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탁파업이 130일을 넘어섰다. 장기파업 현장들이 그렇지만 생탁도 이렇게까지 오래 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불매운동의 영향으로 매출도 감소했고 이에 사측도 당황해하는 기색이 엿보였기 때문에 다들 추석 전에는 합의가 되지 않을까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생탁 페이스북 페이지엔 파업 일수를 새는 포스팅만 쌓였을뿐 협상에 관한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파업으로 매출 20% 줄어든 생탁 – 황금알 낳는 거위 배를 째는 사장들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은 41명의 사장이다. 협상이 되려면 먼저 협상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사측에 그 주체가 없거나 있어도 주체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생탁 사측은 대표 사장이 물러나 부재한 상태다. 그래서 협상 자리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물러난 대표 사장도 나머지 사장들의 얘기를 들어봐야 한다는 식의 대응으로 일관해 책임있는 협상 자리를 만든 적이 없다.
생탁 41명의 사장들은 박정희 정권의 주류정책으로 부산지역 양조장들이 하나로 합쳐질 때 지분을 확보한 사장들이다. 이들은 40년 전에 확보한 지분으로 매달 2000만원의 배당을 받아가고 있다. 매달 배당을 받는 사장들에게 생탁 공장은 매달 임대료를 주는 건물 같은 것이다.
임대업자 같은 사장들이 생탁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고통에 공감할까? 이들에겐 적어도 사장이라면 가져야 할 회사의 미래를 위한 고민조차 없을 것 같다. 만약 회사의 미래성장을 위한 투자를 위해 배당을 줄이겠다고 하면 과연 41명의 사장들이 동의를 할까? 진정한 사장이라면 동의하겠지만 임대업자는 임대료 수입의 감소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들 사장 중 상당수는 부산에 살지도 않는다. 부모에게 지분을 물려받았을 뿐 부산과 관계가 없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생탁 장림공장의 사장 25명 중 12명은 타지에 살고 있는데 생탁 노동자들은 가끔 서울 사장들이 다녀갔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들을 뿐이다. 옛날 귀족들이 영지에서 소작을 받아 도시에서 사치스런 생활을 누렸는데 생탁 41명의 사장이 딱 그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생탁, 지옥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매달 2천만원씩 받아가는 41명의 사장들
바로 이런 걸 지대추구 행위라고 한다. 혁신과 노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경제적 지대를 확보해서 타인 생산물을 빼앗아가는 이런 지대추구행위는 사회에 독버섯 같은 작용을 한다. 혁신과 노동의욕을 무너뜨리고 너도 나도 지대추구 행위를 하도록 부추겨 사회를 몰락의 길로 이끈다. 소작을 받아먹던 귀족들은 결국 몰락했다. 지대추구 행위가 빈발한 나라 국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면 지대추구 행위가 얼마나 사회에 해악인지 잘 알 수 있다.
지대추구 행위를 하는 41명의 사장에 맞선 생탁 파업은 우리의 현실을 집약해놓은 현장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나 돈이 많은 사람들을 보며 들었던 의문을 생탁 노동자들이 풀어줬다. 매달 2000만원을 받아가는 41명의 사장과 고구마 먹으며 일하는 110명의 노동자, 바로 이게 우리의 현실 구조라는 것을 그들이 보여주었다.
생탁 노동자들은 지금 지대추구 행위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막걸리 공장에서 많게는 30년 가까이 악조건의 노동에 시달린 50대와 60대 노동자들 11명이 우리를 대신해 싸우고 있다. 생탁 노동자들이 싸움을 멈춘다면 전선은 크게 밀린다. 그러나 견뎌서 이긴다면 우리는 지대추구 행위에 경종을 울릴 수 있다. 어쩌면 이 싸움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지도 모른다. 이겨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응원한다.
해영 이모는 생탁집회에서 연설을 주로 맡아 하시며, 또렷하고 호소력 있는 발성으로 청중을 휘어잡는 솜씨가 탁월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 전혀 이런 활동이나 연설을 해본 적이 없다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9월 4일 이 분을 만난다는 생각으로 생탁집회 현장을 찾았다.
관련 기사 : 생탁 50대 여성 노동자가 노동계 스타가 된 이유
인터뷰 시작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쉰여섯이예요.
고향은?
충북 보은요. 그런데 전 식당에서 일해서 막걸리 만드는 그런 건 잘 몰라요.
괜찮습니다. 해영 이모 이런저런 이야기 그냥 들으면 되요.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85년에 결혼식 했어요. 시숙이 얼른 결혼을 안 하셔서 애 둘 낳고 결혼식 했죠. 애들이 82년생, 84년생이예요.
그때는 그랬죠. 그럼 혼인신고를 85년에 하셨다는 말인가요?
아니 혼인신고 다 해놓고 결혼식만 85년에 했어요.
부산엔 결혼하고 내려오신 건가요?
결혼 직전에 왔어요. 작은 아버지집에 왔다가…
생탁엔 언제 입사하셨습니까?
