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는 게임을 무심하게 쳐다보지만, 김기덕은 번번이 자기가 그 게임 안에 들어가 앉아 있는 사람이다. (중략) 홍상수는 술래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김기덕은 자기가 술래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해진다.”
– 정성일, <필사의 탐독> 中
“포스트모던화는 큰 이야기의 쇠퇴를 의미한다. 큰 이야기의 쇠퇴는 사람들의 현실인식이 다양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中
일본의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가 미연시게임, 라이트노벨, 망가 등을 대상으로 정립한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이 있다. 거칠게 이 개념의 구조상의 특징을 설명해보자면, ‘게임적 리얼리즘’ 이전 시기의 작품들이 단 한 번의 죽음을 그리는 것에 비해 이 범주에 속한 작품들은 죽음을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반복되는 유사한 상황마다 각 플레이어(캐릭터)들이 전략을 달리 함으로써 결과가 달라지는 구조를 따르고 있다.
게임의 구조와 성질을 영화에 고스란히 적용시킨 톰 티크베어의 <롤라 런> 이후 <나비 효과>나 <소스 코드>, 그리고 <써커 펀치> 같은 일련의 헐리우드 영화들이 게임의 특성을 스토리텔링의 영역 안에 노골적으로 개입시킨다면, 홍상수의 후기 영화 속에서는 게임의 특성이 미학적 범주 안에 은밀하게 내장되어 있다(많은 이들이 이러한 홍상수 영화 속 게임적 구조를 ‘차이와 반복’이라는 들뢰즈의 언어를 빌려 설명한 바 있다).
여타 게임적 성질을 적용시킨 (주로 헐리우드) 영화들이 캐릭터들이 활동하는 영화의 영토를 아예 스테이지화 혹은 게임화 시킴으로써 형식의 부담감을 줄이고자 했던 반면, 홍상수의 영화 속 영토는 온전히 현실의 논리를 따르는 배경 안에서 게임적 성질을 침범시키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즉, 뭔가 현실감 있는 세계관 안에 가상현실적인 상황을 작동시키는 것이 홍상수 후기작이 견지하고 있는 게임적 설정의 핵심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줄거리 요약이 무의미한 까닭은 그의 영화가 탈서사적인 스토리텔링을 진행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진행 방식이 게임에서 빌려온 성질이 난입하는 구조로 작동되기 때문일 것이다(우리는 게임의 시나리오가 재밌어서, 혹은 결말을 보고자 게임을 하려는 게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런 것들은 부가적인 요소일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게임적 리얼리즘’을 설명하며 데이터베이스 중심의 상상력의 융성을 지적하고 있다. 데이터베이스 중심의 상상력이란 요약하자면 캐릭터의 특성과 관계들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서사적 상상력을 구축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홍상수 영화 속 구조의 작동 원리에 대한 적절한 지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북촌 방향. Stage 북촌,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두고 볼 거예요. 정말, 당신이 어떻게 변하는지 쭉 쳐다보고 있을 거예요.”
– <북촌방향> 속 보람(송선미)이 성준(유준상)에게 하는 말
<해변의 여인>의 중래는 자신이 구상하던 영화의 이야기를 통해 우연히 세 번 연달아 듣게된 음악 사이의 비밀을 풀면 우주의 논리를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옥희의 영화>의 진구는 벤치에 놓인 우유팩을 보고 “지금 이 시간에 왜 이 우유곽이 존재하는지 알 수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반면 <북촌방향>의 성준은 “기막히고 신기한 우연들을 조화롭게 즐기면 된다.”고 말한다. 이전의 영화들 속 주인공들이 우연의 법칙을 통해 느슨하게 연결된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다면, 성준은 우연을 그 자체로 즐기려 하는 태도를 지닌다.
<북촌방향>은 한 인물이 같은 장소를 세 번 간다’는 설정만 주어진 채 촬영을 시작했다는 프로덕션 과정에서 나타나듯. 더없이 우연적인 리듬에 몸을 맡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 속의 북촌이라는 장소는 지나칠 정도로 영화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구체적으로 축조된 우주라는 인상이 든다). 또 다른 논리가 작동하는 데이터베이스화된 평행우주를 보는 기분이랄까.
말하자면 이 영화의 북촌은 그 자체로 (이동진 평론가가 지적한) 우로보로스의 도식의 형태를 체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극장전> 이후 영화 안에서 더없이 여유로워 보이던 홍상수가 도식적이고 인위적인 구조를 끌어안은 것일까?
