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 플랫폼=성공”?
이 등식은 기본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
IBM 호환 기종 PC(이하 PC)의 대성공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IBM이 취했던 개방 전략을 성공의 주 요인으로 든다. 부품들의 사양을 공개함으로써 많은 업체들이 싼 부품을 제공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맞는 이야기지만, 아주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PC 성공의 비결
1980년대 초, 컴퓨터 시장은 지금하고 많이 달랐다. 가장 큰 차이는 가정용 시장과 비즈니스용 시장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비즈니스용 소프트웨어는 일반 소비자용 소프트웨어와 좀 다르다. 일단 싼 기계에서 돌아가는 것이 좋고, 무엇보다 기존의 프로그램을 새로 산 기계에서 돌리는 것[1]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 점이다.
당신이 기업에 사용할 컴퓨터를 고른다고 해 보자. 비싼 정품 Apple II를 사겠는가, 아니면 싼 부품을 사서 만든 PC를 사겠는가? 이런 컴퓨터는 업무용 소프트웨어를 돌리는 데 무리가 없으면서도 가장 싼 것이 좋다. 그렇다면 정답은 당연히 PC 아닐까?[2]
기계를 바꿀 때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프로그램을 새로 작성하면서까지 다른 기종 기계를 새로 들여놓겠는가? 이미 오랫동안 사용해 온 기존 프로그램과는 달리, 새로 짠 프로그램은 버그가 어디에 있을지 모른다.[3] 그렇다면 정답은 간단하다: 업무용 PC를 한 번 구매하면, 앞으로 모든 업무용 기계는 전부 PC로 구입하는 게 좋다. 그래야 기존에 쓰던 프로그램들을 돌릴 게 아닌가.
이렇게 놓고 보면 PC야말로 당시 비즈니스용 시장에 최적화된 플랫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역사는 이러한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PC는 기업용 시장을 장악한 뒤, 가정용 시장을 마저 점거하여 컴퓨터 시장의 패자가 된다. 지금의 PC 환경은 이러한 승리의 결과물이다.
그러니까 PC의 개방 전략이 주효했던 이유는 결코 그것이 절대선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환경과 맞는 전략이었을 뿐이다. 뒤집어 말하면, 환경을 바꿨을 경우 이러한 전략은 삽질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게임기 시장의 역사는 이를 증명한다.
콘솔 비즈니스: 개방과 폐쇄 사이의 줄타기
게임기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대충 아래와 같다.
0. 다양성: 게임기 내에서 다양한 컨텐츠 제공.
1. 안정성: 뭘 사도 최소한의 퀄리티는 보장되어야 함.
문제는 1, 2가 서로 상충된다는 점이다. 1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작은 게임 회사도 게임을 만들 수 있도록 플랫폼을 개방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다양하고 재미있는 컨텐츠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2를 만족하기 위해서는 플랫폼을 폐쇄하는 것이 좋다. 아무나 마음대로 게임을 만들 수 있게 되면, 별 이상한 것들까지 다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80년대 초 세계 게임 시장을 주름잡았던 Atari가 허망하게 무너진 데는 바로 이러한 원인이 있었다. Atari가 플랫폼 스펙을 공개한 탓에, 아무나 마구 질 낮은 게임을 만들어 시장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이다.[4]
그렇기 때문에 이후의 게임기 회사들은 언제나 양자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게 된다. Sony, Nintendo 같은 게임기 회사들은 게임 개발 비용을 줄이고, 많은 플랫폼을 팔려고 노력[5]한다. 그래야 게임회사가 부담없이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 회사의 게임기에서 발매되는 게임들을 통제한다. 게임 회사가 제출한 기획서를 검토해서 괜찮은 것만 허가를 내주는 것은 물론이고, QA 과정을 거쳐 이것저것 고칠 것을 주문하는가 하면 발매량까지 정해 주는 경우도 흔하다. 언뜻 모순되어 보이지만, 이는 플랫폼의 성공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과정이다.
