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요금제 문제로 전화 상담을 받고 난 뒤 전화를 끊으면서 내가 말했다. “너무 친절하다. 우리나라 전화상담사들은 왜 이리 친절해?” 그러자 옆에서 듣던 동료가 “선생님, 친절하면 좋지 뭐?”라고 한다.
그래, 친절 그 자체가 문제 될 게 뭐 있나. 문제는 그 이면에 있는 무엇이다. 진리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눈 앞의 현실 뒤에 있는 무엇을 읽으려 애써야 한다.
스튜어디스는 무엇을 하는 직업인가
다른 나라 서비스 노동자들은 이렇게 친절하지 않다. 이를테면, 대한항공과 유럽항공 승무원들을 비교해보자. 지난겨울에 북유럽 여행할 때 느꼈다. 세 번의 비행기를 탔는데, 각각 대한항공과 체코항공 그리고 핀란드항공이다. 그런데 유럽 항공사 승무원들은 우리와 많이 달랐다. 여리여리한 우리 승무원들과 달리 그들은 남녀 공히 몸집도 크고 씩씩한 기운이 풍겨왔다.
우리 사회에서 시쳇말로 잘 빠지고 예쁜 아가씨의 롤모델로 상징되다시피 하는 스튜어디스가 서양에서는 뚱뚱한 아줌마들의 몫이니 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남자 승무원들도 하나같이 우람한 체형을 자랑하며 마르고 잘생긴 한국 승무원들과 비교됐다. 외모에서 풍겨오는 승무원들의 분위기가 이러하니 기내에서 공공질서를 어기거나 하는 반사회적 행동이나 크고 작은 일탈행위는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나도 이어폰을 노트북에 잘못 연결해 소리가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모르고 영화를 보다가 몸집 있는 여승무원으로부터 거친 제재를 받는 경험을 했다. 순간, 한국사회에서 길들여진 ‘고객은 왕’이라는 천민자본주의 습성에서 ‘이 사람들, 왜 이리 불친절해?’라는 반발심이 일었으나 이내 생각을 고쳤다.
고도의 안전성과 기강이 요구되는 항공문화의 특성상, 고객은 왕의 지위를 포기하고 승무원에게 절대복종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유익하다. 그리고 승무원은 모델같이 잘 빠진 사람보다는 헬스클럽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신체건장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공익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것이다. 너무 친절하고 야들야들한 사회는 모두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너무 친절한 사회가 뭐가 문제인지 좀 더 나아가 보자.
한국사회,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해졌나?
한국사회가 과연 친절한 사회인가? 옛날엔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느 시기에 국민성의 총체적인 개조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이 사회는 결코 친절과는 거리가 멀다. 그 단적인 예로, 아파트 층간소음문제로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보라.
친절과 거리 먼 한국인의 배타성은 자동차 문화에서도 쉽게 엿볼 수 있다. 사람은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자기 차는 귀하게 여겨 운전하다가 상대방이 차 범퍼 조금 받은 걸로 멱살 쥐고 싸우는 작태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곳이 한국사회다. 적어도 ‘친절’이라는 덕목 면에서 이 사회는 예전보다 더 각박하고 메마른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 첫머리에서 내가 말한 ‘너무 친절한 행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과도한 친절이 이 사회의 일각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점이다. 더구나 그것이 인간 영혼에서 우러난 친절이 아니라 비인간적인 기제에 의해 강제된 왜곡의 산물이라는 것이 문제다.
“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 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식당 일은 퇴근이 늦고, 그래서 텔레마케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전화란 게,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욕설은 기본이고 일방적으로 화풀이를 하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심호흡을 하면서 전화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돈 대 돈’으로 만난다. 맑스 혹은 루카치의 용어를 빌리면, 인간관계가 ‘사물화(reification)’의 기제로 얽혀 있는 것이다. 심지어 가장 따뜻한 원초적 관계라 할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그러하다.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전과 물려주고 나서 그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라.
너무 친절한 전화상담사의 태도가 자발성에 기초한 것이라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공사판의 인부가 육체노동을 팔듯이 그는 자신의 감정노동을 판 것이다. 자본가는 그의 감정을 헐값에 사서 소비자에게 내던지고선 더 큰 이윤을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 이 천민자본주의 서비스업계가 돌아가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옛날엔 사회 일각에서조차 사람들이 이렇게 친절하지 않았고, ‘감정노동’이란 개념조차 없었다.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 이런 게 생겨난 것이다. 즉, 이 과잉친절은 한국사회 특유의 ‘독점자본주의’가 빚은 기형적인 문화 산물인 것이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자기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들면서까지 감정을 파는 것은 자존심 강한 한국인의 속성상 낯설기만 한 문화다.
