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에게 유서깊은 신앙적 오해, 뿌리깊은 신앙적 착각이 있다면, 그것은 ‘성과 속’, ‘완전과 불완전’, ‘거룩과 천박함’을 구분지어 ‘신앙의 영역’을 이편과 저편으로 구분하고 싶어하는 이원론적 신앙관일 것이다.
복음서 시대에도 초대교회 사도들과 바울 및 교부들이 ‘이땅의 것은 거짓되고 유한하며, 영적인 것은 참되고 영원하다’는 ‘영지주의'(그노시즘)와 치열한 싸움을 벌인 사실만 봐도, 그 기원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방금 ‘이땅의 것은 거짓되고 유한하며, 영적인 것은 참되고 영원하다’라는 방금 그 문장이 ‘뭐가 잘못된거지?’라고 느꼈다면, 당신도 이원론적인 신앙관에 깊이 젖어들어 있는 상태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구약부터 신약까지 성경은 이땅이 죄로 오염된 것은 인정하지만 이땅의 것을 경멸하지는 않는다. 요한계시록도 그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 우리가 저 머나먼 하나님 나라로 감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 곳에’ 새하늘과 새땅이 펼쳐지며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올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전에 있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에게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 같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1:1,2)
그러나, 대개의 경우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런 사실들을 잊고 있으며, 이땅의 현실에 대한 결핍과 불만과 아픔을 잊을 수 있거나 도피할 수 있는 ‘완전하고 영원하고 참되기만 한 교회’라는 개념에 투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해서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판타지 신앙’은 현실개념이 휘발된 ‘몰상식한 교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완전무결한 교회’에 대한 강박
기독교인들에겐 하나의 강박이 있다. 그것은 ‘교회는 완전무결해야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그런 강박은 ‘교회에 덕이 되지 않으니까’라는 말로 압축되어 표현된다. 그들은 교회가 ‘완전무결해야 한다’라는 강박으로 현실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교회의 온갖 추문과 부패와 비리와 범죄’를 과감히 덮어 버리며 외부에는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위장한다.
그리고 그런 교회 내부의 문제를 공론화하거나, 문제제기하는 교인들은 ‘교회를 흔드는 분란세력’ 내지, ‘이단의 앞잡이’라며 그들을 공격하거나, 조직적으로 왕따시키며 심한 경우 ‘출교’까지 시킨다. 헌금횡령과 목회세습으로 유명한 어떤 목사의 불륜을 성토하고 문제제기했던 교인들은 출교당했다.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는 완전하고 참되며, 목회자는 거룩하기만한 존재’라는 강박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난 그 기원이 기독교인들의 이원론적 신앙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그들은 현실 속의 불완전함이나 결핍에 대한 이상적인 대안으로서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꿈꾼다.
문제는 교회와 기독교인의 완전함에 대한 생각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목표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비현실적인 강박과 집착이 된다는 데 있다. ‘기독교인과 교회’는 절대로 ‘허물이 있거나 약점이 있어서도 안되며, 노골적인 범죄나 추문은 더더욱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강박에 가까운 집착이다.
물론 그들은 대놓고 그런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생각을 드러내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말로는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의 과정을 인정하며, 불완전한 인간의 약점과 허물을 보듬어 안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일정 직분이상의 성도(안수집사, 장로, 권사…)나 목회자에 이르게 되면 그 기대치가 단순한 기대치가 아니라 절대로 흠결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비현실적인 요구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오해하지 마시길. 직분과 목회직에 요구되는 높은 윤리적, 신앙적 수준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강박에 가까운 비현실적인 기대와 환상은 직분을 갖고있는 교인에게나 목회자에게 한없는 피로감과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온통 내가 완전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며 사는 삶을 상상해보라. 대개 목회자나 선교사 자녀들이 이런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겪는다.
그러나 교회를 다녀 본 사람이라면 다들 인정하다시피, 교회 속 현실도 여전히 찌질하고 비루하며, 인간의 삶은 목회자나 성도나 할 것없이 부덕하다. 교회라고 다를 것이 없다.
문제는 이렇게 비루하고 너저분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대하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태도다. 문제가 있으면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미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권징과 치리, 대화와 용서 등의 여러 기독교적인 철학과 전통이 녹아있는 적절한 대응으로 투명하게 해결하면 될텐데 마치 그런 문제가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이 거짓으로 위장하며 덮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해서 이상한 게 아니라 도처에 문제가 있는데 그걸 없는 척해서 망신당하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된다.