90년대 Sony Playstation의 성공은 이러한 전략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Sony는 기존의 롬 카트리지보다 가격이 싼 CD를 매체로 사용함으로써 개발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였고, 덕분에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18금 게임에는 심의 자체를 안 내 주고 게임의 발매량마저 강제하는 등 플랫폼을 강력하게 통제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Android가 진 문제들
스마트폰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많은 기업들이 경쟁을 하고 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라면 역시 Apple과 Google일 텐데, 최근 보도에 의하면 Google은 자사의 Android 플랫폼에 대해 좀 더 강력한 통제를 가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별다른 통제 없이 자유롭게 내버려뒀던 Android 플랫폼이지만, 앞으로는 어느 정도 통제를 가하겠다는 것이다. 혹자는 여기에 “너희들마저 통제를 하겠다는 것이냐” 면서 화를 내지만, 나는 이러한 결정이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틀림없이 Android는 애플리케이션의 수에서나 플랫폼의 수에서나 iPhone을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다. 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결제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기기들마다 인터페이스가 달라 헷갈린다는 유저들도 많다. 게다가 이 휴대폰에서 돌아가는 애플리케이션이 저 휴대폰에서 안 돌아가는 문제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무엇보다 Google 스스로가 너무 급하게 업데이트를 진행해서 개발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기계가 조금 더 많이 팔렸다고 좋아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Android가 처음 나올 때, 많은 사람들이 PC 시장의 예를 들어가며 Android가 곧 iPhone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거라고들 했다. 하지만 이건 그저 “소망”에 불과한 것 아니었을까? 스마트폰 시장이 비즈니스 컴퓨터 시장과 비슷했다면 그들의 말은 맞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일반 소비자용이라는 점에서 게임기 쪽에 더 가깝지 않은가? 그리고 게임기의 성공은 개방과 통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에 있지 않았나? 그렇다면 개방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는 것도 자명하지 않나?
나는 Android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고, 틈틈이 관련 책도 보고 있다. 하지만 그런 내 눈에도 Android가 iOS와 싸우기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아 보인다. 개방이 곧 선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제발 전략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공리를 되새겨 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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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조엘 스폴스키 저, 박재호/이해영 역, , 에이콘, 2005: 말이 필요없는 책. 내용이 다 좋지만, 특히 플랫폼 비즈니스에 대해서는 37장과 45장에서 이야기한다.
릭 채프먼 저, 박재호/이해영 역, 에이콘, 2007: 1, 2장에서 초기 컴퓨터 시장에서의 IBM에 대해 이야기한다.
레이몬드 챈 저, 손광수 역, , ITC, 2007: MS 제품군의 개발에 대한 흥미로운 뒷이야기. 다만 상당 부분이 기술적인 내용이라 관련 지식이 없는 사람은 읽기 힘들지도?
스티븐 켄트 저, 이무연 역, , 파스칼북스, 2002: 게임의 역사에 대한 책. 아타리의 몰락에 대한 부분이 흥미롭다.
우츠미 이치로 저, 전기정 역, , 세종서적, 1991: 닌텐도가 90년대 초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 나온 비즈니스 서적. 당시 게임시장에 대한 닌텐도의 시각을 살펴볼 수 있다.
다키타 세이이치로 저, 김상호 역, , 게임문화, 2001: 일본 게임시장의 변천사.
아사쿠라 레이지 저, 이종천 역, , 황금부엉이, 2003: Playstation의 아버지, 구타라기 겐에 대한 책. Playstation 아이디어의 발상에서 실현에 이르는 과정을 짚고 있다.
- 전문 용어로는 “하위 호환성” 이라고 한다. ↩
- 릭 채프먼에 의하면, 전기능을 구비한 PC는 당시 $4,000~$5,000 정도 했다고 한다. Apple II보다는 좀 비쌌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아니다. 무엇보다 $1256짜리 저가 모델을 산 다음 여기저기서 호환되는 부품을 사서 끼우면 그것보다 훨씬 싸게 구매할 수 있었다. ↩
- 레이먼드 챈에 의하면, Windows7이 나온 지금도 MS가 DOS 호환 모드를 없애지 않는 건 바로 이것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비즈니스용 프로그램들이 DOS 상에서 돌아간다. 낡고 구리구리한 프로그램들로 보이지만, 이들은 오랜 시간동안 버그가 해결되어 최고의 안정성을 자랑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런 프로그램들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
- 여기에 대해서는 Atari 스스로의 삽질도 한 몫 했다. Atari가 발매한 E.T는 최악의 퀄리티로 게임의 역사에 악명이 높다. ↩
- 게임기를 팔 때마다 게임기 회사는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즉 밑지고 파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발생한 손해를 게임 발매에 따른 라이센스로 메꾸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