쉬운 예로, 구멍가게에서 과자를 파는 사람에게서 위의 텔레마케터에서 볼 수 있는 과잉친절을 엿볼 수 있는가? 즉, ‘과도한 친절’을 근간으로 하는 감정노동은 자영업이 아닌 대기업의 말단 노동자의 몫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친절한 한국사회를 표방하는 창백한 허상인 ‘과잉친절’은 독점자본가가 약하디 약한 하급노동자를 쥐어짜면서 생겨난 왜곡의 산물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면, 우리는 감정노동자의 너무 친절한 서비스정신에 우쭐함보다는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과잉무례 부르는 과잉친절 속에 망가져 가는 사회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시절, 친구랑 친구의 친구 몇몇이서 주점에서 술 마신 적이 있다. 그런데 일행 중 한 명이 남자종업원에게 굉장히 거칠게 대해 모두가 불편해 했다. 술에 취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행동은 상식을 넘는 과도한 수준이었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그의 직업은 룸살롱 웨이터였다.
그러니까 자신이 종업원으로서 당한 짓거리를 고객이 되어 다른 종업원에게 그대로 앙갚음 하는 꼴이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일명 호스테스라 일컫는 룸살롱의 여종업원들이, 남자종업원이 여자 고객에게 술시중을 드는 속칭 호스트바라는 곳에서 호스트들에게 술주정을 심하게 부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비싼 양주를 시키고선 호스트들에게 팁도 후하게 뿌려가며 그런 과잉행동을 일삼는 기형적인 심리기제를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룸살롱만큼 천민자본주의 한국사회의 추한 진면목을 정확하게 표상하고 있는 공간도 없으리라. 이곳에서 모든 인간관계는 철저히 사물화 되어 맺어진다. 이곳에선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 그대로 이곳에선 ‘사회적 천민계급’이 하룻밤동안은 ‘황제’ 노릇을 할 수 있다.
세계 최고의 일일노동시간을 자랑하는 위대한 대한민국의 산업역군들은 치열한 생존경쟁사회의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고객은 왕’이라는 역할놀이를 통해 풀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알코올에 절어 음지에서 벌어지는 이 역할놀이가 건전한 모습으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
양주와 고급안주가 여러 차례 공급되고 풍악 소리가 커져가면서 고객이 호스테스라는 이름의 감정노동자를 향해 저지르는 비인간적 추태 또한 극에 다다른다. 이게 천민자본주의 한국사회의 풍속도이고 고성장을 자랑하는 한국경제와 조응하는 살인적인 경쟁사회의 일상이 돌아가는 원리다.
억압적인 사회일수록 ‘음주가무’를 권장하는 법이거늘, 거리마다 골목마다 술집과 노래방이 이렇게 많은 사회는 아마 지구상에 이곳 말고는 없을 것이다. 이 이상한 사회에서는 술 취한 사람에 대해 매우 관대하다. 술자리에서 어떠한 실수를 저지르든 다음 날 회사에서 일만 잘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묻지마 사회’다.
사람이 사람을 짓밟으면서 쾌감을 느끼는 심리적 기제를 ‘사디즘’이라 한다. 그런데 이 사디즘은 그 대립물인 마조히즘과 짝을 이룬다. 즉,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역사상 최악의 사디스트라 할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사는 이런저런 콤플렉스와 마조히즘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에릭 프롬은 논하였다.(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과도하게 비싼 술값에 대한 댓가로 연약한 여성감정노동자를 성적으로나 인간적으로 학대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디스트적 특권을 판매하는 룸살롱이라는 상품이 유통되는 자체로 이 한국사회는 정신병적인 사회임을 방증한다. 이 집단 정신병은 학창시절 과도한 학습노동에 이어 직업전선에서 받는 과도한 스트레스에서 기인할 것이라는 게 나의 관점이다.
마조히즘이 사디즘과 짝을 이루는 것과 같은 이치로, 과잉친절은 과잉무례와 짝을 이룬다.
전화 대화 속의 남성과 여성은 그리 특별한 등장인물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두 남녀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시민일 지도 모른다. 고백컨대, 욕설만 안 썼을 뿐 글쓴이 또한 저 남성과 유사한 ‘과잉무례’를 범한 적이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기본적으로 나의 못난 품성 탓이겠으나 ‘고객은 왕’이라는 천박한 시장경제사회가 유포한 사디스트적 경제논리에 길들여진 결과라 생각한다. 사람 귀하게 여길 줄 모르고 돈을 신처럼 숭배하는 ‘영혼 없는 사회’에서 과잉친절과 짝을 이루는 과잉무례를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망가져만 간다.
노동자의 죽음 부르는 과잉친절
과잉친절이 과잉무례를 부르는 전형적인 상황은 ‘해피콜’이라는 고객만족설문조사에서 빚어진다. 고객이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전화상담사나 AS기사의 고객의 밥줄과 수령액이 왔다갔다 한다. 서비스의 질에 대한 고객의 판단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감정노동자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더라도 깐깐한 고객을 만나면 불리한 평점을 받게 되며 그 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의 행불행이 고객의 기분에 좌지우지 되는 점이다. 요컨대, 이 관계는 절대권력자와 힘없는 임금노예의 관계에 다름 아니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인간성을 황폐화시키는 법이다. 과잉무례를 즐기는 나쁜 고객이 이 절대권력 관계를 악용해 이를테면 수리비를 깎자는 요구를 해오면 노동자는 해피콜을 해피하게 받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수락한다.