재밌는 것은 비신앙인들조차 교회가 완전무결해야 한다고 기대하지 않을 뿐더러, 많은 기독교인들이 걸핏하면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로 원형적 교회에 대한 바람직한 모델로 여기고 있는 ‘초대교회’조차 완전무결하고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나,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서에 묘사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라. 시기, 질투, 음행, 탐욕, 위선, 분열, 돈 문제…심지어 교회 지도자의 범죄에 이르기까지 현대 교회가 겪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가 총망라되어 기록되어 있고 그런 일들이 발생했을 때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게다가 비신앙인들이 비난하는 것도 ‘교회의 문제’ 자체 보다, 교회의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의 뻔히 보이는 ‘위선과 거짓’으로 덮으려하는 거짓된 행태를 비난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비신앙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진리와 사랑을 부르짖는 교회가 거짓말로 자기를 포장하는 행태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든 불편한 현실로부터 격리된 ‘진공 속의 신앙’
초대교회조차 완전무결과는 거리가 멀었듯이 교회 역사상 완전한 교회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교회나 기독교인들이 이런 필연적인(?) 부도덕과 부조리 앞에 반응하는 방법은 두가지 밖에 없다.
첫째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겠지만 진솔하게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끊임없이 바른 모습으로 돌아가려 노력하는 것이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cia semper reformanda)는 칼뱅의 구호는 현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이런 한계를 분명히 인식한 외침이다. 불완전한 교회의 한계는 지속적인 개혁의 필요를 끊임없이 낳는다. 그러므로 항상 개혁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다.
둘째는 현실 교회와 기독교의 이런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가짜 완전함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완전하지 않은 신앙의 한계를 드러낼 위험이 있는 모든 불편한 현실로부터 격리된 ‘신앙적 진공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 진공의 공간엔 모든 신앙적 한계와 갈등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멸균처리’된 주제들로만 가득차있다. 시대의 아픔에 대한 각성, 현실 정치의 복잡한 이해관계, 복잡하고 논쟁적인 신학적 주제,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편한 사건, 사고로 부터 격리된 ‘진공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불편할 여지가 있는 모든 불순한 요소를 걸러낸 ’진공속의 신앙’을 갖게 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생각할 필요 없고, 고민할 필요없고, 논쟁할 필요없고, 그 어떤 불편한 상황도 맞닥뜨릴 필요가 없는 완전무결한(?) 신앙생활에 최적화된 이상적인 기독교적 세계’를 현실 속에 구현하고 살게 되었다.
그런 진공속의 신앙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있다.
-신앙생활의 중심이 삶의 현장보다는 철저히 교회중심적이다.
-신학적 고민이나 논쟁적 이슈는 쓸모없는 것이라 여긴다.
-성경은 철저히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고 성경해석이나 신학적 입장은 단 하나의 관점만이 정답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지극히 단순하고 피상적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 역시 지극히 단순하고 피상적이다.
-교회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교인들은 일일이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현실 정치나 사회적 이슈를 교회에서 언급하는 것은 순수한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이라 여긴다.
-현실 속 모든 문제에는 정답이 있고, 어떤 사안이라도 선과 악, 흑과 백으로 나누기를 좋아한다.
-목회자 말은 설사 부도덕하고 몰상식한 말이라도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것이라 여긴다.
-목회자와 교인들의 수평적 관계에 대해 적대적이고 부정적이다.
-교인들은 철저히 복종적이어야 하고 교회에 대한 그 어떤 불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옳지 않은 분란의 행위라고 여긴다.
-교회 내에서 설사 어떤 심각한 범죄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교회의 완전함’을 지키기 위해 그런 사실이 없는 것처럼 덮는 것은 정당할 뿐 아니라 옳은 행동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위의 전제들이 다 옳은 것일까?
현실 속에는 ‘진공의 영역’이 없다.
실제 현실 속에서는 위의 전제들을 낳은 ‘진공 속의 신앙’이 성립하기가 불가능하다.
현실 속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많은 문제와 부조리가 존재하며, 성경해석과 신학적 논쟁에서부터 교회의 의사결정과정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여러가지 논의와 이해관계가 충돌해서 순간 순간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분명하게 결정내리기가 어려운 상황이 연속된다. 더 사려깊고 옳은 결정과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이해와 대화, 공부와 사유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다. 신앙 뿐 아니라 인생이 원래 그런 것 아니던가?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에서 ‘진공 속의 신앙’으로 신앙생활을 해온 기독교인들은 그런 복잡한 현실을 견뎌내기 힘들어할 뿐 아니라 그런 현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더구나 그런 복잡한 현실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로 사고하고 판단하며 결정을 내리는 훈련조차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생각하기 싫고, 판단하기 어렵고, 고민하기 어려운 주제들과 현실은 외면해 버리거나, 목회자들에게 전적으로 의탁하며 ‘정답만을 알려달라’ 요구한다.
