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자들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다. 사회적 차별과 편견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각 교단이나 개교회에 따른 차이는 있으나,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나서는 교회 공동체는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퀴어 문화 축제에 난입하여 훼방을 놓고, 차별금지법, 그리고 성소수자들의 결혼권을 반대하는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의 이런 행동들이 성서적인 것이며, 교회 전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성서엔 ‘동성애’라고 하는 단어가 명시되어 있진 않다. 성적지향으로서의 ‘동성애’라고 하는 어휘는 19세기에야 등장한 근대의 산물이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고, 나그네들을 환대하지 않은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오랫동안 잘못 알려져왔다. 소위 동성애 혐오 구절이라고 알려진 성서본문들은 대개는 성폭력이나 이방제의에 대한 비난 메시지를 동성애자들을 향한 혐오로 왜곡되어 왔다.
성서는 한 인물, 한 시대, 한 문화권에서 기록된 책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오랜 세월, 다양한 문화 속에서 기록된 책이기에 때론 모순되는 관점들이 공존하기도 한다. 따라서 성서는 노예제, 여성차별을 지지하는 폭력의 도구가 되었던 동시에, 노예해방, 여성해방의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성서는 소위 주류에 속하지 못한 성을 가진 이들에게 늘 관대했던 건 아니다. 성서가 노예제와 여성차별을 지지하는 폭력의 근거가 되었듯이, 성서는 성적으로 비주류, 약자에 속한 누군가를 성적으로 차별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바로 이 주류에 속하지 못한 젠더의 사람들은 성서에서 “고자”, “거세된 남자”, “환관”, “내시” 등으로 불렸다. 이 거세된 남자들은 유대전통에서 생물학적으로 출산이 불가능한 남자들 혹은 남성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 남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유대 바벨론 탈무드에는 이들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머리가 길고, 일반적으로 구부려서 소변을 보지 않고, 턱수염이 없으며, 머리결이 부드럽고, 매끈한 피부에, 높은 톤의 목소리에 땀이나지 않는 겨울에도 목욕을 한다.
– Talmud Bavli, Tractate Yevumos. The Schottenstein Edition, Mescorah Publications LTD.m Brooklyn, NY, 1999. 80.
이들은 당시 유대 사회로 부터, 고정관념과 편견에 시달렸으며 랍비 엘리제의 경우 거세된 남자들은 치유 될수 있고, 치유 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전통적으로 유대사회에서 이들에 대한 대우는 차별적이었다. 신명기 23장 1절은 “고환이 터졌거나 남성의 일부분이 잘린 사람은, 주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못박음으로 거세된 이들을 종교적 자리에서 배제시켰다. 이런 입장은 “아이들을 가지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무”라는 랍비적 견해와 맥을 함께 했고, 아이를 가질수 없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집에서 배제되었다.
이런 관점은 신약시대에도 계승된다. 다만 신약의 경우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아래 있었기에, 이를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자손을 생산할수 없는 속성은 헬레니즘 세계에선 환관(거세된 남자)를 결정짓는 요소였다. 환관들은 혈통을 세울수 없다는 이유로 관리에 등용었고, 상당히 높은 권력을 갖기도 했다. 이들의 속성은 생물학적 여부 뿐 아니라 사회학적 성(젠더)에 따라 결정되기도 하였다. 여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남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남성들 역시 환관으로 여겨졌다. 퀸투스 커티우스가 기록한 알렉산더와 바고아스 일화는 이런 환관에 대한 이해를 알려주는 자료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에티오피아 환관은 바로 이런 인물일 거라고 추정된다. 그가 생물학적 요인으로 환관이 되었는지, 사회학적 요인으로 환관이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 환관은 앞서 언급한 유대 전통(신명기 23장1절)에 따라, 유대 종교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으로 추정된다. 로빈 스크록스 교수는 1세기 유대교 철학자 필로를 인용하며, 환관은 공동체로의 진입이 거부었을 뿐 아니라 로마의 동성애 매춘 남성들과 연관시켰다고 전한다. 마티 니시넨 또한 “크리스천 공동체에 들어가고자 하는 환관은 토라에 의해 무시되고 금지되었다”고 주장한다.
