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늦은 감이 있지만, 이번에는 심리학의 지식들을 빌려 각 후보의 패인(?)을 분석해볼까 합니다. (Fiske et al, 2008)
앞선 ‘토론에서 망해도 괜찮은 이유’라는 글에서 사람들은 ‘내용’보다 ‘이미지’를 본다고 했었지요. 인간이란 주의에 한계가 있어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 제한이 있을 뿐 아니라, 원래가 인지적으로 게으른 – 그러니까 머리쓰기 귀찮아하는 동물이라서요. 결국 ‘정책 내용’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들보다 ‘잘, 열심히, 선진국처럼’ 같은 쉬우면서 뭔가 있어 보이는 말들을 본능적으로 더 선호하는 듯 합니다.
반면 이 인간이 괜찮은 인간인지 안 괜찮은 인간인지, 이런 ‘인상’에 대한 정보들은 비교적 처리하기 쉬울 뿐 아니라 평소에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지지할 후보를 선택할 때에도 큰 비중을 두고 처리하지요. 그러다 보니 대선 후보들의 싸움에서도 공약 내용보다도 ‘이미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이미지에 있어 이정희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어떤 전략 미스를 보였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싸가지의 중요성: 이정희 후보
철수와 영수를 살펴봅시다.
철수: 똑똑함 상, 외모 상, 운동 능력 상
영수: 똑똑함 보통, 외모 보통, 운동 능력 보통
여러분은 영수와 철수 중 누구와 더 친구하고 싶나요?
이번에는 정보가 하나 더 추가됩니다. 다시 한번 보세요.
철수: 똑똑함 상, 외모 상, 운동 능력 상, 그리고 매우 불친절/차가움
영수: 똑똑함 보통, 외모 보통, 운동 능력 보통, 그리고 매우 상냥/따듯함
이번엔 영수와 철수 중 누구와 더 친구하고 싶나요? 누굴 ‘내 사람(같은 편)’으로 삼고 싶나요?
아마 처음에는 능력이나 외모 수준이 좋은 철수가 더 매력적이라고 느껴졌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철수가 차가운, 즉 싸가지 없는 사람이라는 정보를 듣고 나서는 ‘아 얘는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거에요.
실제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판단할 때 이 사람이 ‘싸가지 있는 또는 없는 사람인지’ 즉, 따뜻한/상냥한/친절한 사람인지를 압도적으로 중요하게, 그리고 제일 먼저 봅니다. 능력이나 기타 성격 특성에 대한 다른 정보가 아무리 좋아도, 차갑고 싸가지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순식간에 ‘상종하지 못할 사람’으로 판단되고 맙니다.
이렇게 ‘싸가지’ 즉 ‘인성’을 통해 이 사람과 상종할지 말지 결정하고 나면 그 다음에 ‘능력’을 보게 되죠.
위 그래프는 미국인들이 여러 계층, 인종의 사람들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인데요. 세로축은 ‘따뜻함(인성)’이고 가로축은 ‘능력’입니다(Fiske et al, 2008).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이 두 축을 통해 구분합니다. 예컨대 미국인들이 보는 아시아인들은 능력은 좋으나 차가운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인성과 능력에 대한 정보를 종합하여 이 사람을 어찌 할지 자신의 향후 행동을 최종적으로 정하게 됩니다. 만약 인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된 사람이 능력도 좋다고 하면 ‘굉장히 도움이 되는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하게 되고요. 능력은 조금 딸린다고 하면 ‘좋은 사람이지만 좀 아쉬운 사람’ 정도로 판단하게 됩니다. 반면 싸가지 없는 사람, 상종하면 안 되는 사람이 능력만 좋다고 하면 ‘굉장히 해로운, 필요하면 처단해야 하는 사람’으로 판단하게 되고, 싸가지 없는 사람이 능력까지 별로라고 하면 ‘여전히 상종하면 안 되지만 그렇게 해롭진 않기 때문에 무시하면 되는 사람’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미 많은 분들이 지적하셨듯이) 이정희 후보가 이미지상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제일 중요한 ‘따뜻함/상냥함’이라는 이미지에 있어 문재인 후보와 박근혜 후보는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던 것 같은데, 이정희 후보는 확실히 ‘차가운’ + 그런데 ‘능력은 좋은’ 사람 포지션이었던 것 같거든요. 즉 ‘굉장히 해로운, 필요하면 처단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딱 좋은 포지션이었던 것이지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정희 후보에 대한 격한 반감을 보였던 것에 이런 이유가 숨어있었던 듯 보입니다.