특히 교회안에 정치적 이슈나 현실적 시대의 문제들을 다룰 때 마치 ‘멸균처리된 완전한 신앙의 영역’이 혼탁해지는 것처럼 여기며 거부감을 갖고 그런 ‘정치적인’ 이슈를 언급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거부한다. 그리고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둘러싼 시대의 여러 아픔과 불의의 문제를 철저히 외면하면서 ‘그들만의 천국’에서 열심히 교회일만 봉사하며 만족감을 누린다.
그러나 모든 의사결정과정에 구성원들의 가치판단과 이해관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택을 도출하는 과정을 ‘정치’라고 이해한다면, ‘정치’의 영역에서 자유로운 ‘진공의 공간’은 없다. 가정, 직장, 교회, 국가 그 어느 곳에서도 ‘정치’는 존재한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건 자랑이 아니라 악한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대로 ‘정치’를 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내가 원하건 원치않건 결국 ‘힘의 논리’에 의해 ‘좋은 정치’건 ‘나쁜 정치’건 우리는 어떤 선택의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 선택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진공 속에 사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걸 깨닫는다면 아무리 바쁘고 힘이 들어도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내가 속한 공동체에 영향을 미칠 ‘정치’에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와 잘못된 신앙관으로 ‘진공 속의 삶’으로 도피하지만, 결국 그들의 무관심은 오랜 시간지나지 않아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왜 배울만큼 배운 사회 지도층과 엘리트 교인들이 많은 대형교회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일까?
더러운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이 의미하는 것
실제 있지도 않은 ‘판타지 신앙’을 강요하며, 철저히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는 신앙을 지금처럼 계속 독려하며 교인들을 양육한다면, 앞으로 교회와 기독교는 계속해서 ‘위선과 거짓’으로 자기들의 치부를 덮고 가리는데만 급급할 것이며, 현실 속의 기독교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미미해지며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것이다. 게다가 기독교인들 또한 교회 프로그램과 행사에는 ‘최적화된 일군’이 되겠지만, 현실 속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기에는 아무런 준비가 안된 무능력한 종교인들로 전락할 것이다.
이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모호하고 애매하며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로 다시 눈을 돌려 기독교 신앙이 현실 속에서 기능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렇게 철저히 현실 속의 부조리와 모순 속에서 기능하는 신앙을 보여주는 사례가 성경에는 너무나 많지만 가장 감동적인 예는 역시 예수님이다.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7)
예수님은 태어나던 순간까지 평범하게 태어날 상황이 되지 못했다. 어떤 사정이었는지 자세히는 모르나 여관에 묵을 곳이 없어서 가축들의 먹이통인 더러운 구유위에 눕혀야 했다. 만삭의 여인네가 해산을 앞두고 있는데도 여관방을 얻을 수 없는 ‘비정한 결핍의 세계’에서 예수님은 태어났다. 그 소중한 첫 탄생의 순간에 눕혀야 했던 곳이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냄새나고 더러운 구유라는 사실은 ‘완전하고 흠이없는 신앙의 세계’안에서만 생활하기 원하는 우리에게 어떤 메세지를 던져주는 것일까?
신앙은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더럽고 냄새나는 곳에서 ‘희망의 꽃’을 피우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우린 그토록 냄새나고 비루하며 너저분한 현실을 부인하고 교회 안에서만이라도 가짜 평화와 안식을 누리며 진공 속에서 살기 원하지만, 참된 신앙은 그런 모순과 부조리와 더러움과 불결함 속에서 기능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닐까?
교회를 살리는 권징과 치리, 회개와 성찰
이제 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완전무결한 것처럼 행세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내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숨기기만 급급하지 말고,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투명한 과정을 거쳐 성경의 원리로 진솔하게 처리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한 권징과 치리, 회개와 성찰을 위한 교회 내의 여러 제도는 교회의 건강함을 지켜내는 소중한 교회의 전통이다. 교회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면 그 수치와 부끄러움조차 우리가 같이 감당해 내야하는 신앙적 대가로 여겨야 한다.
※파문하다:(동사)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나 기독교 공동체에 반하는 교리를 펴거나 비도덕적 행위를 했을 때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다.
