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지만 대선이 있는 해는 혼돈으로 치닫게 마련이다. 2007년 역시 매우 시끄러운 해였다. 2006년 열린우리당은 부동산 투기 광풍과 당 내분으로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지지율이 8%대로 추락했다. 여당과 정부는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2007년을 맞게 된다.
2007년이 시작될 때부터 이미 이명박은 대세였다. 그는 서울시장 재임 시절 버스체계 개편과, 청계천 복원을 통해, 수도권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다양한 매체의 연말 대선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그 어느 대선주자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격차를 보였다. 박근혜가 고정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더블 스코어에 가까운 차이를 보였고, 그녀는 고건과의 양자대결에서 거의 차이가 없었기에 이명박 대세론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열린우리당의 몰락 : 최악의 탈당 러시
2007년이 열리자 노무현은 5년 단임제에서 4년 중임제로 개헌을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한겨레의 곽병찬은 “그들에겐 역사적 책임이 돌아간다. 역사의 법정은 그들에게 직무유기로 유죄 평결을 내릴 것이다.”라고 했으며, 한국일보에서 손호철은 “지루한 개헌놀음에 더욱 엉망이 될 민생은 어찌할 것인가?”라고 돌직구를 던졌다. 보수언론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와중에 유일하게 이명박과 겨룰 수 있던 것으로 평가되던 고건 전 총리는 대선후보 불출마를 선언한다. 가뜩이나 어려워진 대선에서 노무현이 공감받지 못하는 개헌을 외치자, 열린우리당의 내분은 더욱 커졌다. 1월 22일 임종인 의원의 탈당을 시작으로 2월 6일 23명이 집단 탈당함에 이르기까지 탈당 러시가 일어났고, 제 1당 자리마저 한나라당에게 내주고 만다. 이는 결국 노무현의 탈당으로까지 이어진다.
한나라당 : 이명박과 박근혜의 엄청난 견제전
어떻게 해도 한나라당이 이길 것만 같은 분위기 속, 한나라당은 내분으로 속을 썩이고 있었다. 97년 이인제의 탈당 후 출마로 인한 대선 패배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명박은 국민들에게는 압도적 지지를 얻고 있었으나, 당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이명박과 박근혜에게 지지의사를 밝힌 한나라당 의원 수는 엇비슷했다. 그만큼 이명박과 박근혜의 견제도 심했다.
이명박은 “나처럼 애를 낳아봐야 보육을 얘기할 자격이 있고, 고3생을 4명 키워봐야 교육을 얘기할 자격이 있다.”고 박근혜를 공격했으며, 그때부터 해봐서 아는데의 전설이 시작됐다 이에 대해 박근혜는 “그런 논리대로 하면 군대 안 갔다 온 남자는 군 통수권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냐?”고 맞받아쳤다. 야! 신난다!
당에서는 둘의 화합을 중재하려 했으나, 경선 룰은 생각보다 쉽게 정할 수 없었다. 이명박은 점점 커지는 지지율 격차에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입장이었음에도, 경선은 단판 승부이기 때문이다.
이명박은 당의 결정에 따른다는 입장이었는데, 이 경우 자신에게 유리하게 국민 참여폭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박근혜는 ‘원칙’을 내세우며 룰 변경을 거부했다. 사실상 듣보잡 손학규는 이 와중에 룰 대폭 변경을 핑계요구했고, “박근혜와 이명박의 경선룰 합의는 단합.”이라 주장하며 존재감 알리기에 나섰다. 특히 그는 경선 시기를 늦추자는 주장과 동시에, ‘후보검증 청문회’를 주장했는데, 이명박을 제외한 모든 경선주자가 이에 찬성했다(…)
결국 경선룰은 3월 18일 결정됐다. 선거인단이 4만 명에서 20만명으로 (일반선거인단은 1만 2천 명에서 6만 명으로) 크게 늘었고, 시기는 6월에서 8월로 연기됐다. 이명박은 국민참여가 늘어났다는 점에서, 박근혜는 지지율 회복의 시간이 생겼다는 점에서 양측에 공평한 룰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손학규는 여기에 반발하며 3월 19일 즉각 탈당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좌우 모두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한국갤럽의 3월 19일 조사에 따르면 국민들도 부정적 의견(46.0%)이 긍정적 의견(18.6%)의 두 배 이상 높았다. 하지만 이와 함께 지지율도 상승했다. 같은 조사에서 손학규는 범여권 단일 대선후보 적합도 1위를 달렸다.
