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했던 소녀 여공
김경숙 열사는 1957년 닭띠로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태어났다. 8살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떡장수로 생활 전선에 나선 어머니 대신 동생 둘을 건사하는 일은 그녀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국민학교 졸업을 끝으로 그녀의 학창시절은 끝장이 났다.
사춘기도 채 넘기지 못한 나이로 그녀는 공장에 가야 했다. 그 시절의 여느 누이들처럼, 그녀는 자신이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동생들만큼은 번듯하게 자라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준곤이한테는 이 누나가 꼭 대학까지 공부를 가르쳐 주겠다고 엄마가 대신 잘 말해 주세요. (준곤이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그녀가 죽기 사흘 전에 쓴 편지 일부다.
몇몇 공장을 전전하던 그녀는 1976년 가발 생산 기업 YH무역에 입사한다. 왕십리에서 달랑 10명의 직원으로 시작하여 몇 년 만에 대통령 훈장이며 산업포장까지 골고루 거머쥔 YH였지만 애석하게도 김경숙이 입사하기 얼마 전부터 현격한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래도 김경숙은 꿈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글 한 자라도 깨우치며, 시간의 여유를 갖지 않고 주어진 시간 속에 지내고 있지만 하나의 꿈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구나.
- 1978년 4월 17일
힘겹고 고달파도 꿈을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치던 처녀는 꾹꾹 눌러 쓴 일기장 속에 스스로를 담는다. 그 일기장 속에는 하소연도 있었고 다짐도 있었다. 가끔은 일하는 기계요, 공부하는 동생의 누나만이 아닌 한 명의 개인으로서 설렘도 가졌다가 와장창 환상이 깨지는 허망함도 있었다.
펜 벗을 통해 알게 된 모르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무엇인가 아쉬움에 약속 장소에 나갔다가 한번 사방을 둘러봤다. 나의 기대보다 실망이 커서 차마 만나지는 못하고 발길을 돌리고 튀김집에 들어가 튀김을 즐겁게 먹고 숙소로 돌아올 때, 나는 정말 바보다.
- 1978년 1월 8일
하지만 “(밤을 새워) 7시까지 일하고 아침을 먹고 또 근무를 하고 비틀대며 숙소로 돌아와 밥을 먹는데 밥이 먹히지 않는” 노동을 하고서도 제대로 된 월급을 받지 못하고, 동료들이 직장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보면서 김경숙은 “과격 같은 거 하고는 전혀 거리가 멀었던”(공장에서 운영하던 중학 교사의 증언) 삶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YH 사건의 발발
YH 무역을 세웠던 설립자 장용호는 벌써 한몫 챙겨 미국으로 튄 지 오래였고, 그 뒤를 이어 회사를 맡은 장용호의 동서 진동희는 회사를 말아먹기만 하다가 결국 1979년 3월 공장을 폐쇄해 버린다.
하루아침에 밥줄이 끊긴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결사적인 투쟁을 벌이지만 때는 바야흐로 시베리아 공화국 유신 시대였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조차 대통령 긴급조치로 무력화되었던 시기,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는 곳은 드물었다. 마침내 YH 여성 노동자 수백 명은 야당 신민당사에 집결한다.
적어도 그 순간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그가 태어난 역사적 가치를 다한다. “내가 있는 한 누구도 여러분을 끌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여성 노동자들 편에 설 것을 다짐한 것이다. 그는 신민당사를 포위해 오던 마포경찰서 정보과장의 뺨을 때리면서 부르짖는다.
“참말로 이 여공들을 뛰어내리게 만들 끼가?”
뺨을 실컷 맞은 마포서 정보과장이 물러난 뒤 득달같이 시경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경찰을 때려? 2시까지 해산하지 않으면 들어간다.”
시계를 보니 2시 2분 전이었다. 그리고 경적이 날카롭게 세 번 울리는 것을 신호로 경찰은 신민당사를 덮쳤다. 신문 기자고 야당 국회의원이고 가릴 것 없이 몽둥이와 주먹질이 퍼부어졌다. 여성 노동자들에게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와중에 김경숙은 건물 옆에서 추락 사체로 발견된다.
그녀의 ‘자살’
경찰은 사망원인에 대해 세 번씩이나 말을 바꿨다. 처음에는 “4층에서 떨어지는 것을 경찰이 받았다”더니 “동맥을 끊은 뒤 투신해 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했다”고 번복했고, 최종적으로 나온 말은 “동맥 절단 뒤 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많은 의문이 제기됐다.
부검 결과 김 씨의 손목 상처는 동맥이 있는 부분보다 훨씬 아래쪽에 좌우가 아닌 수직으로 나 있어 자살을 기도한 흔적으로 보기 어려웠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에서 나타난 흉부 출혈, 타박상 등은 추락과는 관계없는 상처였다. 또 그 손등엔 쇠파이프 자국이 험악하게 나 있었고, 그리고 머리에는 무엇인가에 가격당한 상처가 역력했다.
그녀의 일기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난다.
성숙해져 버린 몸과 귀 그리고 사상과 이념…… 어느 누가 이토록 우리를 성장시켰을까.
1979년 8월 11일, 김경숙의 성장은 참혹하게 멈췄다.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동생 하나만 보고 살았던 성실한 여성 노동자는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채 스물둘의 일생을 마쳤다. 미국 국무성이 논평을 통해 ‘한국 경찰이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을 해산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고 잔인한 폭력을 사용한 것을 개탄’할 정도로 끔찍한 폭력 앞에 그 몸뚱이는 차디차게 식어갔다.
그 죽음은 박정희 정권 종말의 시작이었다. 유신의 종말을 부른 여성 노동자는 가족에게도 한 맺힌 유산을 남긴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YH와 서울시, 광주시, 서울 시경 등이 급히 마련한 돈 1,200만 원이 위로금으로 전달된 것이다. YH공장 A급 노동자의 월급이 3만 원이던 시절이었다.
원문: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