교회의 가장 소중한 보물 중 하나는 공동체다. 따라서 교회의 가장 강력한 징계 중 하나는 성찬을 하지 못하도록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것이다. 파문이라고 하면 가혹한 느낌이 든다. 정죄와 배척,사교의 괴팍함,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떠올리게 만든다. 실제로 역사를 보면 교회는 파문 제도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남용했다.(심지어 최근 역사 속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남부의 침례교회들은 부시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교인들을 파문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선제공격, 합법적 처형, 평생 유배에 비하면 교회의 가장 극단적인 징계인 파문조차 오히려 가볍고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파문을 올바로 시행하기만 하면 심지어 구원하는 효과까지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의 리더들이 변함없이 저지르는 수치스러운 죄들을 생각하면 회복을 위한 정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교회의 기강이 흐트러진 이 시대에 우리는 이 숨은 보물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파문제도 덕분에 최악의 타락자나 배교자와 위선자가 회복되었다. 이 제도가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그나마 지금만큼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뜻에서 벗어난 공적 인물을 공적으로 징계하는 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관행 중 하나이다. “당신이 그런 짓을 하면 당신의 평판도 나의 평판도 아닌 우리 하나님의 평판에 금이 갑니다.” 파문은 이런 뜻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파문은 기독교 신앙의 언약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파문은 개인적인 죄에 대해서도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집단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대중적 인물이라면 대중 앞에서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많은 책임을 맡은 사람에게는 더 큰 징계가 따르는 법이다. 그래서 마틴 루터 킹은 “버밍엄 감옥에서 보낸 편지”(Lteeter from the Birminggham Jail)에서 목회자들에게 가장 가혹한 비판을 쏟아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많은 책임을 맡은 종교지도자와 정치 엘리트들에게는 유독 ‘독사의 자식’같은 표현을 서슴지 않으셨다.
-대통령 예수(Jesus for President)- 셰인 클레어본, 크리스 호 공저/ 살림
기독교인들 또한 ‘진공 속의 신앙’을 버려야 한다. 자신이 속한 가정과 직장, 사회의 여러 모순된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어 현실 속에서 기능하는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올바르게 운영되는지 주인의식을 가지고 간섭하며 관심을 가져야 하고, 무엇보다 사회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원리’를 구현해 내기 위한 치열한 현실적 참여와 공부가 병행되어야 한다.
보통 이런 식의 공부를 ‘기독교 세계관’과 관련된 공부라 여기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으로만 접근해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접근은 어쩔 수 없이 상당부분 ‘관념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삶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고 느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통받는 이웃들의 삶, 이 사회의 모순된 현실에 대해 깊이 공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더욱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절절한 문제의식을 갖고 공부하고 노력하게 될것이다.
현실에 뿌리내린 신앙, 그 어렵고 좁은 길
‘진공속의 신앙’을 거부하고 ‘현실에 뿌리내린 신앙’으로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현실은 복잡하고 모호하며 상처받기 쉽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학에 정통하고 교리에 대해 훤하며 성경을 수만번 읽었어도 우리 인간은 여전히 우리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극과 부조리함, 모순과 신비함에 대해 완벽히 이해할 수도, 설명해낼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린 여전히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고 모호하게 하나님을 알아갈 것이며, 쉽게 판단내릴 수 없는 복잡한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내 보잘것없는 지식과 편견으로 무리하게 하나님의 뜻을 예단하고 단정짓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럴때마다 현실을 사는 기독교인은 신앙적 겸손이 무엇인지 기억하며 배울 기회를 갖는다.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결론을 무리하게 내리기 보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다린다. 그분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신앙의 신비’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기대어 한치앞도 안보이는 안개 속에서 힘겹게 한걸음씩 내딛는다. 게다가 현실의 부조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기도는 응답도 더디다.(왜죠? ㅠㅠ;)
그래서 ‘현실 속에 사는 신앙인’은 피곤하고 힘이든다. 그러나 ‘진공 속에 사는 신앙’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은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기에 항상 확신에 가득차 있고,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무례하고 폭력적인 신앙을 남에게 강요한다.
여러분들은 어떤가?
두 종류의 신앙 중 어떤 신앙이 매력적인가?
그리고 어떤 신앙이 훨씬 힘이 들까?
내 경우에는…
이웃의 아픔에 대해 고뇌하고, 불완전한 교회의 부조리를 아파하며, 복잡한 현실 속에서 최선의 답을 찾으려 고민하고, 힘겨운 결정을 내리고 아픈 한 걸음을 내딛는 기독교인들을 볼 때 뭉클한 감동과 함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를 느낀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마태복음 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