참고로 손학규는 나오자마자 노무현에게도 욕을 먹었다. 노무현은 “원칙을 파괴하고 반칙하는 사람은 진보든 보수든 관계없이 정치인 자격이 없는 것.”이라는 돌직구를 던졌다. 허나 워낙 노무현 이미지가 바닥인 시기라 되려 손학규의 이미지가 좋아졌다는 후문도 있다(…)
열린우리당 : 망했어요! 망했어요!
4월 30일 정운찬 교수가 대선 후보 불출마를 선언한다. 어차피 2%대 지지율에 불과했던 정운찬이 불출마 선언한 게 뉴스가 될 정도로, 당시 열린우리당의 이름 있고 신선한 대선후보에 대한 갈망은 심각했다.
원래 안되는 집은 시끄럽다. 5월 7일 열린우리당 탈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중도개혁통합신당(통합신당)이 출범했다. 이어 남은 정동영도 열린우리당 해산을 주장하자 노무현은 청와대 브리핑을 통해 “구태 정치로 보인다.”고 또 돌직구를 던졌다. 김근태는 이에 “대통령이야말로 구태정치.”라고 현피를 받아들였다. 정동영도 “열린우리당이 아닌 닫힌우리당.”이라 노무현 대통령을 저격했다. 팀킬! 외쳐! EE!!!
반면 통합신당은 세를 불려나간다. 6월 27일 민주당과 합당하며 중도통합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꿨으며, 8월 5일에는 손학규를 중심으로 하는 선진평화연대 세력, 미래창조연대를 통합하며 대통합 민주신당으로 또 개명한다. 여기에 8월 18일 열린우리당과 합당하며 승부에 종지부를 찍고 경선으로 나아간다. 그 와중에 김한길계가 탈당하며 민주당을 새로 만들기도 했다.
좀 복잡한데 정리하면 이렇다.
열린우리당 탈당파 의원 = 중도개혁통합신당
중도개혁통합신당 민주당 = 중도통합민주당
중도통합민주당 손학규의 선진평화연대 미래창조연대 = 대통합민주신당
대통합민주신당 열린우리당 = 대통합민주신당 (이름 안바꿈)
김한길계 탈당파 = (흔히 도로민주당이라 불리고 이인제를 대선에 내세운) 민주당
박근혜 vs 이명박 : ‘사실상’의 결승전이 된 경선
여권이 자멸하는동안 한나라당은 경선 열기로 뜨거웠다. 사실 2007 대선, 2012 대선에 나온 떡밥은 거의 이 때 다 나왔다(…) 6월에 이미 BBK와 정수장학회 이야기가 나왔다(…) 말이 쉬워서 검증이지, 거의 죽기 살기로 싸운 셈이다. 여권에는 지지율이 높은 인물도 없고, 범여권 정당의 지지율도 바닥이라 사실상의 결승전이었기 때문이다. 덕택에 정줄 놓은듯한 공약도 넘쳤다. 아래 이미지를 보자.
검증의 효과로 지지율 격차는 조금씩 좁혀졌다. 친인척 관여 부동산 투기 의혹, 부인의 15차례 위장전입 의혹, BBK 관련 주가조자 의혹, X파일 존재론, 산악회 선거법 위반 논란, 도곡동 땅 (뭐이리 많아;;;) 등이 이명박의 지지율을 조금씩 끌어내렸다. 워낙 비리 의혹이 많아서 박근혜의 최태민 목사와 정수장학회는 상대적으로 묻혀지기는 했으나 자신의 지지율을 충분히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아무튼 이 둘은 당시 정말 피터지게 싸웠다. 오죽하면 서로가 상대에게 불리한 녹취록을 공개하는 흥신소 일까지 서슴없이 저질렀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이 전설의 영상이다.
막판은 언제나 네거티브다. 이 상황에서 박근혜와 군소후보들은 이른바 ‘도곡동 게이트’를 강하게 문제 삼았다. 도곡동 게이트는 1985년 이명박의 처남 김씨와 형 이상은이 도곡동 일대의 땅을 잔뜩 매입한 후 지하철 개통으로 차익을 엄청 남긴 후 1995년 포스코에 되판 사건 (이 중 일부 땅은 현대건설에서 매입했다!) 이다.