일그러진 시간과 관계
이 영화에서 알 수 없는 것은 시간과 관계이다. 많은 이들의 지적대로 영화는 대구에서 북촌으로 올라온 성준의 숙소를 한 번도 보여주지 않고 직선적인 시간의 축을 무너뜨림으로써 미로처럼 떠돌게 만든다. 영화가 선택한 흑백의 화면 또한 낮과 밤의 경계와 시간의 경과를 모호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의 시간은 삼일 혹은 사일 동안 진행된 기록의 결과물일 수도 있고 단 하루 동안의 기록으로도 볼 수 있다. 성준은 미로처럼 세팅되어 있는 북촌이라는 맵을 떠도는 플레이어다. 중요한 건, 시간과 행위는 반복된 상황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는데도 관객이 보는 관계와 스토리의 진행은 보다 복합적으로 단단하게 (재)구축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한 인물이 같은 장소를 세 번 간다’는 설정에서 관객은 그 인물이 같은 장소를 매번 처음 간 것인지, 연속적으로 간 것인지 알지 못한다. 간단한 예로, 항상 손님보다 늦게 오는 술집 주인 경진을 향한 보람의 꾸지람이 차례를 거듭할수록 점점 거칠어지는 뉘앙스에서 이야기의 감정의 층위가 점점 두터워진다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
또한 단순히 감정의 층위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인물이 하나의 옷차림을 내내 입고 있고, 성준은 “오늘 소설이라는 술집을 갔다.”는 내레이션을 세 번 반복하며, 관객이 어제의 일로 짐작한 생선구이 냄새를 지금의 영호가 맡아내고 있다는 점을 보라. 정반대의 동선을 통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대치를 이루며 반복되는 연극배우와의 두 번의 만나는 것을 통해, 이 모든 직선적 시간의 뒤틀림을 통해 관객은 북촌이라는 스테이지를 일종의 세계 뒤편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상징적 장소로 인식한다.
홍상수는 인터뷰를 통해 이는 “감정이나 정보가 축적되어가는 축이 있고, 매일이 첫 날처럼 보이는 축이 있다.”고 깔끔하게 정리했다. 앞서 말한 도식을 이 문장에 적용시켜 보자면 인물들이 활동하는 북촌이라는 장소의 구조적 도식은 후자의 축을 제시하며, 그 장소 안에서 무수히 교차되고 중첩되는 인물들의 (감정선과 동선을 모두 포함한)선들은 전자의 축에 해당된다.
얼핏 <북촌방향>의 핵심은 후자의 축인 것 같으나, 영화가 가장 신비로워지는 대목은 전자의 축이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이다.
서버 사이를 넘나드는 우연의 침투
즉, <북촌방향>이 진정 영화적 에너지를 뿜어내는 순간은 정성껏 축조된 북촌의 구조와 형식을 탐구할 때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정돈되고 구축되어 있는 구조와 형식을 우연의 선들이 은밀하게 침범해버리는 대목에서이다. 예컨대 이런 장면. 새벽에 술집에서 나온 일행들이(포스터에 나오는 영화 속 등장인물이 한 프레임 안에 담겨지는 유일한 장면이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거리로 나와 술에 취한 채 택시를 잡는다. 누군가는 담배를 피며 차도로 뛰어 나가고 누군가는 그를 따라가며 누군가는 때마침 온 택시에 몸을 싣는다.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는 몸짓들과 뛰쳐나가는 충동적 활동과 뿜어내는 담배 연기, 그리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의 운동들은 북촌이라는 데이터베이스화된 장소가 차마 제어하지 못하는 우연적 리듬의 산물이다. <북촌방향>이 방점을 두는 것은 정교한 게임적 세계관 그 자체의 매혹이 아니라 게임적 세계관 안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충돌들이 블랙홀처럼 도래하여 정교한 세계관의 논리를 빨아들이는 순간의 매혹이다. 말하자면 이와 같은 장면들은 순간적으로 시간을 멈춰 세운다는 착시 효과를 통해, 시간성이 붕괴된 북촌의 논리에서 빗겨나는 듯한 인상을 제공한다.
늦은 밤, 돌아오는 길에 성준에게 키스를 받은 예전이 마치 과거의 경진처럼 성준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가 목격하는 건 평행선을 달리던 서로 다른 시간과 관계들이 걷잡을 수 없이 우그러져 융합되는 순간이다. 게임적 세계관 안에서 이것은 각각 세이브 된 데이터들의 충돌이며 서버를 넘나들며 출몰하는 플레이어를 만날 때의 당혹스러움이다.