에티오피아 환관는 예루살렘에서 거부되었고,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배제되었을 거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사도행전은 이런 환관과 빌립의 만남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성령의 인도로 빌립은 이 환관에게 “예수의 복음” (행 8:35)을 전했고, 세례를 배풀었다. 이는 분명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전통과는 대비되는 행동이었다.
폭력과 해방의 메시지가 공존한다는 서두의 언급처럼, 구약에도 신명기 23장1절과 대비되는 부분들이 성서안에 존재한다.
거세된 남자가 ‘나는 마른 장작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라.
이러한 이들에게 주께서 말씀하신다.
나의 안식일을 지키는 거세된 남자들,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선택하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킨 자들에게
나는 나의 집에 그리고 나의 성 안에,
기념물이나 아들들과 딸들보다 훨씬 더 좋은 이름을 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잘려나가지 않을 영원한 이름을 줄 것이다.
– 이사야서 56:3-5
또한 그 손이 율법을 어기는 행위를 하지 않고,
그리고 주님께 대항해 사악한 것들을 꾸미지 않은 환관(거세된 남자)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의 충실함에 대하여 특별한 은혜가 보일 것이며,
주님의 성전에서 큰 기쁨의 자리가 주어질 것이다.
– 지혜서 3:14
해방의 함의를 담은 구약의 이런 전승들은 게이에 대한 긍정적인 예수 전승의 요소들을 논함에 있어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당시에도 이와 반대의 입장을 수용하고 있던 전승을 비판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 테드 제닝스 교수(시카고 신학교)의 주장이다.
예수 역시 이런 해방적 관점에서 레디칼한 발언을 한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다. “만일 그것이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 있어 참이라면, 결혼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겁니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두가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직 타고난 자들만이 받아들일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고자인 자들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거세된 자들이 있으며, 하늘 나라를 위히 스스로 거세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는 누구라도 받아들여라.”
– 마태복음 19:10-12
예수는 거세된 자들에 대해 세가지 범주를 제시했는데, 테드 제닝스 교수에 따르면 두번째 범주의 거세된 자는 헬레니즘 세계의 풍습이었던 매춘 혹은 제의적 목적으로 거세 된 의한 사람들이었다. 세번째 범주는 생식 능력을 봉헌한 이들로 헬리니즘 세계에서 신비적 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과 유사한 맥락으로 읽어낸다. 첫번째 범주는 조심스레 생식능력이 없는 양성 구유(intersexual)를 조심스레 추측한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이와 같은 발언은 성적 이유로 배제받고, 밀려나있던 이들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합의점이 모아진다.
“예수의 말씀은 그의 제자들이 흔히 놀림감이 되었던 성적인 소수자들과 연관 짓게 했다. 가장 주변적인 자들과 이러한 연대는 예수 전승의 진정한 특징이며, 이러한 연대의 폐기는 그들이 ‘주님, 주님’ 하며 부르짖는 이에 대한 교회의 배신을 확인할수 있는 척도가 된다. (마태복음 7:21)
– 테드 제닝스, 예수가 사랑한 남자, 277 쪽
성서는 동성애 혐오적인가? 라는 질문은 다양한 젠더 스펙트럼을 협소화 한다. 우리가 주목 할 사실은 성, 젠더 때문에 차별받고, 배제 되어야 했던 이들에 대한 증언하는 예수전승,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 일화, 이사야서, 지혜서의 급진적 메시지다. 성서에 근거한 폭력적 전통에 정면으로 대항한 해방적 전승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제기는 단순히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의 테두리를 넘어, 성적 이유로 억압받는 모든 이들을 향한 교회의 태도와 크리스천들의 자세를 성찰하게 한다.
성서는 섹시스트인가? 성서는 호모포비아인가? 이 물음을 현대적 관점에 비추어 온전히 아니라고 답하긴 어렵다. 다만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은 성서와 교회 역사 속에 끊임없이 있어왔다.
성적 이유로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성서해석과 공동체적 태도를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재정립하는 것, 이는 성서 속 예수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도발적 사랑명령이다.
원문: Hae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