경선을 6일 남긴 8월 14일 검찰에서 형 이상은의 몫 일부가 이명박의 차명계좌라는 중간수사발표가 나오자 이명박 사퇴론이 거세졌다. 그러나 대검찰청 차장 정동기가 곧바로 다음날 나서 “도곡동 땅은 이명박 후보 소유라는 증거가 없다.”라는 말을 던지며 가까스로 수습한다. 이후 정동기는 대통령 민정수석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다. 오해입니다. 으허허~ 도곡동 게이트 이후 박근혜와 이명박의 지지율은 10% 안으로 좁혀지지만 대세를 거스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결과는 이명박의 승리였다. 이명박은 80%를 차지하는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미세하게 밀렸지만, 일반 국민들의 여론조사에서 크게 앞서며 총득표 1.5% 차이로 한나라당 대선주자로 나서게 된다.
개판 5분 전의 현장 : 대통합민주신당 경선
이제 다시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을 보자.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있는데, 애초에 소문도 더럽게 난(…) 경선이었다. 어차피 지금부터는 뻔한 거니까 대충 쓰겠다.
빅2 손학규와 정동영은 예비경선이 시작하기 전날부터 충돌했다. 손학규는 정통성을 강조하는 정동영에게 “대선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이삭이나 줍고, 부스러기나 챙기려는 사람들”이라 비판했고, 정동영은 한나라당 출신 손학규에에 “한나라당의 이삭이나 줍고 부스러기나 챙기려는 사람은 이명박 후보를 이길 수 없다.”고 비판했다. 다 맞는 소리이긴 한데(…) 시작부터 원색적 비난이 오가며 개판의 징조가 보였다.
여론조사를 통해 손학규, 정동영,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순으로 5명의 컷오프자가 결정됐다. 여기서 또 투표율 오류까지 발생하며 개망신을 샀다. 이후 본경선 여론조사를 어떻게 처리하는가로 또 시끄러웠다. 그래봐야 이명박 1/3도 안되는 지지율이지만, 상대적으로 대국민 인기가 높은 손학규는 진성당원 따위 씹어먹으려 하는지 무려 여론조사 50%를 제안했다. 당내에서 인기 좋은 정동영은 여론조사 불가를 외쳤다. 결국 당에서 내놓은 10%로 쇼부를 봤지만… (다음 문단!)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울산-제주, 강원-충북에서 잇달아 정동영에게 밀린 손학규는 9월 19일 “신당 경선이 조직, 동원선거라는 구태정치로 회귀하고 있다.”며 뭔가 한나라당 때를 벗었는지 민주당스러운 짓을 한다. 칩거 사흘째인 9월 21일 다시 복귀했으나 , 선거대책본부를 해체하고 오후 부산지역 TV 토론회에 불참하며 사실상 당 지도부가 주도하는 경선을 포기하겠음을 밝힌다. 그리고 23일 다시 참여하겠다고 한다(…) 츤데레?!
그러나 이 깽판의 효과는 별로였다. 되려 이미지만 버렸다. 이후 정동영이 두 지역의 승리를 발판삼아 지지율을 올리면서 두 후보간 처음으로 역전이 나왔다. 친노진영 이해찬 후보는 한명숙, 유시민이 잇달아 이해찬 지지를 밝히며 조금씩 지지율을 높였으나 두 후보의 지지율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이후에도 정동영은 동원선거로 비판을 받았다. 실제 일부 지역에서 대리인들에 의해 서류가 접수되어 선거인단에 포함된 경우가 드러났으나, 당에서는 의혹을 입증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와중에 정동영은 호남을 아주 씹어먹어버린다. 전체 유효투표 26만 8천여 표 중 10만 표 이상이 호남에서 나왔는데, 그 중 60% 이상을 가져가며 (전북에서는 80% 이상) 사실상 승기를 굳힌다. 난닝구의 난
이후 손학규와 이해찬 측이 동원선거, 부정선거를 집중 공격하며 어느 정도 정동영의 지지율을 끌어내린다. 또 양강 체제가 확실해지며 이해찬의 표가 일부 손학규로 넘어왔고, 모바일 투표 때 대국민 인기가 있던 손학규가 다시금 부각됐지만 이미 늦었다. 일부 지역과 여론조사에서 앞섰을 뿐, 경선은 정동영의 압승으로 끝난다.
