일단 50대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대한민국 50대는 대략 70년대 학번이다. 한국교육과정 평가원의 한국교육 60년에 따르면 70년대 학번의 대학진학률은 26% 내외다. 이들은 70년대 유신 시대에 청년 문화의 주축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참으로 초라할 수 있다. 장발에 청바지에 통기타의 저항이라니, 젊은 세대의 눈에는 얼마나 소박한가?
하지만 그들에게도 변화의 욕구와 행동이 있었다. 이들 역시 민주화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세대고, 또 적극적으로 기여한 세대이기도 하다. 87년 민주화 항쟁은 항상 386이 언급되지만, 결국 70년대 대학을 다닌 화이트칼라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002년 이회창과 노무현이 맞붙을 때도 노무현에게 더 많은 표를 던져줬다. (노 : 48.1 vs 이 : 47.9) 이회창의 이미지가 비교적 정통 보수였음을 생각하면 상당히 노무현에 우호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들은 우리 세대가 싫어하는 말 ‘산업화’의 주역이다. 현 50대는 80년대에 들어 사회에 진출한다. 이 때는 가장 고도 성장을 이루던 시기다. 현재 한국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44.6시간이지만, 그 때는 52시간 내외였다. 물론 일자리는 넘쳤지만, 임금은 박했다. 당시 1인당 GDP는 5천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의 소득은 크지 않았으나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자산과 검약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부를 이루어낸 세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97년 IMF 명예퇴직의 직격탄을 맞는다. 당연히 이들이 잘리는 게 대리급은 주된 일을 관리하기 때문이고 사원들은 급여가 짜다. 당연히 모은 돈도 좀 있고 상대적으로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차장, 부장에게 그 칼날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영업자라는 선택의 결과는 비참했다. 돌아오는 것은 빚이었고, 그 와중에 악착같이 자식들을 위해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다.
그들이 지금 50대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민주화, 산업 발전 과정의 중심에 있었으며, 또 몰락과 자산가치 수혜 등 한국적인 모순으로 가득 찬 존재 그 자체이다. 물론 50대가 단일한 집단은 아니다. 때문에 세대론을 과잉일반화시킬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모든 세대가 그렇듯, 정치경제의 역사적 상황에 따른 공통 경험은 존재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기획, 세대전쟁.
한국에서 이렇게 다이나믹한 삶을 살아온 세대는 그 이후에 없다. 오히려 486, 80년대 학번은 수혜자였던 세대에 가깝다. 그래서 50대가 40대를 보는 관점은 같잖을 수밖에 없다. 비교적 현실에 충실했던 50대의 눈에 이념을 들여온 486은 관념적인 급진성과 경직성으로 뭉친 세대다. 그 이하세대가 어떻게 비춰질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50대는 애국심을 바탕으로 개처럼 일했다. 거기에 룰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비민주적인 국가주의자들, 대놓고 말하면 꼰대가 형성됐다. 아마 20-30 세대가 가장 혐오하는 ‘한국적인 것’의 정수가 50대일 것이다. 경제 성장의 혜택도 많이 받았지만, 그게 현실과의 타협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 타협이란 게 ‘민주화’만 내세우는 관념과 급진성에서는 한심해 보이겠지만, 어쨌든 그들의 삶은 더럽게 빡셌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현역이다. 여전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직장 상사이며, 넘쳐나는 가게들의 자영업주이며, 자식들 결혼자금이라도 마련하려고 피똥 싸고 있다. 그들은 민주화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으며, 경제성장이라는 민주화의 토양도 쌓았다. (민주화와 경제성장은 어느 정도 비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세대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간주한 40대 이하의 ‘치기 어린 생각’이 결국 이들을 적으로 돌렸다. 무능력으로 몰아야 할 부패를 단순 부도덕으로 몰아갔고, 민주화는 산업 발전과 비교할 수 없는 우월한 가치로 여겨졌다. 계급동맹이 먹히지 않자 근본적으로 세대 내부의 일자리 경쟁과 계급투쟁을 무시한 채, 어설픈 세대동맹을 내세웠다. 이하는 ‘범보수’의 등장과 87년 체제의 몰락을 쓴 한사 옹의 의견이다.
50대를 세상에서 지우려는 시도, 그 무모함
어쨌든 50대도 70년대에 소극적 저항을 하고, 80년을 그냥 지나갔다는 죄책감이 있을 테다. 어쨌거나 그래도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청장년층’으로 격정의 세월을 헤쳐온 게 50대인데 그 삶이 존중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무슨 반응을 할까?
한 세대의 역사적 경험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개처럼 일했고, 명퇴 당했고, 자영업자로 겨우 버텨나갔다. 이제 겨우 자식 결혼시키고 분가시킬 세대다. 늦깎이 자식이면 아직도 돈 벌면서 교육시켜야 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가에는 돈이 들고 그 나이에도 계속해서 일을 해야 한다. 그들이 짊어져 온 삶의 무게는 20-40이 트위터에서 몇 마디로 난도질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무엇보다 50대는 아직 현역이다. 이들은 여전히 ‘현재’에 살고 있다. 더군다나 이들은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거의 모든 삶의 과정에서 체화한 세대다. 거기에 대고 어설프게 민주화 얘기하면 씨알이 먹힐까? 그들을 마치 순정만화에 나오는 부모처럼 ‘있기는 하지만 걸리적 거리지 않는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모든 정치적 기획은 실패할 것이다.
각하의 “내가 해봐서 아는데…”를 꺼내오자면, 그 50대들 역시 “내가 민주화해봐서 아는데…”가 나온다.50대에게 도덕성을 내세우며 부채의식을 안기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이미 그들은 10년 전, 15년 전 민주화에 힘쓴 두 대선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조하면서 그 부채의식을 버렸다. 이런 역사적 경험이 있는 세대에게 계속해서 부채의식을 심으려는 시도는 그저 반발만을 낳을 뿐이다.
PS. 물론 50대가 원샷, 투샷으로 민주화라는 역사적 몫을 다했다면 착각이다. 민주화를 비롯한 모든 역사의 성과물은 ‘득템’으로 끝이 아니라, 꾸준히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캡콜드 옹의 득템주의 관련 글를 참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