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눈에 비친 도로와 인도를 가르는 턱
자전거를 처음 배우던 무렵 골목길을 벗어나 좀 큰 길을 달리다가 빵빵거리는 차들에 쫓겨 인도로 올라올 때는 어김없이 내려야 했다. 도로와 인도를 가르는 턱 때문이었다. 신나게 달리며 한눈 팔다가 그 턱에 걸려 나동그라지는 일도 흔했다. 하지만 그 턱은 우리에게는 성가신 장애물일 뿐이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성벽의 높이로, 절벽의 막막함으로 다가섰다. 바로 장애인들이었다.
방송의 계몽 프로그램에서는 거리의 턱 앞에서 고생하는 장애인들, 그리고 그를 도와 끙차 인도로 올려 주고 환하게 웃으며 헤어지는 모습을 참으로 지겹게 연출하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웃고 헤어진 지 30미터도 못가서 또 턱을 내려가야 하고 또 턱을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몰랐다. 왜 턱 앞에서 고생하는 장애인들을 돕자는 캠페인을 벌이면서 도로 턱을 없애자는 캠페인은 벌이지 못했을까.
그나마 지금은 거리에 턱이 없어지거나 오르내림길이 구비되어 있어서 회사에서 자전거까지 한 번도 내리지 않고 다닐 수 있게 됐지만, 바로 이 아무렇지도 않은 편의를 위해서 어떤 이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1984년 9월 19일 스스로 세상을 버렸던 장애인 김순석이 그다.
휠체어에게 너무나 잔인했던 한국
그는 1952년 전란통의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 시절 흔했던 소아마비로 다리 하나를 절게 된다. 열 여덟 살 되던 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그는 금은세공 기술을 익혔고 타고난 실력을 발휘하여 9년만에 공장장이 되는 작은 성공을 거둔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태어났다. 그의 짧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으리라.
하지만 서울 생활 10년만에 그는 커다란 재앙을 만난다. 교통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은 것이다. 3년간 병원 신세를 진 끝에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그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금은세공작업장을 차린다. 그의 납품처는 남대문시장이었다.
그곳까지 오가는 일이 그에게는 일상이었으나 휠체어를 탄 그에게는 그야말로 문경새재 아흔아홉구비를 매일 넘나드는 것과 같았다. 제일 괴롭힌 것은 툭하면 만나는 턱이었다. 하나를 만날 때마다 측은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도움을 청해야 했고, 또 그에서 내려올 때 사방을 두리번거려야 했다. 대개는 기꺼이 도와 주었으나 인적이 드물거나 사람들이 바쁠 때에는 하염없이 ‘착해 보이는’ 사람을 찾아 애타게 “도와 주실래요.”를 부르짖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더운 여름날, 그는 경찰서에 끌려간다. 땀을 뻘뻘 흘리며 휠체어로 건널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 횡단보도 아닌 도로를 건넜고 그게 교통순시원 눈에 띈 것이다.
“장애인이면 다요? 무단횡단은 무단횡단이지.”
도로 턱 하나도 만리장성같은 장애인이 수십 계단의 육교를 날아오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위태롭게 도로 복판에 섰던 풍경은 나도 여러 번 보았거니와, 그 또한 어쩔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순시원은 법집행에 추호의 어긋남이 없었다. 결국 그는 휠체어째 파출소에 끌려가 다음날 새벽까지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된다.
지금 상상만 해도 가슴 속에서 주먹같은 뜨거움이 치솟아 오르는데 그의 심경은 오죽했을까. 납품 기일은 저승사자같이 다가오고 치러야 할 돈은 범같이 발톱을 세우고 있는데.
“서울 시장님 도로 턱을 없애 주시오.”
그리고 두어달 뒤 1984년 9월 19일 그는 아내가 파출부를 나간 사이 마천동 지하 단칸방에서 독을 삼킨다. 그는 다섯 페이지가 넘는 노트에 빽빽하게 유서를 남겼다. 구구한 글보다는 그의 유서를 타이핑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
“….. 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히 시장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물 한모금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또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만 합니까……
택시를 잡으려고 온종일을 발버둥치다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휠체어만 눈에 들어오면 그냥 지나치고 마는 빈 택시들과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저렸습니다…… 그때껏 신경질과 욕설이야 차라리 살아보려는 저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다져보게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움직일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 서울의 거리는 저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꺾어 놓았습니다.
시장님. 을지로의 보도블록은 턱을 없애고 경사지게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 밖에는 시내 어느 곳을 다녀도 그놈의 턱과 부딪쳐 씨름해야 합니다. 또 저같은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화장실은 어디 한 군데라도 마련해 주셨습니까…… 장애인들은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대우를 받아도 끝내 이용당합니다. 조그마한 꿈이라도 이뤄 보려고 애써 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는 저를 약하게 만듭니다.”
이 유서를 읽으면서 “어이구 참 힘들게 사셨구만. 지금은 턱도 없어지고 장애인 화장실도 전철역마다 있어. 지금 장애인들은 문제가 없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선 없겠지만, 어디엔가 꼭 있을 것이다. 아니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의 유서 에 나온다. “단 몇 분이라도 저희의 처지가 되어 보지 못한 이들은 결코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곧 그 이름과 함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그 뒤로도 숱한 장애인들의 휠체어는 턱 앞에서 못박히고 고꾸라졌고 지하철 리프트에서 떨어졌다. 장애인들이 목에 쇠사슬을 걸고 철로를 점거하는 것을 촬영한 적이 있다. 그때 한 뇌성마비 장애인이 눈물을 가득 담은 눈으로 내 카메라를 응시하며 이렇게 말했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하루 시민들 발을 묶었지만 우리는 평생 갇혀 살았어요.”
장애인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 가운데 태반은 선천성 장애가 아니라 군대에서, 또는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여전히 산업재해에 관한한 OECD 국가 가운데 수위를 다투는 선진국이다. 즉 장애인이 될 위험성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사회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약 피어린 전쟁을 3년 동안 치르면서 수십만의 장애인이 발생했던 나라고 환경은 더욱 열악했었다.
그런 나라에서 아무리 30년 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장애인 수당도 아니고 하다못해 장애인의 권리도 아니고 그저 “거리에 턱을 없애 주세요.”라고 울먹이면서 한 장애인이 스스로 독을 삼켰다면 이 얼마나 슬프고 멍한 일인가. 1984년 9월 19일은 장애인 김순석씨는 다섯살 아들과 착한 아내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