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지폐는 모두 7종이나 됩니다: $1, $2, $5, $10, $20, $50, $100. 게다가 한국 사람에게는 낯선 얼굴들이 잔뜩 그려져 있어서 별로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지요. 저도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습니다. 지난 8일 밤 인턴 생활을 위해 미국에 도착한 이후 지금까지 계속, 미국 지폐로 집세를 내고, 먹거리를 사고 하면서 살고 있지요.
그런데 미국 와서 일주일 정도 된 어느 날, 지폐를 찬찬히 살펴보다 알아차렸습니다. 지폐 도안에 일종의 패턴이 있더군요.
$1, $10, $100 – 건국의 영웅들
우리가 10진법 체계를 쓰고 있는 만큼 화폐단위에서 가장 기준이 되는 지폐는 역시 10의 자릿수 지폐일 겁니다. 미국 지폐에서 여기 해당하는 지폐는 $1, $10, $100권이고, 여기에는 각각 조지 워싱턴, 알렉산더 해밀턴, 벤저민 프랭클린 의 얼굴이 그려져 있죠.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건국의 영웅이라는 점입니다. 조지 워싱턴은 미 독립군 총사령관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죠. 알렉산더 해밀턴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초대 재무장관으로서 국가채무 해결과 재정운용 방안을 수립함으로써 신생 미국의 재정적 안정을 이루어 낸 사람입니다.
해밀튼이 재정 운용 계획 승인을 받기 위해 의회에 제출한 공공채무 보고서는 초기 미국의 재정 상황을 보여 주는 보고서인 동시에 초기 미국 영어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비록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그 업적에서는 워싱턴에 못지않습니다. 이 사람은 독립전쟁 전부터 영국과의 협상 대표였고, 외교관으로서 프랑스의 지지를 얻어 냈으며, 미국 독립 선언서 작성을 기초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계몽 사상가로서 미국 헌법의 뼈대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미국의 헌법은 특이한 게, 수정은 해도 개정은 하지 못합니다. 아마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x차 수정 헌법” 같은 표현을 보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만큼 미국 정치에서 헌법이 가지는 중요성이 크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의 산파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프랭클린인 겁니다.
이 사람들은 또 다른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당파성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 건국 초기에는 연방파와 민주공화파, 두 개의 정파가 있었습니다. 민주공화파를 계승한 정당이 현재의 민주당이고, 1824년 민주공화파에서 탈당한 보수파와 연방파 등이 합세하여 만들어진 세력이 이어진 것이 현재의 공화당입니다. 워싱턴과 프랭클린은 소속 정파 자체가 없었고[ref]다만 워싱턴은 연방파에 아주 조금 더 가까웠다고도 한다.[/ref]연방파의 대표선수격이었던 해밀튼 역시 현재로써는 딱히 어느 한쪽 사람으로 보기가 힘든 겁니다. 누구나 공적을 인정하고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 이것이 이들의 공통점이죠.
$5, $50 – 연방정부의 기틀을 다진 사람들
그렇다면 5로 시작되는 지폐 두 장은 무엇일까요? $5 지폐에는 에이브러햄 링컨 이, $50에는 율리시스 그랜트 가 그려져 있습니다. 1861년 노예 해방론자인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이 되자, 흑인 노예가 많았던 남부 주들은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남부 연맹(CSA;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조직합니다.
5년에 걸친 남북전쟁(1861~1865) 동안 링컨은 대통령으로서 미 연방정부를 이끌었습니다. 연방정부는 초기에 크게 고전했지만, 결국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총사령관이었던 전쟁영웅 그랜트는 훗날 대통령이 되었죠.
