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사망한 날, 나는 다음의 세 가지를 결심했다. 일찍 일어나기, 시간 아껴 쓰기, 일기 쓰기.”
『교양인이 되기 위한 즐거운 글쓰기』에서 소개하는 새뮤얼 존슨의 말이에요. 일찍 일어나고 시간을 아껴 쓰겠다는 다짐이야 언제든 할 수 있는 거지만 왜 하필 아내를 잃고 나서 그는 일기 쓰기를 결심하게 되었을까요.
짐작건대 그에게 아내의 사망은 곧 아내와 함께했던 기억의 죽음이고, 따로 기록해 둔 글이 없다면 그건 아내와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테지요. 그걸 자각한 순간 불행을 되풀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아내가 사망한 날, 일기를 쓰겠다고 다짐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결심이었던 거죠.
죽지 말아야지요. 슬픔도 기쁨도 모두 살아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요.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또 산다는 건 살아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인 거죠. 저는 그게 글쓰기라고 생각해요. 글쓰기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살아 있음을 ‘증거’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아닐까 싶어요. 같은 책에 눈여겨 볼만한 문장이 또 있네요.
“무의식에는 의식의 빛이 필요하고, 의식에는 무의식의 에너지가 필요한데, 글쓰기로 이 두 가지의 교환이 가능하다.”
- 『즐거운 글쓰기』 중 ‘마리온 존 맨’의 말
저 자신에게도 묻게 되네요.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마리온 존 맨처럼 멋진 말을 준비해뒀으면 좋으련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말인 거고, 저에게는 저대로의 이유가 있을 테지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 가지 정도가 떠오르네요.
- 첫째, 고통을 달래주는 글쓰기
- 둘째, 공부로서의 글쓰기
- 셋째, 소통을 위한 글쓰기
누구나 그렇듯 저 역시 삶의 여정에서 크게 좌절했던 때가 있었어요. 특히 20대 이후 10년을 주기로 갖가지 불행과 조우했던 기억이에요. 20대 말엔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나섰다가 나동그라졌고(덕분에 영화 전문 주간지 《씨네21》 창간 초기 ‘어느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좌절’이라는 특집 기사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로 인해 ‘최좌절’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어요), 30대엔 하필이면 IMF 외환위기의 한중간에 입시학원을 차렸다가 쫄딱 망했고(덕분에 빚더미에 올라섰고요), 40대 후반에는 노숙인 인문학에 참여했던 걸 계기로 노숙인의 생계를 돕는 잡지 《빅이슈》 창간 운동을 펼치다가 시쳇말로 모든 걸 날려버리기도 했죠.
좌절은 경제적 궁핍에 더해 정신적 피폐를 동반하게 마련이에요. 술독에 빠져 지내면서 비관과 자학을 키우며 헤매기 시작했던 거죠. 실제로 생활고보다 더 고통스럽고 괴로웠던 건 정신적 피폐였어요. 그게 고스란히 무력감으로 이어졌으니까요.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들고 말았었죠.
책은 나를 비난하지 않았고, 글은 나를 위로해 줬다!
매번 다른 형태의 불행과 좌절이었지만 그때마다 저를 구해주었던 건 하나였어요. 바로 책과 글쓰기였죠.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도 만날 수 없어 고립감에 빠져든 순간 내 살아 있음을 증거할 유일한 방법은 글쓰기밖에는 없다는 걸 깨달았던 거죠. 모두가 저를 비난했지만 책은 저를 비난하지 않았고 글쓰기는 고통을 잊게 해주었어요.
눈만 뜨면 도서관을 찾아 닥치는 대로 읽었고, 읽은 건 기록해두기를 반복했어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그 순간만큼은 현실적 고통을 잊을 수 있었고, 때로는 희망이라는 신기루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했지 뭐예요. 그렇게 써나간 독서 노트가 10여 권이 넘었고, 서평의 형태로 작성해 둔 글만도 400여 편에 이르게 되었어요. 방황의 끄트머리에서 부여잡은 책과 글쓰기는 저를 다시 회생의 길로 인도해주었어요.