진정한 개판 : 반 이명박 후보 난립
별로 궁금해하지는 않겠지만 흔히 도로민주당(…)이라 부르는 민주당에서는 이인제가 김민석을 누르고 대선후보로 결정된다. 희대의 철새대결에서 승리한 이인제는 “범개혁 진영의 후보단일화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라고 외쳤으나, 웬지 당연히 지키지 않는다.
문국현이라는 언더독도 등장했다. 특히 2002년 노무현을 적극적으로 밀었던 오마이뉴스는 노비어천가에 이어 문비어천가를 불렀다. 하지만 문국현의 지지율은 의외로 지지부진한다. 10월 들어 대통합민주신당의 김영춘 의원이 탈당하고, 창조한국당이 창당하며 지지율 5% 대에 안착하며 한 때 10%에 가까운 지지율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 반전의 계기를 보이지 못한다.
어차피 단일화해봐야 이기기 힘들어 보였는지, 정책 지향점이 민주당과 명확하게 달랐는지 그는 “범여권 단일화에 관심이 없다.”며 일찌감치 독자노선을 강조한다. 하지만 20%까지 오를 것이라는 지지율은 지지부진했고, 이에 따라 50명 정도의 의원이 들어올 것이라는 장담도 무너졌다. 마지막까지 낮은 인지도를 커버할 그 어떤 묘책도 내놓지 못한채 그는 단일화 카드를 버리고 독자 출마하게 된다.
이 와중에 또 화제의 인물이 등장한다. 두 번의 대선에서 뭔가 불쌍하게 물먹은 이회창이었다. 이회창의 등장은 그 유명한 BBK와 관련이 있다. BBK 주가조작 사건 이후 위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 이명박의 지지율은 급락한다. 그래봐야 2배 차이 넘음. ㅇㅇ 이 때 ‘대쪽’의 이미지를 가진 이회창을 ‘진짜 보수’로 사람들은 판단했다. 또 뭔가 자기 이익 잘 챙기는(…) 충청권 결집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워낙에 노무현과 민주당 계열사 이미지가 개판인데다가, 경선까지도 깽판이 심각했던지라 사람들의 마음은 빠르게 이회창으로 돌아선다. 어찌된 게 이름이 나오자마자 지지율 2위를 찍는 충공깽스러운 모습을 연출한다. 똥줄탄 이명박은 이회창을 찾아가겠다고 하지만 이회창은 진정성 없다는 의지^^의 드립을 치며, 결국 한나라당을 탈당,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다.
하지만 여전히 지지율은 2배 정도의 큰 격차를 보였고, 이회창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박근혜였다. 오오… 선거의 여왕… 하지만 만나자는 이회창에게 박근혜는 “필요 없어!”라는 김성모의 명대사를 시전하며 이회창의 짝사랑을 거부한다. 삼각관계 이후 ‘정통 보수’ 이미지는 박근혜에게 넘어가며 이회창은 지지율 추락. 결국 온갖 군소 후보들만 난립하며 모든 분위기가 어찌 이명박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무시무시한 결론으로 넘어간다.
선거의 결론 : 이명박의 압승
실제 선거 결과는 여론 조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막판에 사표심리와 반이명박 구호에 의해 정동영의 지지율이 꽤 높았졌을 뿐이다. 그래봐야 더블스코어에 가까운 참패였다. 선거 전날 나경원이 “주어가 없음. ㅋㅋㅋ.”라고 한 이명박이 스스로 BBK를 만들었다고 하는 영상까지 공개됐지만 이미 국민들은 검증 자체에 염증을 느끼고 있을 때였고,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명박은 당선 직후부터 빠르게 인수위를 발족시키고 파격적으로 편파적인(…) 자기 사람을 쓰면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한다. 이때만 해도 당내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된 박근혜의 부활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박근혜는 마지막 순간까지 탈당하지 않으며 ‘진짜 보수’이미지를 굳힘은 물론, 경선 때 죽도록 치고 받다가도, 대선에서는 이명박에 대한 네거티브를 자제하며 이명박과는 전혀 다른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공고히한다.
그리고 이는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을 낳는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반면 민주당은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며 리더십이 전혀 없다는 인상을 남겼고, 나머지 후보들은 모두가 알고 있듯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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