영화는 뜬금없이 등장하는,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민방위 훈련 장면에서 “중원이도 걸렸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영화 속 우주(서버)의 동시적인 뉘앙스를 시간(의 중단)을 체험하는 것과 느슨하게 연결시켜 강조한 바 있다. 예전이 경진처럼 말하는 순간의 쇼크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도식화된 우주의 논리를 붕괴시키는 데서 기인한다.
이 논리의 붕괴는 시간의 역전으로 직결되며(많은 이들의 지적대로 성준이 예전의 가게에 다시 찾아와 늘어놓는 대화와 고덕동 집에서 경진과 성준이 했던 대화는 맥락상 성준과 예전의 대화가 먼저고 성준과 경진의 대화가 이후의 일이다) 시간적 인과의 논리를 거스르는 서버 간의 침투가 발생한다. 이는 곧 “내가 두고 볼 거예요. 정말, 당신이 어떻게 변하는지 쭉 쳐다보고 있을 거예요.”라 말하는 보람과 “그래도 몇 년은 추억할 게 생긴 거네요.”라고 말하는 예전을 앞에 두고도 항상 “다시 만나지 말자”고 현재의 스테이지에 집중하던 성준의 붕괴로 귀결된다.
예전을 남겨두고 떠나는 장면 바로 다음 장면으로 성준이 카메라 쪽으로 걸어오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 뒤를 돌아보는 장면이 붙는다. 이는 단순히 자신의 행동에 미련이 남아서일까. 성준이 한참 동안 뒤를 돌아보는 이 장면에서 영화의 초반부, 성준이 술집 소설에서 처음으로 (경진과 똑같이 생긴) 예전을 보고 술집을 나와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 장면에서 담배를 피우던 성준은 카메라를 곧바로 응시하고는 “똑같다, 똑같애. 어떡하지?”라는 내레이션을 중얼거린다. 즉, 이 영화에서는 성준이 뜬금없이 카메라를 맹렬히 노려보는 장면이 있고 문득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하염없이 돌아보는 장면이 있다. 이 두 장면은 시공간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게끔 편집 되었으나 그때 각각의 성준이 쳐다본 것은 (텅 비어 있는 저 너머가 아닌) 자신의 반대편이다.
두 시선은 같은 시공간에서 성립되지 않았을 뿐, 서로를 과녁 삼아 응시하고 있는 거울쌍이다. 대상을 향해 날아가기는 하지만 목표에 도달하지 않는(혹은 않아야만 했던) 이 시선은 예전/경진의 융합으로 시공간을 침범하며 서로 마주보게 되었다. 이때 성준의 중얼거림(“똑같다, 똑같애. 어떡하지?”)은 곧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자신에게 향하는 말이 된다.
목소리로만 떠돌던 경진의 유령과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예전의 몸이 합쳐질 때, 실질적으로 성준이 보는 것은 두 개의 몸으로 분리된 자기 자신이다. 이는 북촌의 게임적 세계관 안에서의 오류이다. 과거의 목소리(경진)를 떨쳐내고자 현재 눈앞에 있는 예전을 따라갔으나 시간은 계속 반복해서 되돌아가고 과거의 행적들은 누적된 채 일어날 일들을 좌지우지한다.
어쩌면 성준은 세이브 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아마도 이 게임 안에서 성준이 세이브를 기록한 대목은 경진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인 것 같다. 그래서 경진을 만난 이후의 시간으로 밖에 되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이전의 시간에서 성준의 선택들은 이미 수치화되어 시스템 안에 누적되어 있다. 이는 미연시게임 속 여캐릭터와의 첫 만남에서 성급하게도 “널 사랑해, 결혼하자.” 선택지를 눌러버린 이후의 상황이나 다름없다.
영화의 첫 장면과 동일한 갈림길에서 (영화의 시작에서처럼) 건널목을 건너지 않고 아래쪽으로 내려온 성준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우연히 네 사람을 만나는 (건널목 너머의 우주에서 말로 들은 바 있는) 또 다른 에피소드를 진행한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서버의 또 다른 게임에 불과하다. 성준이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사진 찍어주는 팬(고현정)은 일종의 게임 속 서버 관리자다.
