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환란大患亂
1997년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혼돈의 한 해였다. 정부의 노동법 개정과 그에 반대하는 양대노총의 총파업으로 시작된 1월은, 당시 재계순위 14위였던 한보그룹의 계열사 한보철강의 부도 소식과 관련된 부실대출 논란, 정계의 뇌물 논란까지 불거지며 격랑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특히 한보 부실대출 논란과 관련,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씨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격랑은 더욱 거세어졌다.
2월 12일에는 주체사상을 체계화한 ‘창시자’로 불리는 황장엽이 망명을 요청. 뒤이어 82년 망명했던 이한영 씨(김정일 전처 성혜림의 조카)가 분당에서 피격당하며 정국은 다시 북풍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황장엽을 비롯한 북한 고위공직자의 망명 논의가 계속되는 가운데, 2월 19일에는 덩샤오핑이 사망. 3월 들어서는 삼미가 부도, 4월 들어서는 진로가 부도, 6월 들어서는 한신이 부도, 7월 들어서는 기아가 사실상 부도 사태를 맞는 등 재계도 격랑.
이런 격랑 속에서도 여전히 여권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동아-한길리서치연구소가 3월 22일~25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여당서 박찬종이 출마할 경우 49.2% : 31.7%로 김대중에 승리, 이회창이 출마할 경우 47.5% : 30.5%로 역시 김대중에 승리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5월 6일에는 92년 대선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김영삼 후보에게 수백억 규모의 자금을 지원했다는 의혹이 검찰 고위공직자로부터 흘러나오고, 5월 8일에는 김현철 씨의 차명계좌가 발견된 한편, 14일에는 ‘보트피플’ 14명이 북한에서 귀순하는 등 또다시 정국이 요동. 김현철 씨의 이권 개입 혐의는 점차 그 베일을 벗어갔고, 5월 17일 결국 알선수재 및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되었다.
DJ vs. 구룡九龍 난립亂立
이렇게 혼잡한 사회상황만큼이나 97년 대선은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였다.
5월 20일, 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는 일찌감치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을 대선 후보로 확정. 한편 비슷한 시기 여당인 신한국당도 경선 주자 등록 요건 등을 확정하면서 경선 레이스에 돌입한다.
신한국당에서는 이홍구, 이회창, 박찬종, 이수성, 최형우, 김덕룡, 이인제, 김윤환, 이한동 등 무려 9명의 대선 주자가 난립하며 ‘9룡’이라 칭해지기도. 여기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측근 최형우는 갑작스런 중풍으로 중도 하차하고, 김윤환은 이회창을 지지하며 하차, 이홍구는 정치 불신을 드러내며 하차. 여기에 박찬종도 경선을 포기하며, 실제 경선은 여기에 최병렬이 합류한 6명으로 진행되었다.
7월 21일, 드디어 진행된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이인제, 이한동 등을 꺾고 신한국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이로써 신한국당 이회창, 국민회의 김대중, 자민련 김종필의 3자 구도로 대선 레이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 갤럽의 지지율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회창 후보가 37.9%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김대중 후보가 25.5%로 2위, 그리고 김종필 후보가 6.4%라는 한 자리수 지지율을 기록했다.
한편 신한국당 경선을 며칠 앞둔 7월 15일, 기아가 부도유예협약 적용대상으로 지정되며 재계에 파란이 일어나고, 16일에는 DMZ에서 대한민국과 북한 간 교전이 벌어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대선 후보 경선이 이뤄지는 동안에도 정국은 여전히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랑 속에 있었다.
가장 치명적인 독, 병풍
정치의 혼돈은 경제, 사회의 혼돈만큼이나 강력했다. 우선 각종 비리 폭로전이 난무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것은 8월을 불태웠던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의 병역문제에 대한 의혹 제기였다. 이른바 ‘병풍’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당시 국민회의 대변인이었던 정동영 씨가 제기한 ‘병역 7대 의혹’에 어느 것 하나 시원한 해명을 하지 못했고 이는 꾸준한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더 큰 문제는 신한국당 내의 내홍이었다. 당내 주류였던 이회창 후보가 ‘병풍’을 대처하는 과정에서 일부 당내 비주류 세력들은 진지하게 대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듯한’ 분위기를 보여 갈등을 조장했다. 또한 경선에서 경쟁했던 이한동 씨의 최측근 김일주 씨는 자민련 간판을 달고 안양 만안 보궐선거에 출마함으로써 이회창 후보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것은 물론 당내 불협화음에 불씨를 지폈다.
조순 대선에 서다 / 피닉제 발진
대한항공 비행기가 괌에 추락하며 2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사건(8월 6일 KAL기 추락사건)으로 전 국토가 충격에 휩싸여있던 8월 11일. 서울시장 조순이 대통령 출마를 공식 선언한다. 조순의 지지율이 의외로 높게 나오자 일찌감치 대선 후보를 확정지었던 여야는 대책 마련에 분주하게 움직였다.
19일에는 북한 경수로가 착공되며 남북 관계의 한 지평을 열었지만, 한편으로는 환율이 급등하기 시작. 여기에 9월 3일 베트남기가 추락하며 한국인 승객 2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또다시 일어나는 등, 대한민국의 분위기는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 9월 13일, 신한국당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가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 대선 구도가 더욱 복잡해진 가운데, 한국은 추석 명절을 맞았다. 그리고 추석 후 발표된 첫 여론조사 결과는 김대중 – 이인제 – 이회창 순. 여당에는 그야말로 ‘비상’이 걸렸다. 집안 단속에 실패한 신한국당은 이로써 당내 주류, 비주류가 분열하며 지지율이 분산됐다.