2010년 들어왔어요. 이제 만 4년 넘었어요.
생탁 들어오기 전엔 무슨 일 하셨습니까?
그전엔 애들 키우고 시부모님 모시고 살았죠. 결혼하기 전에 직장생활 조금 했어요.
가족들은 엄마의 파업에 대해 어떻게 말합니까?
파업 중에 우리 애 결혼식이 있었어요. 아들은 엄마 하는 일이니까 반대 안해요. 남편은 반대를 좀 해요. 처음엔 안그랬는데 100일 넘어 힘들어지니까 반대하기 시작했어요. 추석 전에 마무리 될까 싶었는데 그것도 안되니까 지금은 반대를 많이 하는 편이예요.
남편 분께서 해영 이모 연설하시는 것도 보셨죠.
그것 때문에 더 그래요. 마이크를 잡으면 손배청구 당하고 불이익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더 반대 해요.
회사 측에서 회유는 없었나요?
파업 14일째 되었을 때 사장님이 “해영씨 왜이러냐? 현장 일하는 것도 아닌데 들어가면 안되겠냐?” 그래요. 8일째 되는 날 형님(식당에서 같이 일하는)이 들어갔어요. 10일째 30명 회유당해 들어갔고요. 제가 그랬어요. “사장님 저는 못 들어갑니다. 저는 배신을 당해서 못 들어갑니다.” 다음날 그 형님 전화가 왔더라고요.
“내가 현장에 들어왔으면 따라 들어와야지. 니 내 안볼끼가?” “형님 들어갈 때 말 한마디라고 했어야지요.” “내가 내일 데리러 가께” “아뇨 저는 이제 못 들어갑니다.” 저는 촉탁도 아니고 일이 현장에서 하는 분에 비해 힘든 것도 아니예요. 처음엔 서운해서 남았던 거죠. 저한테 갈 거라고 말 한마디만 해줬으면 저도 갈등 안하고 들어갔을지 몰라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젠 끈끈한 그런 거 때문에 못가죠. 사람들 때문에 못가는 거죠. 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신랑이 만약 그만두라고 하면 차라리 사퇴를 해서 집에서 기다리고 있지 이렇게는 못들어 갑니다.
파업 하신 덕분에 근로환경 좋아졌다는 걸 그 분들도 아실텐데.
아주 좋아졌죠. 걔중에 미안해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느그가 일 안해서 힘들게 일한다”고 큰소리 쳐요.
자기합리화 같네요. 생탁에서 일을 하게 된 계기가 뭐였습니까?
어른들 2002년 돌아가시고 몇년 쉬었어요. 그러다 식당에 한 분 그만두면서 들어가게 됐어요. 그전에 집 앞이라 알바로 몇 번 일을 했었거든요. 하루종일 하는 거면 못했을 건데 식당일은 새벽 4시에 시작해서데 오후 12시30분에 마치거든요.
그렇게 한달에 한 번 쉬고 매일 일했죠. 출근은 어떻게 했나요?
예. 출근은 걸어서 해요. 10분 걸립니다.
아까 아들이 지지한다고 했는데 회사에 찾아온 적 있습니까?
통닭도 사다준 적 있어요. 회사에도 몇번 오고 해서 알기는 잘 알지요.
파업 후 스스로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실 텐데.
전하고 많이 달라졌죠. 전에는 이런 전단지 주면 무관심하게 넘어갔는데 이젠 안 그럴거예요.
회사에서 만든 식사는 어땠습니까?
하루 부식비가 900원이예요. 아침과 점심 두 끼를 먹으니까 한 끼에 450원이죠. 쌀은 회사에서 팔아 주더라고요.
450원으로 음식이 가능합니까?
총무부장이 끼어들었다.
총무부장 : 그러니까 육고기 국은 일년에 꼽을 정도죠. 보통 시레기국, 콩나물국, 미역국이예요. 450원으로 고기가 들어갈 수가 없죠. 간혹 수입산 새우 같은 거는 있더라고요. 식비가 파업하고나서 하루 1200원으로 올랐어요. 우린 파업 중이라 못먹어봤는데 그나마 나아졌다고 하더라고요.
“여기가 송장 처리 하는 데가?”
여자 분들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총무부장 : 사실 노동강도는 비슷해요. 그런데도 돈은 훨씬 적게 받죠. 여자들은 전부 다 근골격계 병이 다 생겼어요. 현재 파업 중인 조합원 중 2명이 인대가 끊어졌어요.
산재처리 안 해줍니까?
총무부장 : 그런 거 없습니다. 산재처리 해달라 항의 하신 분도 없었어요. 몰랐으니까. 촉탁 계약인데 누가 그런 말 합니까? 그랬다 짤리는데. 힘든 동일한 일을 반복하니까 현장에 근골격계 병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성조합원들은 골격이나 어깨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프면 고작 한다는 게 통증클리닉에서 주사 맞는 게 전부입니다. 침맞으러 가고 봉침 맞으러 가는 사람도 있고요.