이미 게임의 세계관의 오류는 발생했으며 플레이어가 이를 인식하고 있다. 고현정은 성준을 점점 벽에 붙어 서달라는 주문을 하고 사진을 찍는다. 사진의 모델이 되면서 성준은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섬뜩한 표정을 짓는다. 사진기가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 섬뜩한 얼굴의 클로즈업으로 끝나는 이 결말은 북촌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삭막하고 답답하다(교묘할 정도로 인공적인 유준상의 표정이 압권이다).
끝나지 않는 게임 속의 여정
마지막으로 게임적 성질을 빌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장면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동원하여 일종의 데이터 삭제를 시도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 ‘The day he arrived’가 말해주고 있듯이 성준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서버에 발생한 오류를 점검하기 위해 잠시 멈춰 있는 것뿐이다. 앞서 언급한 “게임적 세계관 안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충돌들이 블랙홀처럼 도래하여 정교한 세계관의 논리를 빨아들이는 순간의 매혹”은 곧 성준으로 하여금 이 게임을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매혹으로 직결된다.
경진과 예전 사이에서, 혹은 데이터베이스와 우연 사이에서 성준은 리셋된 채 길을 잃고 다시 (첫 장면의) 건널목과 골목의 갈림길에 도래(arrived)할 것이다. 이 영화는 북촌의 고속도로 이정표를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해서 북촌의 지도를 (성준의 얼굴과 함께) 보여주는 것에서 끝난다.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없다. 이 지표들이 지시하고 있는 방향은 어느 쪽인가. 여전히 성준은 어느 방향으로 갈지 모르며 반복되는 스테이지를 깰 수도 없을 만큼의 피로감이 느껴진다(물론 다음 장면의 성준의 얼굴은 다시 기대에 차 있을 수도 있겠다만).
<북촌방향>은 다소 잔인한 게임이다. 이 게임의 우주 속에는 각종 NPC와 퀘스트와 보상(이 때의 보상이란 이야기상의 맥락에서의 경진/예전과 형식상의 맥락에서의 우연에의 매혹 양 쪽 모두를 의미한다)들이 있지만 그 신기루에 가까운 보상이 플레이어의 길을 잃게 만들며 맵을 미로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바로 그 보상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스테이지를 끝없이 떠돌게 된다.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다른나라에서. Stage 모항. 게임은 정말 끝났는가
정리하자면 <북촌방향>은 데이터베이스화된 도식의 비중이 전면에 내세워져 있지 않았거나 혹은 숨겨져 있는 듯한 뉘앙스를 주는 영화였다. 이러한 전략은 이 영화를 세팅된 구조의 도식과 침범하는 우연의 신비스러움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절충에 성공하게끔 만들었다. <북촌방향>의 신비로운 체험에 대한 각양각색의 가설들이 범람하는 까닭은 그 게임(사유)이 끝까지 종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애인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신물을 보던 보경이 창가로 다가가는 결말에서 관객은 여전히 보경이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른다. 러닝타임 내내 이어지던 관찰로도 보경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예상할 수 없다는 게 핵심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북촌방향>에서 끝까지 관객이 알지 못하는 것은 북촌이라는 세계관의 선택이다.
반면 <다른나라에서>는 노골적으로 도식성을 끌어안고 형식적 탐구에 비중을 싣는다. 이 영화는 홍상수 영화 중에서 (파괴적이었던 <옥희의 영화>는 예외로 두자면) 유일하게 각 챕터의 입구와 출구가 명백한 영화다. 이 영화의 앞뒤로 붙어있는 <북촌방향>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서로 다른 세계(혹은 시간)의 경계를 무너뜨려 모호성을 취한 것에 비해 <다른나라에서>의 형식적 도전에의 강조는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앞서 말한 ‘형식적 도전에의 강조’를 게임적 세계관에의 강조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표면적 효과는 세 도막으로 나뉜 영화의 구성이 원주(정유미)가 쓰는 시나리오라는 것이고(원주는 이 영화에서 개발자인 동시에 베타 플레이를 실행 중인 플레이어다) 그 세 개의 이야기들이 별개의 것이 아닌,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유기적인 형태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의 정유미는 홍상수 영화에서 전에 본 적 없는 냉철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세계관을 구축하는 설립자이다. 세 부분의 시나리오의 각 챕터가 시작되고 끝날 때마다 개입되는 정유미의 목소리는 무엇보다 이 세 가지 이야기가 특정한 창작자에 의한 서사적 논리에 의해 작동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촌방향>에서 신비감이 채운 자리를 <다른나라에서>는 정유미의 목소리, 달리 말하자면 형식미가 채운다.