즉, 이 두 사람은 연방정부의 권력을 공고히 함으로써 지금의 미합중국을 건설한 사람들입니다. 아마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졌더라면 지금의 미국은 없었을 겁니다. 미국의 주는 우리나라의 도하고는 완전히 달라서, 각 주의 헌법도 의회도 군대도 있는 말 그대로 진짜 ‘나라’거든요. 연방 정부만 없으면 얼마든지 쪼개질 수 있는 셈입니다. 미국 건국 초기 연방정부는 초라할 정도로 힘이 없었지만[ref]제대로 된 군대가 없어서 민병대로 반란을 진압했을 정도.[/ref], 남북전쟁 이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산업화 정책을 밀어붙임으로써 지금의 경제 대국으로서의 길을 열게 됩니다.[ref]
그런 면에서 한국에서 사용되는 북군·남군이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각 주에게 노예를 금지하라고 강요할 권리가 연방 정부에게 있느냐 없느냐, 연방 정부가 마음에 안 드는 정책을 펼쳤을 때 각 주는 거부할 권리가 있느냐가 전쟁의 핵심 쟁점이었기 때문이다 – 물론 그 뒤에는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있었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나온 책들을 보면 연방군(Union), 연맹군(Confederation)으로 표기한다.[/ref] 따라서 이 두 사람은 연방정부의 기틀을 다짐으로서 지금의 미국을 만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눈치채셨겠지만 이 두 사람은 모두 공화당 출신입니다. 그것도 공화당에서 배출한 첫 두 대통령[ref]각각 16대와 18대. 17대인 앤드류 존슨은 링컨 암살로 대통령직 승계.[/ref]이지요.
$2, $20 –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
그렇다면 나머지 2로 시작되는 지폐 두 장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2에 그려진 사람은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입니다. 그는 민주공화파의 영수로, 가난한 시골 농민 등 사회적 약자와 국민의 권리를 지지한 사람입니다. $20에 그려진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영미전쟁(1812 ~ 1815) 당시 영국군에게 점령된 워싱턴을 탈환한 전쟁영웅으로, 그가 표방한 보통 사람을 위한 정치(Populism)[ref]지금은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지만(특히 한국에서), 이 단어가 처음 미국에서 등장할 때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ref]는 흔히 잭슨 민주주의로 불리며 지금도 미국 민주당의 핵심 가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이라는 것입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건국 후 현 민주당의 전신인 민주공화파가 배출한 첫 대통령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공화당 역시 민주공화파의 혈통을 일부 잇고 있기는 합니다만, 여전히 정통 후계자는 민주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공화파 일부가 왜 탈당까지 해 가며 공화당을 만들었느냐 하면… 정책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무엇보다 빈농의 아들로 자수성가한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너무 서민적이고 천해 보여서 싫었거든요. 어디서 많이 본 이유인데[ref]또 하나 별로 유쾌하지 않은 공통점을 들자면, 이 두 사람은 경제정책, 특히 금융 관련 정책에 상당히 무지한 경향을 보였다. 특히나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제 2 합중국은행 연장 승인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경제 공황까지 소환했을 정도(…).[/ref]
정리하자면, 미국 지폐에는 건국 정신을 상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공헌한 사람들이 그려져 있으며 건국 이후 미국의 정치 발전을 이끌어 온 두 가치가 모두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가치를 실천해 온 두 정당의 주요 인물이 고르게 그려져 있음은 물론입니다. 한국인들 눈에는 잘 안 보이겠지만, 상당히 정교하고 짜임새 있는 도안 선정이라 이 얘기입니다.
유교의 나라, 한국
이걸 보다 보니 우리나라 지폐가 떠오르더군요.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지폐는 모두 4종으로, 각각 이황·이이·세종대왕·신사임당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조선시대 인물로 유교적인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들이죠.[ref]단, 세종대왕은 단순히 유교적인 가치의 대변자로 한정짓기엔 무리가 있을 수 있다.[/ref]
솔직히 3백 년도 안되는 역사를 가진 미국과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한국이 동일한 방식으로 지폐 도안을 선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폐만 놓고 볼 때, 이런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더군요: 대한민국이 유교를 국시로 하는 봉건 왕조인가요? 아니면 주권이 국민에게서 나오는 민주공화국인가요?
출처 : Gorekun.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