인대가 터지면 너덜너덜해진 가닥이 신경 건드려 굉장히 아픕니다. 수술해서 잘라 내야 하거든요. 영순 이모는 수술했고 경순 이모는 아직이죠. 그런데 회사에서 뭐라는지 압니까? “이제 나이 많은 사람 안 써야 겠네. 여기가 송장 처리 하는 데가?” 그러는 겁니다.
작업 과정이 어떻습니까?
총무부장 : 빈박스를 수거하면 공병이 꽂혀 있습니다. 그걸 털어내야 해요. 5단 6단 7단 된 걸 갈고리로 끌어와서 털어야 해요. 그게 잘 안빠져요. 이걸 반복적으로 하다 보니 무릎에 힘이 많이 들어가잖아요. 남자인 우리도 몇 번 하니 힘들어요. 그런데 160센티도 안되는 이모들이 제 키보다 더 높은 8단 박스를 작업하는 거예요. 무게는 얼마 안되는데 동일한 작업을 계속 반복적으로 하니까 몸에 무리가 가죠. 같은 일을 하는 두 분이 동일한 부위에 똑같은 질환이 생겼는데 이게 일 때문에 생긴 게 아닙니까?
작업인원도 늘려야겠군요.
총무부장 : 그래서 우리가 처음 교섭할 때 파트별로 인원을 늘려달라고 했는데 이모들이 인원이 늘어나서 자기가 짤리면 어쩌냐 이런 걱정을 하는 거예요. 차라리 무거운 거 드는 남자를 고용해달고 해요.
요즘 교섭은 어떻습니까?
총무부장 : 지금은 교섭할 사장도 없습니다. 배째라입니다. 새교섭 사장 될때까지 기다리라는데 언제가 될지. 그래서 생탁 불매운동 본격적으로 나섭니다. 전체 매출 34.5%를 이익금으로 가져가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종업원 인건비 6.7%입니다. 자기들이 장기파업 안 가게끔 해야하는데 ‘라인은 나간다’ ‘술은 나간다’며 배 튕기고 있으니.
불매운동은 어떻습니까?
총무부장 : 처음보다는 아니지만 매출은 분명히 줄었습니다. 도매협회에선 굉장히 위기감을 느끼고 있고요.
페북에서 생탁 운반할 때 냉장차 안 쓴다는 글을 봤는데요.
총무부장 : 원래 10도 이하에서 운반해야 합니다. 그거 문제삼았죠. 그래서 회사도 카고트럭으로 하다 전부 냉장차로 바꿨거든요. 그런데 도매상은 아직 트럭 그대로 씁니다. 탑차 바꿀려면 2천만원 이상 들거든요. 그리고 회사 냉장차도 냉장고 틀고 운행하는지 의문입니다. 이거 무작위로 차 세워 온도 측정해봐야 합니다.
생탁 조합원들이 이동을 해야한다고 해서 같이 승합차에 올랐다. 좀 더 얘기를 들어야 할 거 같아서. 다시 해영 이모에게 물었다.
어릴 때부터 연설하는 거에 재능이 있는 걸 아셨습니까?
전 조용한 편이예요. 누구 말 들어주지 제 주장을 막 하는 편이 아니예요.
앞에 있는 분께 해영 이모에 관해 물었다.
해영 이모가 회사에서 보실 때 말을 잘하고 그랬나요?
명수 이모 : 다른 건 모르겠는데 문자 읽는 거 보면 달랐어요.
이 대답을 해주신 분이 바로 총무부장이 말한 인대가 끊어지신 분이었다.
인대가 끊어지신 걸로 아는데 일하신지 몇년 되셨죠.
명수 이모 :저는 28년 됐죠.
수술비는 얼마 들었습니까?
명수 이모 :110만원요.
회사에서 부담했나요?
명수 이모 : 아니요. 전혀요.
옆에 분도 인대 끊어지셨다고 하는데 몇년 되셨습니까?
경순 이모 : 22년요.
수술은.
경순 이모 : 전 아직 못했어요.
어떠세요? 파업 후 본인들 생활이 좀 달라지셨죠?
명수 이모 : 새로운 세상이예요. 딴 세상에 들어온 거 같아요. 파업하면 이렇게 도와주는지 몰랐어요. 이런 것도 있구나 정말 놀랐어요.
생탁 노동자들이 넉달째 월급을 못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석은 어김없이 다가왔습니다. 생탁 노동자들에게 올해는 가장 우울한 추석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생탁 노동자들이 지금 많이 지쳐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친데다 추석까지 맞으니 더욱 맘이 무겁습니다. 생탁 이모들은 새로운 세상을 봤다고 했습니다. 이 새로운 세상에서 물러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맞는 생탁 이모들의 첫 추석 풍족하지는 않아도 따뜻한 맘은 느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작은 정성 부탁드립니다. 만약 정성을 넘어 기적이 일어난다면 이 파업 곧 끝장나겠죠.
<관련 기사들>
원문 : 거다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