정유미가 설계한 <다른나라에서> 속 모항의 세계관은 <북촌방향>의 북촌보다 도식적이고 게임적이다. 각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마다 “좋은 곳을 보여주겠다.”며 안느(이자벨 위페르)와 함께 걸어 나가지만 다음 숏에서 항상 모습이 누락되어 있는 원주(의미심장하게도 이야기 밖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정유미가 1인2역 혹은 1인4역을 수행한다)의 존재는 의례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프롤로그다.
동시에 그녀는 안느를 (자신이 축조했는지도 모를) 게임의 상황 안으로 끌어들이는 팜므파탈이다. 같이 걸어 나간 뒤 생략된 정유미의 기능 덕분에 갈림길 앞에 혼자 선 안느의 모습에서 일련의 불안감이 포착된다. 이 갈림길은 게임의 시작점으로 왼쪽에는 라이프하우스가 있고 오른쪽에는 라이프가드가 있다.
<다른나라에서>의 게임은 <북촌방향>의 게임과 다르다. 앞서 말한 대로 보다 더 게임적인 성질을 스토리텔링의 도식 안에 내장시켰다. 그 내장된 성질이란 플레이어가 게임 안에서 등대를 찾아야 한다는 일종의 명료한 목표가 제시됨으로써 나타난다. 각 에피소드에서 안느의 외출은 욕망의 시작이자 명료한 목표의 제시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안느의 선택(실시간 전략)에 따라 상황은 변주되고 욕망의 선은 정확한 목표점에 닿지 못하고 뒤엉킨 순환운동을 수행한다. 각 에피소드들은 홍상수의 초기작들처럼 대구를 이루고 있지도 않고, 근작들에서처럼 중첩을 이루고 있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이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독립적인 유기체로 움직인다.
각 에피소드들이 공유하고 있는 핵심적인 모티브는 명확하게 드러난 서버 간의 충돌 혹은 침범을 게임이 지니고 있는 성질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만년필, 우산, 소주병 등은 세 개의 에피소드에 걸쳐 다른 역할로 매번 등장하게 되고 비단 소도구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이동의 모티브 또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요소로서 작동한다. <북촌방향>에서 서버 간의 충돌은 곧 세계관의 논리를 배척하는 일이었고 그 결과 플레이어는 결말에 이르러 혼란 속에서 데이터를 리셋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다른나라에서>는 각 에피소드마다 안느와 주변 인물들을 가로질러 등장하는 특정 모티브들의 교집합을 통해 세 가지 에피소드를 수평적 순환구조로 보이게 하거나, 1부에서 2부, 2부에서 3부로 갈수록 각 에피소드들의 설정이 더해지고 두터워지며 완성되는 점층적 구조처럼 보이게 만든다.
각 서버 간의 유기적인 이동은 각 에피소드들을 하나의 카테고리 안으로 맥락을 갖게 된다. <다른나라에서>의 세계관은 각 플레이어 사이의 네트워크 플레이의 활성화를 용인하고 더 나아가 그 플레이어들 간의 네트워킹을 스토리텔링의 변화 안으로 끌어들이게 된다(이 네트워킹은 각 에피소드마다 지난 에피소드의 관계의 영향에 따라 변화하는 안느의 의상 디테일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이 맥락에서 인물들과 소도구들이 각 에피소드에 따라 각기 다른 프로필로 등장하는 것을 게임에서 배경을 간소화하고 소품을 다양한 의미로 표현해내는 것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이 영화가 선택한 간결한 옴니버스의 구성은 관념적인 맥락에서의 서버 이동을 가능케 하고 각 서버 간의 유기적 네트워킹을 겨냥하고 있다. <북촌방향>이 세이브 타이밍을 놓치고 누적된 과거의 선택에 얽매여 있다면, <다른나라에서>는 매번 같은 상황에서 리셋하여 자유롭게 서버 사이를 넘나든다.
<다른나라에서>는 개별적 데이터베이스의 충돌(각 에피소드들은 얼핏 독립적으로 완결된 서사와 결말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을 통해 게임의 총체적 완결성을 가지게 되는 신기한 완성을 이루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때 서사적 상상력은 데이터베이스적 상상력으로 옮겨가며 이는 곧 현실인식의 다양화로 직결된다. 세 번에 걸친 서로 다른 프로필의 안느들과 서로 다른 남자들과 서로 다른 소도구들의 느슨한 연계들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현실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들이다.