블로그에 서평을 꾸준히 올렸던 덕분에 주위 사람으로부터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면서 도서평론가라는 이름으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어요. 그 후 10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방송 활동(주로 라디오 프로그램의 책 소개 코너 진행, 일테면 경기방송의 ‘최준영의 주책잡기’, SBS라디오의 ‘최준영의 책읽는 아침’, YTN라디오의 ‘최준영의 인문학콘서트’ 등)을 했고 이어서 인문학 강의에도 참여하게 되었지요.
마침 그 시절의 저를 연상시키는 글이 있네요. 『작가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소설가 김연수의 추천사인데 곱씹을수록 공감하게 되는 글이에요. 아무 일도 할 수 없던 시절 밤새 피시방에 앉아 글쓰기에 매달렸던 저의 경험을 그는 ‘그을림의 흔적’이라 명명하고 있네요.
“그게 소설이든 시든, 어떤 젊은이가 갑자기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면, 지금 그의 내면에서 불길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불은 결코 홀로 타오르는 법이 없다. 그러니 그 불은 바깥 어딘가에서 그의 내면으로 번졌으리라. (…) 그러나 이 불은 곧 잦아들 것이다. 그것 역시 불의 속성이다. 순식간에 타오르고, 또 그만큼 빨리 꺼진다. 그러므로 모든 소설가들의 데뷔작은 검은색이어야 한다. 그건 어떤 불이 타오르고 남은 그을림의 흔적이니까.”
기나긴 방황 끝에 ‘내 살아 있음을 증거’할 유일한 방법은 글쓰기라는 것, 그걸 깨달았던 것이야말로 제 인생 최대의 ‘터닝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처음엔 정신적 황폐함을 이기기 위해 썼지만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면서 어렴풋이 희망을 꿈꾸기 시작했죠. 그것이 신춘문예 당선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방송활동과 인문학 강사, 작가로의 길로 연결되었던 거죠.
강조하건대 저는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읽고 치열하게 글을 썼던 10여년의 시간은 오롯이 공부하는 삶이기도 했어요. 학위도 없는 제가 10여년동안 줄기차게 강의하고 글 쓰고, 책을 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공부로서의 글쓰기’에 매진했기 때문인 거죠.
치열한 독서와 공부로서의 글쓰기
글을 쓰며 산다는 건 공부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어요. 그때 저에겐 새로운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글을 통해 희망을 키웠지만 그것이 곧바로 삶의 방편이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계속 쓸 것인가, 아닌가. 공부하는 삶을 살 것인가, 현실을 살 것인가. 저에겐 대단히 절박한 질문들이었고 결국은 그 질문이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기 시작하더군요. 질문 혹은 고민이 이끄는 대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노숙인 인문학 강의에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거든요.
저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어요. 질문이 있는 삶이야말로 의미 있는 삶이라 믿기 때문이죠. 근래 공부하는 글쓰기를 결심한 저에게 지침이 될 만한 책이 나왔더군요. 마치 저를 위한 책인가 싶기까지 했던 『공부하는 삶』이 그것이에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 자신의 입장과 문제를 뚜렷이 보기 위해, 자신의 사유를 규정하기 위해, 계속 활동하면서 정신을 환기하지 않으면 시들해지는 주의력을 유지하고 자극하기 위해 써야 한다. 또 쓰다보면 더 조사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노력하다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어 지칠 때 기운을 북돋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신의 문체와 글의 특징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써야 한다.”
같은 책에 문체와 관련된 문장도 나오네요. 읽어볼 필요가 있을 듯해요.
“언어를 죽이는 것은 바로 언어의 무의식적 사용이다.”
역시 같은 책에 나오는 폴 발레리(Paul Valery)의 말이에요.
“좋은 문체는 쓸모없는 것을 모조리 배제한다. 문체는 풍요 속의 긴축이다. 문체는 필요한 대목에서는 소비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능숙하게 배열해 절약하며, 또 어떤 대목에서는 진리의 영광을 위해 자원을 아낌없이 쓴다. 문체의 역할은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문체 자체의 영광이 드러난다. 미켈란젤로는 ‘아름다운 것이란 모든 과잉을 제거한 것’이라고 말했고, 들라크루아는 미켈란젤로가 ‘배경은 크게, 볼의 선은 단순하게, 코는 대강 그렸다’고 지적했다.”