그리고 그 손실은 고스란히 노동자의 몫으로 돌려진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이 집 저 집을 돌며 죽도록 AS를 해도 월말에 손에 쥐는 것은 푼돈 밖에 없는 현실이 삼성과 LG 전자 하청서비스업체 노동자의 운명이다. 2013년 11월, 삼성전자서비스 하청업체 수리기사 최종범씨는 카톡 대화방에 “그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라는 글을 남기고 이튿날 자기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에어컨 실외기 중수리기사였던 그는 “죽어라고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난 돈이 없냐”고 고백할 만큼 생활고에 시달렸다. 기본급도 없이 수리 건 당 발생하는 비용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그를 더 궁지로 몬 것은 고객들의 ‘평가’였다. ‘매우 만족’이라는 최고점을 받아야만 하는 업무 체계는 그를 짓눌렀다. 사장은 고객 불만이 뜨면 종범씨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도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라고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 2014.7.19. KBS <추적 60분>
어떠한 노동자도 자기 노동에 대해서는 전문가다. 노동은 산업사회가 돌아가는 근본 동력이다. 노동자의 노동 없이 이 사회는 하루도 지탱해 갈 수 없다. 이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에게 그 전문성에 입각한 소신을 펼칠 수 있도록 자기조절권을 부여해야 한다. 쉽게 말해 노동자에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을 지키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이루어져야 한다.
친절함은 친절답게, 인간은 인간답게
지난겨울 덴마크에서 전세버스 기사가 자기노동시간을 조절하는 모습을 봤다. 고객이 기사의 시간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기사가 고객의 여행시간을 규제하는 것이다. 이 선진된 사회에서는 버스기사가 3시간 이상 운전하면 무조건 휴게소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도록 법적으로 의무화되어 있다.
그 덕분에 우리 일행은 호텔에서 먹기로 한 저녁식사를 포기하고 휴게소에서 맛없는 햄버그로 떼워야만 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운전노동자의 자기조절 권리가 결국 고객의 안전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불만을 품을 이유가 없어진다. 한국사회에서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는 대형사고의 이면엔 예외 없이 가혹한 노동조건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생각해보라. 최근 19명의 사상자를 낸 송파 버스사고의 원인이 운전사의 졸음운전이었는데. 이 기사는 무려 18시간 동안이나 연속으로 운전을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스웨덴에서는 대학교의 청소부가 자기노동에 폐를 끼쳤다는 이유로 원로교수를 윽박지르는 사례가 전해진다(황선준, 스웨덴 엄마와 한국 아빠의 특별한 교육이야기). 비오는 날 복도를 닦고 있는데, 밖에서 신발을 똑바로 털지 않고 빗물을 묻혀 복도를 더럽힌다고 늙은 여자청소부가 원로교수를 향해, “XX, 지금 청소하는 게 안 보이냐?”라고 욕설을 곁들여 강한 불만을 표출하자, 원로교수는 황급히 멈춰 서서 뒷걸음질 치며 아주머니에게 사과를 하고선 연구실로 꽁무니를 내빼더라는 것.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 한국 대학사회에서 청소부들은 교수와 엘리베이터도 같이 못 타게 하며 심지어 더럽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도 못하게 한다. 과도하게 친절한 사회가 하층 노동자을 과도하게 천대하는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여 158년동안 5대에 걸쳐 기업경영을 통해 이룬 대부분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여 스웨덴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발렌베리 가, 삼성의 이씨 가문이 이 품위있는 기업을 본받으려 한다고 하니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발렌베리든 이씨가문이든 재벌의 부의 원천은 노동에서 연유함은 말할 것도 없다.
양 가문의 차이는 전자가 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반면, 후자는 정반대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노동생산성 제고라는 미명하에 ‘해피콜’ 따위로 과잉친절과 과잉무례를 야기하는 과정에서, 삼성전자서비스 하청업체에서는 최씨 이후 지금까지 자살자가 속출하고 있다. 고객은 왕으로 섬기고 노동자는 짓밟는 악덕기업이 기치로 내거는 과잉서비스정신이 힘없는 노동자의 죽음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친절 그 자체를 문제시 삼을 이유는 없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서로 친절을 베푸는 것은 값진 미덕이다. 그러나 이 천박한 한국자본주의사회에서 고객과 감정노동자의 관계에서 친절은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며 인간적 배려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의해 강제되는 것이 문제다.
친절이 사회 전반에 국민성 혹은 문화로 녹아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거래 행위 속에서 매매 됨에 따라 과잉친절을 매개로 양측의 인간성이 파괴되어 가는 것이다. 친절하지 않아도 좋으니, 고객이 왕이 아니어도 좋으니, 하층 노동자가 인간답게 대접받는 사회를 소망하면서 지루한 글을 맺는다.
원문 : 필인의 꼼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