그 인식들을 통해 희미해보이던 욕망의 선을 정확하게 하려 한다. 두 갈림길 말고는 갈 곳이 없는 도식적이고 삭막한 구조의 모항은 이 욕망의 선을 구체화하기 위해 세팅된 스테이지이다. 여기서 플레이어의 물리적 목표는 등대 찾기이나 실상 그것은 맥거핀이다(안느는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안전요원을 만나 “등대는 어디 있나요?”를 묻지만 이내 “nevermind(됐어요)”라고 말한다). 안느는 이미 자신의 욕망을 분명하게 했기 때문이다.
안느(하나의 인물 혹은 하나의 이름을 가진 세 인물)는 결국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임을 알고 자신의 필요에 의해 갈림길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간다. 거기서 영화는 정유미의 내레이션으로 복귀하지 않고 안느의 뒷모습에서 끝난다. 안느는 자신의 욕망을 인식하고 세팅된 게임으로부터의 탈주에 성공한다. 그러나 왠지 쓸쓸하고 애잔한 분위기가 감도는 이 결말 장면에 어떤 가설을 세우고 싶다.
안느는 어디로 갈 수 있는가.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인식했으나 방향을 알지 못한다. 결국 3부의 안느가 이전의 안느가 잃어버린 우산을 찾고 떠나는 것처럼, 다시 1부의 안느가 되어 3부의 안느가 버린 깨진 술병에 위협을 받지 않을까. 3부의 안느는 자신의 주체성의 획득을 위해 1부와 2부의 안느에게 위협을 가한다.
각종 소도구들을 동원해 조화로운 곡주를 이룬 것처럼 보였던 각 서버 사이를 침범하는 교집합들이 끝내 사악하고 불균형한 파토스를 견지한 채 존재감을 도사리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이 결말은 <하하하>의 결말에서처럼, 다가올 허무를 견지한 채 곧 끝나버릴 해방감을 만끽하는 듯한 무력함이 느껴진다.
마지막 장면을 단순히 스테이지 클리어라고 말할 수 없다. 안느는 아직 등대를 찾지 못했다. 안느의 탈출은 세 번의 미끄러지는 관계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성립된다. 세 번의 되풀이를 통해 전달되는 공통적 애잔함을 치러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는 라이프하우스와 라이프가드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는 인간에 대한 연민인 동시에 세계관에 대한 체념이다. 등대를 찾으려 하나, 우리는 그것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며 끝없이 미끄러지며 그것을 찾아야 한다. 스테이지의 세계관은 설립되었고 목표에의 매혹은 여전히 (안느를 제외한) 인물들을 피로감에 빠지게 만든다.
혹은 다른 가설. 이 결말이 게임의 세계관으로부터의 안느의 탈출이라면, 안느가 거쳐 간 그 길에 남은 세팅된 게임 상의 구성들은 이제 폐기되는 것일까. 안느와 마주치지 않을 때, 물속에서 수영하는 운동성으로만 존재했던 잉여로서의 안전요원을 떠올려보자. 안느는 자신의 욕망의 선을 정확히 인식했으나 모항이라는 스테이지 안에 범람하던 안느를 향한 욕망의 선은 그 배경의 설명을 미묘하게 변주하고 재활용하면서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맥락에서 <다른나라에서>는 <북촌방향>과 정반대가 된다.
북촌과 모항
<북촌방향>이 영원히 북촌을 떠돌던 성준의 피로감에서 끝났다면, <다른나라에서>는 모항이라는 스테이지(속 요소들)의 피로감을 역설한다. 오직 안느만이 감정의 편린들을 해소하고 자신의 욕망을 오롯하게 볼 수 있다. 안느는 정말 떠나는가. 그렇다고 해도 이 스테이지는 해소되지 않은 욕망의 선이 부르는 또 다른 플레이어를 소환할 것이다. 우울한 뉘앙스를 바탕으로 건축된 영겁회귀의 불안감. 모항은 탐욕스럽게 입을 벌린 욕망의 블랙홀이다. 안느는 자신의 나라를 찾고 돌아갔으나 모항에서의 등대 찾기는 (누군가에 의해)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인 채로 계속될 것이다. 과연 게임은 끝났는가.
원문 : Fantasy