폴 발레리와 미켈란젤로, 들라크루아의 조언에 따라 정의 해보면 문체가 갖추어야 할 특성은 다음 세 단어로 포괄할 수 있어요. 진실, 개성, 간결함! 그걸 다시 단 하나의 말로 요약하자면 ‘진실하게 써야 한다’가 될 테고요. 결국 진실한 문체란 사유의 필연성에 상응하는 문체, 대상들과 긴밀히 맞닿아 있는 문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문체의 3가지 요소: 진실, 개성, 간결함!
어느새 ‘나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두 개의 답을 정리했네요. ‘고통을 달래주는 글쓰기’로 시작해 ‘공부로서의 글쓰기’, 그리고 ‘어떤 문체로 써야 진실한 글이 되는지’까지. 이제 한 가지가 남았네요. ‘소통을 위한 글쓰기’ 말이에요. 소통하는 글쓰기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다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할 듯하네요.
고백컨대 한동안 주위의 반응에 연연하곤 했었어요. 누군가 날 좀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글을 썼던 거죠.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본질에 충실했다고 볼 수도 없는 일이지요. 본질보다 피상에 매달렸다고 할까요.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먹어야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어요. 반응에 연연하기보다 순전히 저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반응을 의식하게 되니 말이에요.
그런데 말이지요. 진실한 글을 쓴다는 건 결국 진실한 소통을 원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러니 반응에 연연하는 건 단지 본질과 피상의 이분법적 문제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는 생각이에요. 그런 마음을 정리해줄 몇몇 예화를 들어보면 그 뜻이 좀 더 잘 드러나지 않을까 싶네요.
2차 대전 직후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를 발표했어요. 책에서 오웰은 글쓰기의 동기를 크게 네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요. 생계 때문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네 가지 동기, 즉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으로 글을 쓴다는 거죠.
모든 글은 정치적 목적을 갖는다!
오웰의 분석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서 냉정하게 말하자면 모든 글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다나요.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는 결국 정치적 목적을 가졌다는 거죠. 그게 정치인 줄도 모른 채 그러고 있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에요. 누군가 나는 정치적이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 역시 대단히 정치적인 발언이 되는 거잖아요.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느낌의 공동체』에서 “글쓰기가 어느새 현대인의 주된 소통수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말했어요.
“예전 사람들이 주로 직접 대면을 통해 소통했었다면 전화가 등장한 100년 전부터는 대면과 전화통화로 소통했고, 각종 디지털매체가 등장한 오늘날 대부분의 소통은 글을 통해 하고 있다.”
그렇기도 한 것이 개인 간에 주고받는 문자나 카카오톡 메시지, 메신저는 물론이거니와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 역시 글쓰기를 기반 두고 있잖아요.
인류역사, ‘말의 시대’와 ‘글의 시대’의 교차
인류의 역사는 ‘말의 시대’와 ‘글의 시대’가 교차하면서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어요. 중세 이전의 서구사회가 말의 시대였다면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신교가 등장하면서 서구의 기독교 사회는 완연한 글의 시대가 되었지요. 계몽의 시대와 초기 근대를 넘어 후기 자본주의로 넘어오면서 글과 말은 다소간의 부침과 전도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글의 시대 기조는 지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고요.
단언컨대 21세기는 확연한 글의 시대가 아닐까 싶어요. TV보다는 SNS로 소통하며 세상을 읽고, 직접적인 대면을 통한 대화보다는 글을 매개로 하는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소통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요.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실감 나는 시대이기도 해요. 몸에 난 상처는 치료하면 되지만 글로 인한 상처는 치유가 되지 않을뿐더러 엄청난 불행을 야기하기도 하니까요.
글쓰기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커지고 있어요. 이유는 다를지 몰라도 누구나 글쓰기를 고민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고요. 그래서예요. 글은 소통의 수단이기만 한 게 아니라 나의 영혼을 내보이는 일이면서 동시에 상대의 영혼과의 교류이기도 하다는 걸 알아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행복한 사람이네요. 영혼을 ‘위로하는 글쓰기’, ‘공부로서의 글쓰기’, 타인과 나 혹은 공동체와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소통의 글쓰기’를 두루 경험하면서 살고 있으니까요. 여러분의 글쓰기는 어떤 글쓰기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