폭로전
대선이 두달여 앞으로 다가온 10월 초, 여당 신한국당과 야당 새정치국민회의 간의 폭로전이 시작되었다. 신한국당이 주장한 ‘김대중 비자금’설에 대응하여, 국민회의는 ‘완전한 날조’라는 입장과 함께 ‘이회창 경선자금’설로 대응하는 등 정국이 매우 혼탁해졌고, 16일 신한국당은 이윽고 김대중을 고발키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비자금 정국’의 시작이었다. 한편 같은 달 13일에는 김현철에 대해 1심에서 실형 3년이 선고.
비자금 정국은 오래가지 못한다. 10월 15일 쌍방울이 부도사태에 휘말리며 재계와 주식시장, 외환시장까지 유례 없는 위기를 맞고 있었고, 신용공황 얘기가 주류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17일에는 북한군 12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주민 2명을 납치하는 사태까지 발생. 비자금 정국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고, 이윽고 신한국당에서는 후보 교체 얘기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비자금 정국을 둘러싸고 검찰이 수사를 대선 이후로 미루겠다고 발표하며, 신한국당 내의 내분은 더욱 심각해졌다.
DJP 연합 vs. 이회창-조순 합체
김대중과 이회창 후보는 각각 김종필, 조순 후보를 포섭해 단일화에 성공했다.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와 자민련 김종필 후보의 단일화 얘기는 대선 정국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던 떡밥이었다. 결국 10월 26일 사실상 단일화 협상을 마무리하며 DJP 연합이 성립. 내각제 및 양원제 등을 골자로 한 협상이었으나, 이를 ‘권력 나눠먹기’로 비판하는 여론 또한 높았다.
반면 당내 내홍으로 사분오열한 조직정비에 고심했던 이회창 후보는 ‘혁신’의 민주당 조순 후보를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부정적 이미지를 탈피함과 동시에 지지율 반등이라는 성과를 거두고자 했다. 협상 끝에 11월 13일, 두 당 통합 및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며 이쪽도 후보단일화. 이런 전략 덕분인지 대선을 40여일 앞두고는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20% 중후반대로 올라서며 김대중 후보와의 한 자릿수 접전을 벌인다. 그는 DJP연합 반대, 3김 청산 등의 개혁적 구호를 앞세우며 상대를 압박했다.
엔드 오브 외환게리온
11월 1일에는 해태가 부도, 4일에는 뉴코아가 부도. 11월 들어서며 주가는 폭락하고 환율은 폭등하기 시작했고, 외환거래가 중단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IMF 총재가 방한해 구제금융을 논의하는 단계까지 사태가 악화일로를 겪는 가운데, 결국 21일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 국가 부도 사태, IMF 사태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같은 날에는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한 한나라당이 출범하지만 IMF 사태의 충격이 너무 커서 신문 1면 구석에 조그맣게 묻힌다(…)
한편 20일에는 국가안전기획부가 서울대 고영복 명예교수를 간첩혐의로 구속해 검찰에 송치하는 일도 발생, 북풍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26일 대선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가운데, 대선은 2강 1중의 3자구도가 심화. TV 토론에서는 3자가 다같이 김영삼 대통령의 경제 실정을 비판하는 풍경이 연출되었다. 금융시장은 공황 상태에 놓였고, 12월 6일에는 고려증권이 부도, 6일에는 한라그룹이 부도. ‘나라가 망했다’는 탄식 속에서 12월 18일 대선일이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선거 전 마지막 공표 여론조사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33.1%로 선두를 차지한 가운데 이회창 후보가 28.9%로 바짝 따라붙으며 막판 역전의 가능성을 남겨뒀다. 반면 출마 당시 30%에 육박하는 지지율로 대선의 꿈을 키웠던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대선 40여 일 전부터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을 버린 독단적인 행동과 이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 이회창 후보 등의 견제가 유효한 것이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 또한 이회창 후보를 지원하겠다는 뜻을 유지하면서 지금의 피닉제, 이인제 후보의 바람은 사그라들었다.
대환란 속에서의 난전, 그리고…
대선을 하루 앞두고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 31.2%, 김대중 후보 33.3%, 이인제 후보 18.5%로 김대중-이회창 두 후보 간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실제 선거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 후보가 40.3%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회창 후보는 38.7% 득표하며 1.6%P차로 패했다. 신한국당 비주류로 출마한 이인제 후보는 19.2%를 득표했는데 이는 집안 단속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하겠다.
당시 가장 큰 이슈는 단연 외환위기로 인한 한국경제 파탄이었다. 굴지의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며 ‘회사에 다니는 것만으로 감사’, ‘대학가 최고의 취업난’ 등의 제목이 신문을 장식했다. 흉흉한 소식들도 이어졌다. 특히 비행기가 번번이 추락하며 국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대한항공 비행기가 괌에 추락하며 다수의 사상자를 냈고(8월 6일) 베트남 비행기 추락으로 또 다시 한국인 피해자가 발생했다. 그런 와중에 사람들은 메이저리그에서 최고 성적을 거둔 박찬호를 통해 삶의 희망을 찾고자 했고 청소년들은 ‘응답하라 1997’에서 봤던 것처럼 대중문화와 사랑에 열광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