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각능력은 막강하고 가상과 현실은 별 차이 없다
일상의 시각은 평범하고 환각을 별난 현상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인 것 같다. 환각이 일상이고 현실과 거의 정확히 일치하는 환각만을 만드는 것이 정말 대단한 것이다.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어마어마한 환각(뉴로그래픽) 장치로 세상을 보면서 그냥 눈으로 세상을 본다고 착각했으니 우리의 환각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
우리의 환각 능력의 막강함은 위기의 순간에 살짝 그 힌트를 준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위급한 사고의 순간 아주 짧은 순간에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모든 기억이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흘러갈 수 있다. 다음은 최종호 씨의 사례이다.
“그는 스카이다이빙을 하다가 막 내려앉으려는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사고를 당했는데, 추락하는 그 짧은 순간에 여러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가족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이루지 못했던 아쉬운 일들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강하게 기억에 남은 또 다른 일들이 스쳐갔다.
특전사 시절,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후회스러운 순간들도 떠올랐다. 남에게 상처 주었던 말들이나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기억도 떠올랐다.
심지어 강원도 특전사 시절, 구보를 하다가 천고지에서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번쩍하고 벼락 맞은 기억도 떠올랐다고 한다. 당시 군대 동기들의 말에 의하면 신기하게도 자신이 벼락을 맞고도 잘 걸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에게는 그러한 기억이 없었다. 사라진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그는 자신의 파노라마 기억이 가장 아쉬웠던 순간, 힘겨웠던 순간, 기뻤던 순간들이 조각조각 연결되어 이어졌고, 그 기억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라서 마치 모든 순간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아빠를 잃게 될 아이들이 가장 많이 생각났다고 한다.” – <KBS 사이언스 대기획 인간탐구, 기억> 김윤환
이것이 모든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환각 능력인데, 평소에는 억압되어 있다가, 엄청난 위기의 순간이 오자, 모든 억압이 풀리고, 자동으로 발생한 뉴로그래픽이라 생각해보면 우리의 환각 능력이 얼마나 막강한 것인지 짐작하게 될 것이다. 1849년 도스토옙스키는 감옥에서 끌려나와 다른 2명과 처형장에 말뚝에 묶였다. 사격 자세를 취한 군인 앞에 1명은 공포로 신경붕괴가 일어났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
그리고 여러 해 뒤에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기억에 그날처럼 행복했던 때는 없소.” 그는 그 5분을 무한한 시간처럼 느끼며 불현듯 황홀한 깨달음에 휩싸였다. 삶 자체가 가장 큰 기쁨이며 우리는 매순간을 영원한 행복으로 만들 힘을 자기 안에 지녔다는 찬란한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환각 능력은 실로 섬세하고 생생하고 처리속도마저 엄청나다. 절대 위기의 순간에 1초에 일생의 중요한 기억이 순간적으로 펼쳐지는 것도 가능하다. 억압만 해제되면 현미경적인 상세함과 눈을 떼기 힘든 화려한 색깔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자극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의 시각은 아주 평범해야 한다. 인간이 즐기기 위한 감각 시스템이 아니라 이기적인 DNA, 또는 이기적인 뇌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감각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저 생존과 번식에 충실하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유지할, 너무 주의를 끌지 않을 정도의 일상적인 화면을 제공하고, 생존에 필요한 주의를 끌 만한 정보만 제공한다.
새는 공간지각의 천재이고, 개는 후각의 천재이다. 인간은 감각의 천재성은 줄이고 생존에 필요한 수준으로 억압한다. 자폐증 환자의 경우 천재성을 가지는 경우도 상당히 있다. 기능의 보완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억압의 부족이 천재성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기능에 천재성이 있는데 일정 비율로 억압되어 일반화된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덜 억압된 천부적인 기능이 패턴화 능력과 이것을 이용한 무한한 가상세계의 창조능력이 아닐까 생각된다. 억압되어야 평범해지고, 담담한 평범한 일상이 비범한 차이 식별의 기반이다. 현실은 감각에 억압된 환각인 셈이다.
없던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정말 위기의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초능력이 생긴단 말인가. 없던 초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본래있던 기본 능력이 억압에서 풀려난 것이다.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모든 세포가 불쑥 불쑥 동작한다. 그런 동작은 주변의 세포와 상호작용에 의해 철저히 억압받는다. 그리고 단 하나의 의식적 행동만 하는 것 처럼 행동한다. 정말 급한 상황이 되면 그런 억제력이 상실되고 본래의 기능이 마구 분출된다. 초능력적인 기억력, 환각, 임사체험 … 이런 것은 그런 기능의 분출이지 전혀 신비한 현상이 아니다. 그냥 ‘탈억제’ 현상이다.
망각이 생존의 원천이며 축복일 수 있다
아주 일상적인 환각이 꿈이다. 아이들은 꿈도 자주 꾸고, 잠꼬대도 심하다. 아직 억제 시스템이 완성되지 않아 꿈이 기억에 자주 남고, 운동이 완전히 차단되지 않아 꿈에서 유발한 동작이 일부 표출된 탓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차 억제 시스템이 완성되어 꿈을 기억하는 일은 드물어지고 잠꼬대도 적어진다. 우리 몸은 꿈이 차단되도록 설계된 것이다.
그러면 일상의 기억은 가급적 많이 떠오르게 설계되었을까? 나는 일상의 기억도 가급적 떠오르지 않게 설계된 것이라 생각한다. 뇌의 장애에 비해 탁월한 기억력의 서번트 증후군 환자가 사회생활에 적합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감각의 세계에 갇힌 자폐증 환자가 생존력이 높은 것도 아니다.
기억도 꼭 필요한 만큼 만 기억되고 회상되어야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이기적인 뇌가 아닐 수 없다. 잊고자하는 나쁜 기억은 잊기가 힘들고 기억하고자 하는 즐거운 추억은 잊기 쉽다. 오로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기억만 억제되지 않고 잘 기억된다.
전쟁, 자연재해, 테러, 성폭력 등 공포를 경험한 후에는 여러 가지 심리적 고통과 정신적 장애에 시달릴 수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가 대표적인 경우로 심하면 일상생활에 문제가 발생한다. 이라크 전 참가자의 약 17%가 트라우마를 겪어 전역 후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하기도 쉽지 않지만, 지우고자 하는 기억을 지우는 것도 정말 쉽지 않은 셈이다. 따라서 무작정 모든 것을 기억하는 기억력이 생존에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기억도 환각처럼 억제되어야 할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
맛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여 상상(기억)만으로 충분히 쾌감을 느낄 수 있다면? 요즘 나날이 가상화 기술이 발전하는데 사이버 섹스가 현실보다 만족스럽다면? 또는 그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상상을 통해 얻는 쾌감과 별 차이가 없다면?
인간은 힘들게 음식을 찾아 애쓰려 하지 않았을 것이며, 비용이 많이 드는 결혼 생활보다 가상의 섹스에 만족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인간은 이미 멸종했을 것이다. 이기적인 뇌는 딱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수준만큼의 기억과 환각(상상) 능력만을 허용하는 셈이다. 물론 이 억제 능력도 완벽하지는 않다. 생각보다 흔들리기 쉬운 시스템이다.
원문 : Seeh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