공포와 불안은 카리스마 있는 리더를 원하게 함: 문재인 후보
이번엔 문재인 후보의 이미지에 있어 조금 아쉬웠던 부분입니다. 공포와 불안을 느끼게 되면 사람들은 ‘카리스마 있는 강한 리더’를 원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죽음 같은 걸 떠올리게 하면, 부드러운 리더보다 다소 독선적이더라도 강한 리더를 선호하는 현상을 보이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 원래 보수냐 진보냐와 상관 없이, 반대 진영의 후보라도 강인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인다면 선호도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Kosloff et al., 2010). ‘누구든 좋으니 이 불안을 좀 해소해 줘!’ 같은 것이겠지요.
위 그래프는 ‘심적으로 불안한 상태 + 진보’인 사람들이 여러 스타일의 리더에 대해 보인 선호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일단 카리스마 있는 진보진영 리더에게 제일 높은 호감을 보이고 있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부분입니다. 카리스마 있는 보수 후보에 대해서, 카리스마 없는 진보 후보와 비슷한 정도의 선호도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경향은 ‘보수’인 사람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보수인 사람들도 카리스마 있는 진보 후보에 대해서 카리스마 없는 보수 후보와 비슷한 수준의 높은 호감을 보입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현상이 ‘독재자’를 선호하는 현상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도 밝혀진 바 있습니다. 불안, 공포가 고조될 시기에는 이를 해소해 줄 수 있을 듯한 ‘영웅 같은 이미지’의 리더라면 독재자라도 상관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Schoel et al., 2011)
젊은 사람들이나 노인들이나 모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한창 고조되어 있는 현 상황을 고려하면, 카리스마란 점에서 박근혜 후보가 (아버지의 후광이건 뭐건) 좀 더 이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재인 후보는 첫 번째 인성평가 관문에서는 합격했으나 ‘불안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강함이 있는가’란 관문에서 조금 부족하다는 인상을 준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카리스마 있는 후보는, 설사 반대 진영에 있더라도 카리스마 없는 자기 진영 후보와 비슷한 호감도를 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진보적 성향을 띠던 사람들 중에도 문재인 후보가 카리스마가 부족하다고 느껴 박근혜 후보를 선택한 경우가 상당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죠. 어쩌면 ‘소통하는 겸손한 대통령’ 같은 이미지보다도 ‘특전사, 정의를 수호하는, 용기 있고 강한 대통령’ 같은 것이 더 호소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권력이 있는자가 옳다
이 사람이 맞는 말을 해서 → 권위 있게 느껴지는 현상은 비교적 당연해 보이죠. 하지만 때로는, 권위/권력이 있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 옳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권력자의 말이 곧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는 것이지요(Haslam & Reicher, 2012).
이 경우 사람들은 얼토당토 않는 말에도 ‘맞겠지 뭐’ 하며 권력자를 자발적으로 따르게 됩니다. 이게 좀 무서운 점이기도 해요. 나치의 대학살 같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역사적으로 가능한 이유 중 하나로, 사람들이 권력이 두려워서 복종하기도 하지만, 권력자의 말이 옳다고 느껴서 매우 기꺼이, 자발적으로 복종하기도 한다는 것을 꼽기도 합니다.
특히 어렵고 전문적인 각종 공약 내용에 대한 판단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 ‘옳은 말을 하니까 제대로 된 사람’이란 인식 과정보다 거꾸로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하니까 옳은 말’이라는 인식 과정이 더 중요하게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면에서도 아마 뭔가 권력이 있어 보이는 박근혜 후보가 더 유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이번 대선에서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을 좋아하며, 어떤 상황에서는 특히 어떤 모습, 이미지에 끌리게 되는가 등의 심리학 지식들이 활용되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란 결국 합리적이고 싶어하지만 사실은 매우 불완전한 인간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니까요.
출처: Cuddy, A. J. C., Fiske, S. T., & Glick, P. (2008). Warmth and competence as universal dimensions of social perception: The stereotype content model and the BIAS map. Advances in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40, 61-149.
Kosloff, S., Greenberg, J., Weise, D., & Solomon, S. (2010). Mortality salience and political preferences: The roles of charisma and political orientation. Journal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46, 139–145.
Schoel, C., Bluemke, M., Mueller, P., & Stahlberg, D. (2011). When Autocratic Leaders Become an OptionUncertainty and Self-Esteem Predict Implicit Leadership Preference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Haslam, S. A., & Reicher, S. D. (2012). Contesting the “Nature” Of Conformity: What Milgram and Zimbardo’s Studies Really Show. PLoS Bi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